가시떨기(펌)

목사는 사울이 아니다

moonbeam 2014. 7. 29. 20:38
   

 

 

목사는 사울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하릴없이 조롱받고, 이처럼 거세게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주의 종’을 자처하는 목사들의 부정과 불의에 기인한다. 물론, 타락한 교회에 비단 ‘비리 목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 외에도 이른바 ‘중직’이라고 일컫는 유력한 교인들이 존재하며, 사실상 대다수 교인들의 암묵적인 동조가 없다면 목사의 비리가 지금처럼 자주, 그리고 간단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의 만연한 비리를 우선 척결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에서 무언가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는 것은 마치 숲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처럼 실로 무의미한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목사가 설교권을 독점하는 것은 물론, 재정, 인사, 행정의 모든 분야에서 교회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거하는 뚜렷한 진리다. 교회인들 다르겠는가? 차라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세상에는 소수일망정 언제나 정당한 비판 세력이 있었지만, 목사를 신처럼 추종하며 ‘온 정성을 다해’ 맹종하는 교인들이 목사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모이는 ‘개교회’에서 목사에 대한 비판은 이른바, ‘금단의 성역’이다.

물론, ‘목사에게 맹종하라’고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한국교회는 교묘하게 ‘말씀’을 오용하며 교인들을 세뇌시킨다. 교인들의 비판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제시하자면, “비판하지 말라”와 더불어,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시며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구절,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사울을 살려두면서 “기름부음 받은 종을 치지 않겠다”는 다윗의 선언을 실례로 들 수 있다.

만약에, 실제로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고 ‘어떤 경우에도 주의 종을 공격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설령 이같은 가르침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교인은 다소곳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신앙은 이성이 아니라 순종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주의 말씀은 계명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정의’조차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의 정의와 구별해서 성경적 정의, 곧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자이다.

그러나, 마치 비판 자체를 원천봉쇄하는 준엄한 주의 명령처럼 받아들였던 세 구절 모두, 본래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사실인즉 원어의 부정확한 번역과 의미의 자의적인 확대 해석, 그리고 문맥의 오해에 기인하는 명백한 오류다.

어쨌든, 간단하지 않은 세 구절을 한정된 공간에서 전부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구절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우선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나를 비롯해서 비판의식을 지닌 많은 형제들이 숱하게 겪는 경우이지만, 목사들의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정중히(?) 비판한들, 의례히 돌아오는 교회의 타성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종인 목사를 감히 비판하지 말라”라면서, 불의한 사울을 끝내 죽이지 않았던 다윗의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의 뜻이라며 오롯이 성경의 근거로 제시한다.

“...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는 것이니...”(삼상24:6)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사울을)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삼상26:9, 11)

그렇다. 실제로 다윗은 ‘악령’에 사로잡힌 채 자기 목숨을 끈질기게 노리던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사울을 피해서 힘겹게 도망다니던 다윗에게 두 번이나 사울을 처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다”라며, 끈질기게 자신의 생명을 노리던 사울을 주저없이 살려주었다...

교인으로서 이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뻔한 내용을 마치 맛진 곶감 빼먹듯이, 비리 목사를 변론하는 결정적인(?) 논거로 내세우면 논지가 너무 가벼워진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살려둔 것과 비리 목사를 비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돈과 성(sex) 그리고 공명심 따위, 비루한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서 세인의 매서운 지탄을 받고,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비리 목사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삼상10:1) 과연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울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인가? 세상에 흔해 빠진 비리 목사들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영적 권위를 지녔는가? 하나님이 언제 사무엘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목사들에게 기름 부으시며, 왕으로 세우시고, 나의 종아! 라고 선택하셨던가? "여호와께서 네게(사울에게) 기름 부으사..."(삼상 10:1) 사울은 하나님이 친히 기름부으신 종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거짓 선지자는 가차없이 죽이라”고... 주의 말씀을 제멋대로 도용하는 것이나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 사이에 사실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이시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가르치지 않는가? 치졸한 자기 변명과 방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러 들이대지 말라...!

다윗이 불의한 종 사울을 죽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다윗은 이미 사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기름부음(선택)과 영적 권위가 사울에게서 떠나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던 하나님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사울을 친히, 그리고 엄히 심판하셨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삼상16:1)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16:14)

성령이 떠난 사울은 더 이상 주의 종이 아니다. 따라서 다윗이 사울을 살려둔 것은 사울이 한 때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살려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재차 나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며, 사울의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26:10)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시기 때문에, 똑같은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교인들이 나서서 감히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 그들에게 무서운 징벌이 뒤따른다...”라는 말로 오늘날 교회지도자들이 '비판하는 교인들'을 향해 서슴치 않고 위협을 가하지만,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런 말을 일삼는 자들의 ‘화자의 의도’는 자명하다. 즉, 간음한 여인이 주께 용서(?)받았던 것처럼, 마치 자신들의 더러운 죄과가 없었던 일인양 지워지는, ‘무조건 용서’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이 저지르는 패악을 결코 방관하시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사울)의 용모와 키를 보지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물론 '주의 종'은 특별한 존재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면서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소돔성의 심판보다 무서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주의 종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머물 곳을 제공하라고 말씀하셨다. “일꾼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종들을 ‘존경할 만한 자’로 인정해야 하며, 정성스럽게 ‘영접’(대접)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 과연 주의 종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이 주의 종으로서 여전히 존경과 영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말씀을 왜곡하는 자는 주의 종이 아니라 주께서 저주하신 '거짓 선지자'이며, 입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탐욕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짓 종에 대해서 영접은커녕 가차없이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한국교회의 수많은 비리 목사들이 ‘주의 종’ 운운하며 구약시대의 선지자처럼 융숭하게 대접받기를 원한다. 왕처럼 행세하기 위해서 그럴듯하게 ‘말씀’을 인용하고는, 말씀에 빗대서 슬그머니 자신의 영적 권위를 드높인다.

“목사에게 복종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며, 복종하지 않는 자는 무서운 벌을 받는다...”

실로 우스꽝스러운 궤변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배역자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복과 저주를 입에 담는다는 것이야말로 자가당착이며, 언어도단이 아닌가.

마치 자신들이 ‘태초부터’ 하나님의 기름부은 종인양, 짐짓 ‘왕같은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도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심지어 자신들의 추악한 죄악이 세상에 드러나도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신다"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과 사울의 예를 들어가며 철저히 자기 방어에 나선다. 덕분에 한국교회의 비리 목사들은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도 좀처럼 치리되지 않는다. 말그대로 한국교회의 목사직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다시 말하지만, 다윗이 사울을 살려둔 것은 사울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종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울에게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았던 다윗은 하나님이 이미 심판하신 사울을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구하기 위해서 ‘손을 들어’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앞서려는 교만이며 불충이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을 뿐이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16:14)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다윗 시대처럼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시기 때문에 비리 목사들의 타락과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그렇지 않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종들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고, 배역한 자에 대해서 종의 자리에서 내쫓는 것이 합당하지만, 오늘날 목사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종이 아니라 종교 절차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운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역을 맡기기 위해서 세운 종이라면, 목사의 비리에 대해서 응당 그를 사역자로 세운 사람들이 앞장서서 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신들이 선택한 종의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기껏 권리를 행사하고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종이 더 이상 주의 종이 아닌 것처럼, 종교 절차에 따라서 교인들이 세운 목사도 그가 사역자의 본분을 어길 때는 교인들이 나서서 비리 목사를 사역자의 자리에서 즉각 배제하는 것이 정당한 이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정과 불의는 교회에서 전권을 쥐고 있는 목회자들의 타락과 탐욕, 교만과 외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리 목사를 지금처럼 방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용서가 아니라, 사실인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의와 불순종을 끊임없이 부추키는 해악이다.

정당한 치리는 교회를 정화하는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세상의 탐욕에 맞서 교회의 영성을 회복하는 효과적인 도구다. 목사는 교인들이 세운 사역자이기 때문에, 목사가 저지르는 비리를 가차없이 고발하고 단호하게 치리하는 것은 교인들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제, 사망의 길에 들어선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자는 모름지기... 성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