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거든 미련없이 떠나라

moonbeam 2014. 11. 22. 23:22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거든 미련 없이 떠나라

설교든 글이든 양두구육은 사기다

임종석  |  seok9448@daum.net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그 교회의 목사를 비난하면서도, 목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밥 먹듯이 한다고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그런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붙어 있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런 교인만을 탓할 순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니던 교회를 나와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을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죄라도 짓는 것처럼 금기시하는 교육을 받아 왔으니 무리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런 교회, 그런 목사가 있는지 모르지만,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목사도 있었다. 멀리 출타를 했다가도 가능한 한 대예배만은 본 교회에 와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도 있었다.

필자가 이 나이를 먹도록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남긴 후회되는 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데, 그 중에서도 떠나야 할 교회를 떠나지 못했던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뇌리의 한구석에 오물의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때 필자는 좋은 기분으로 교회에 갔다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은 예외 없이 마음이 상해 있곤 했다. 설교가 성경을 벗어나 목사 중심의 고집을 타당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그런 교회였던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필자는 주보의 칼럼을 보고 그 교회에 등록했었다. 칼럼 내용이 너무 좋아 필자가 원고에 손질을 하여 책으로 내 드릴 정도였다. 설교도 좋았다. 그런데 칼럼도 설교도 목사 자신의 민얼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보기 흉한 얼굴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했다. 많은 교인들이 보지 못한 가면 뒤의 민얼굴을 보아 버린 필자는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필자는 교회를 떠날 것을 생각했으나 아내가 반대했다. 우리 집은 머지 않아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참으면 자연히 교회를 옮기게 될 게 아니냐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었다. 필자로서는 참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고, 그런 교회는 오히려 떠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으나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때 필자는 말도 글도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된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지금도 시덥지 않은 글 나부랭이를 쓰고 있지만 그때의 그 깨달음이 도움이 되어 사실보다 진실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나의 생각 아닌 하나님의 뜻, 곧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쓰려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글이란 본시 일기 같은 특별한 것이 아닌한 읽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만 독자들의 입맛에 따라 쓴다면 뿌리는 있으나 물위를 떠다니는 부평초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대사도 바울의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거든 미련 없이 떠나라

 

이 땅에는 별의별 교회가 다 있다. 교회를 사유물처럼 자식에게 물려주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목사의 배 불리는 데에 쓰기도 하고, 그것으로 비자금이라는 것을 마련하기도 하는 교회도 있다. 횡령까지 하는 목사도 있다 한다.

필자는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새벽기도 때 강대상에 올려놓은 헌금봉투를 목사가 슬쩍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기에게 돌아올 몫이 줄어들까 봐 교회가 진 빚을 갚는 것도 반대하는 목사라 했다.

목사가 교인들과 하나님의 중간쯤까지 높아져 제왕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교회도 많다. 당회를 장악하여 장로들을 마치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을 다루듯이 하기도 한다. 그런 목사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20:28)”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앞에 든 유형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아닌 교회에 다니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거든 미련 없이 나와 하나님의 교회를 찾아 옮겨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롬3:10)는 것처럼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하고자 기도하며 노력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깨달아 그로 인해 변화되어 성장하고자 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앞에 든 권사님은 속앓이를 하다가 필자를 찾아와 상담을 청했던 것이다. (권사님은 필자가 모교회의 주일학교에서 가르쳤을 뿐 아니라 친구의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권사님은 교회생활이 지옥 같지만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 같아 떠날 수가 없다 했다. 필자는 그런 하나님의 교회 아닌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 했다. 몇 달 후에 만난 권사님은 무척 밝아진 모습으로 교회를 옮겼는데, 교회생활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했다.

 

작은 행복을 크게 누리는 것이 진정한 행복

 

필자는 예배시간 10분쯤 전에 예배실로 들어가는 일이 많다. 시간에 맞추려 했다가는 늦어질 수도 있고, 늦어지기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로 예배를 드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으면 물론 기도를 드린다. 예배의 시작 전까지 모두가 찬송은 한두 곡 부르지만 필자는 약간의 미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계속한다. 이때의 기도는 왜인지 다른 때 드리는 기도보다 부드럽고도 평온하게 감싸주는 무엇인가를 느껴져 필자는 이 짧은 시간을 좋아한다.

지난 주일도 10분쯤 전에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 왠지 모를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니, 감사의 눈물이었다. 이렇게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감사하고,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감사해서 나온 눈물이었다.

감사는 행복을 부르고 행복은 더 깊은 감사를 자아낸다. 그런데 행복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행복으로 느낀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을 자신은 불행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의 큰 행복은 평생을 두고도 몇 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행복을 크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니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는 것까지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행복한 사람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필자는 그리 행복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필자와 같은 처지를 보고 사람에 따라서는 불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필자는 행복하다. 날마다, 시간 시간마다 행복하다. 모든 것이 거의 다 좋다. ‘좋다’는 말을 입에 물고 사는 때도 없지 않다. 무엇인가를 보고 ‘좋다’고 하면 아내는 ‘당신한테 좋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기도 한다. 은혜, 은혜이다.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좋은 교회를 찾아 헤매던 필자

 

필자는 정년퇴임을 하고 대전에서 고향인 이곳 전주로 이사를 하자 주일이면 몸담을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교회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자기네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로는 하나님의 뜻인 성경에 따르려는 신앙의 자세들이 아니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설교를 통해 자기의 군대생활에 관한 간증을 했다.

― 통신병이었던 내가 초년병 시절 부대배치를 받아 간 첫 주일에 통신실의 근무를 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통신실을 비워 둔 채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호된 기압을 받았습니다. ―

이 같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고서 그는 신앙이란 자기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의 기독교 신앙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웬만한 크리스천이라면 모르지 않는다. 만약 전시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일대를 적군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좀 더 확대하여 해석한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전쟁에 지고 말 수도 있을 것이다. 통신은 나라가 됐건 군대가 됐건 신경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교회의 일을 직장까지 가지고 가서 남의 눈을 피해 가며 하는 사람도 있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은 덕분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어 업무가 방해를 받는 사람도 없지 않은데, 그런 이들을 가리켜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또 어떤 교회의 목사는 “집에서 100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1분 기도하는 것이 낫다”며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아니다. 기도는 가능하다면 교회든 집이든 시장복판이건 어디든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이 좋다. 북새통 같은 시장 속일지라도 집중된 정신으로 하나님께 향할 수만 있다면 거기가 기도의 골방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하는 기도라 해서 더 잘 들어 주시고 다른 데에서 하는 기도에는 귀를 막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드릴 수 있다면 그가 좋은 기도의 사람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교회다운 교회도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다운 교회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때 대전으로 이사하기 전에 같은 교회의 한 구역 식구였던 권사님 한 분으로부터 “목사님, 고OO가 교회를 잘 택해 다니고 있는지 한 번 오셔서 봐 주세요”라며 지금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권했다. 이분 고 권사님도 필자처럼 전의 교회에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결국 교회를 옮겼는데, 만날 때면 가끔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자랑을 하곤 했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때 집사였던 그 권사님은 나이가 필자보다 열댓쯤 적었으나 신앙생활을 아주 예쁘게 하셨던 분이었으므로 그 다음 주일에 반의반쯤의 기대로 그 교회에 가 보았다. 그런데 그 교회의 예배에서, 아니 설교에서 필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진한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구구절절이 성경을 붙잡고 놓지 않는 설교였다. 성경의 자구(字句)가 아니라 그 정신 그대로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 뒤 지금까지 만 6년 동안을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감사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무엇인가 불만이 있다면 지금까지 한 번도 헌금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지 못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신 것처럼 헌금은 무척 중요한 것인데 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동안에 한 번도 그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다니 필자의 생각으로는 너무한다 싶었다.

얼마 전에 목사님과 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어 농담 삼아 ‘헌금에 대한 설교를 안 하는 것은 목사로서 직무유기’라 했더니, 아니라 부정하며 나도 본문에 헌금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헌금 설교를 한다 하셨다.

필자의 교회라고 어찌 헌금에 대한 설교가 없다는 것 빼고는 모두가 다 만족한 것뿐이겠는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만족한 것에 비하면 운니(雲泥)만큼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전자는 후자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교회 아닌 교회의 교인들이 속앓이를 하는 것을 보면 그러지 말고 좋은 교회를 찾아 옮기라고 권면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가 교회 옮기는 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한다. 교회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아니면 아무리 둘러봐도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옮기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며, 교회다운 교회 또한 없는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의인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해지고자 기도하며 노력하는 교회는 있다. 있지도 않은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완전을 목표로 하여 말씀을 붙잡고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교회를 찾으면 된다.

모교회이기에 떠날 수 없다는 사람도 있고, 부모대로부터 섬겨 온 교회라서 떠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좋은 현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같은 교회와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니다.

물론 쉬운 생각으로 경솔하게 교회를 옮겨서는 안 된다. 조금만 비위가 상하면 금방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은데, 안 될 일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교회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게 된다. 어디에도 제 마음에 100% 맞는 교회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데, 안될 일이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 다른 것을 중심으로 돌아서는 큰일이 난다. 우리는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교인들은 모두가 기복신앙의 중독자인가

 

필자가 다니는 교회,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이벤트성 사업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어떠한 행사든 거의 안 하려는 주의이다. 교회에서의 행사는 들어가는 노력과 비용에 비해 성과가 적은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데,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교인들을 행사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교회 봉사를 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보다 나가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한다. 등경 위에 두어야 할 등불을 교회라는 말로 덮어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개의 목사들은 이른바 기복신앙이라는 것의 병폐를 안다. 알지만 교인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목회가 그쪽으로 끌려가게 된다고 한다. 어떤 목사는 축복을 해 주어도 발꿈치로 꾹꾹 눌러서 해 주지 않으면 교인들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성경대로 가르쳐서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래전부터 모든 교인이 다 기복신앙을 원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 왔다. 생명을 구하는 복음의 신앙, 말씀에 의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진리의 신앙을 갈망하는 신자들도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것은 필자가 지금의 교회로 옮겨 온 뒤 자연스럽게 증명되었다.

필자가 지금의 우리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6년 전에는 주일 대예배에 4백 명 정도가 모였데, 현재는 1천 명 정도가 함께한다. 중간에 예배당이 비좁게 되어 신축을 했는데,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쌓아 올린 벽체에 지붕을 얹은 모양으로 극히 심플하게 지어 건축비를 줄일 대로 줄였다. 건축헌금에 대한 광고는 딱 두 번 알리는 것으로 끝냈고, 그에 대한 설교는 한 번도 없었다.

교인들의 비위를 맞춰 그 수를 늘리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패스트푸드 같은 것을 많이 먹어 비만증에 걸린 사람처럼 비정상이 된 것이다. 아니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되는 종양인 것이다.

그런데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목사들뿐이 아니다. 교인들 중에도 있다. 기복신앙에 중독되어 그것만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작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헌금을 많이 하여 교회 재정에 큰 보탬이 되게 하는 교인 중에는 목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목사가 교인들의 입맛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난이나 뒷공론으로는 비위(非違) 목사들의 버릇을 고칠 수 없다. 그들은 옳은 말엔 아예 귀를 막아버리고, 비난이나 욕설 같은 것은 들어올 구멍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백날 비난하거나 욕을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거든 미련 없이 떠나 한 뼘이라도 더 나은 교회로 옮기는 것이 나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현명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버릇을 고치는 데에도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교인들이 다 떠나고 없는데, 무슨 수로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겠는가. 모두모두 떠나는 수밖에 방법은 달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