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설교, 누구에게 무엇으로 하는가 --- 나는 설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moonbeam 2014. 12. 1. 20:49



허물투성이 주제에 누구에게 설교를 해?

 

  
임종석

목사님들은 어쩌다 한 번이라도 설교를 안 하고 넘어갈 일이 생기면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의 하나를 해도 그게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과목이면 내심 학생들보다 휴강을 더 반기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하물며 진리를 선포하는 행위가 설교인데 왜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랑의 원자탄>으로 널리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은 목사들이 설교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는 그런 걸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설교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는 것이기에, 본문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도 성경에서 찾는 가운데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가며 준비를 하니 부담감 같은 것은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설교는 성경만을 의지하여 한다고 하는 절대적인 신념이 없는 한 할 수 없는 말이다.

설교는 일반적으로 목사인 설교자가 교인들인 청중에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일방적으로 청중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홀로 의인이신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의인이 아니라 허물투성이인 인간이 감히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남을 비난하기 위해 손가락질을 하는 손가락은 하나이지만 그때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셋이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허물이 하나라면 나의 허물은 셋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남과 나의 허물 비율이 1:3은 아닐지라도 1:1일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다. 그래도 목사이기에 교인들보다 신앙에 있어서의 허물이 적다 할지라도 그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가리켜 적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허물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 중에는 설교를 하는 목사보다 허물이 적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의 설교는 제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사람이 남의 눈의 티를 빼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인간들의 실상이 그러한데 누가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아마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교인들보다 허물이 많은 목사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설교자가 안고 있는 허물의 다과에 있지 않다. 마음의 문제, 곧 신앙의 자세에 있다. 손가락질을 하는 손가락은 하나이지만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셋이라는 마음으로, 그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나에게도 허물이 있다는 자기성찰을 마음의 바닥에 깔고 하면 된다.

설교자는 그 준비 단계부터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준비를 하면서 자기에게 먼저 설교해야 한다. 그러며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허물이 적은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고 자기변화에 게을리 한다면 변화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허물 많은 사람만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교인들을 섬기되 그들에게 휘둘리지 마라

 

설교자는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인 성경말씀에 합당한가만을 생각하면 된다. 교인들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교인들의 가슴을 찔러 상처를 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의 귓맛에 맞춰서 설교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패스트푸드만도 못한 영적 불량식품을 먹이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싶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십일조를 정확히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헌금을 힘에 겹도록 하라’고 하는 따위의 설교는 교인들을 하나님과 등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마음은 세상 것들로 향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없어 십일조 등의 헌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다 당신 것인 그분께서 무엇이 모자라 자녀인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시겠는가.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헌금에 실린 당신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다. 아니 하나님께로 내달아가는 사랑의 마음에 묻어가는 것이 진정한 헌금이다.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연인에게의 선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질지 모른다.

힘에 겹도록 헌금을 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식의 생각은 하나님을 우리와 거래하는 장사꾼으로 만드는 것으로, 그분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축복을 받기 위한 헌금이라면 안 하는 것이 좋다. 헌금을 해 놓고 그 대가로 무엇인가의 축복이 내려지리라 은근히 기다리는 것도 안 된다. 아깝거나 인색한 마음이 들어도 하지 마라. 힘겹게도 하지 마라. 헌금이 됐건 헌물이 됐건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목사의 배를 불리거나 하나님의 일이 아닌 데에 쓰인다면 그런 교회는 떠나라고 지난 번 글에 썼는데, 그대로다. 그런데 교역자들에게 지급되는 적정한 생활비를 보고 그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 쓰이는 것이라 하면 안 된다. 그들도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아니 반드시 생활인이어야 한다. 그래야 생활인으로서의 교인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 자신들도 교역자는 성직자이지 생활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생활인으로서 생활인인 교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교역자가 생활에 신경 쓰지 않고 교역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도 그런 생각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성직자라 해서 천사처럼 땅에 살지 않고 하늘을 오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도 발에 흙을 묻히며 살아야 하는 이상 생활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성경의 정신에 따라 하면 하나님의 일이고, 반대로 그분의 뜻이 아닌 방법으로 하면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일이 되지 못한다.

필자는, 가장 큰 하나님의 일은 그분의 뜻에 따라 하는 일상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정말이지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해도 성경정신과 어긋난 방법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모든 것 또한 헌금과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힘이 모자라 우리에게 하라 하신 것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 누구도 이 같은 표현으로 설교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으로 하는 설교는 얼마든지 있다. 하는 말만 다를 뿐이지 이 같은 의미로 하는 설교가 많다는 말이다.

교인 수가 적은 교회에서는 그 중에 하나라도 떠날까 봐 벌벌 떠는 목사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헌금을 많이 하여 교회 재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교인들 가운데는 수가 틀리면 교회를 떠나고 말겠다는 암시로 목사를 길들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독선이 안 되는 것처럼 흔들리는 것도 안 된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목사가 되가지고 잘못된 길을 요구하는 교인들에게 휘둘려선 안 된다.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안 되지만, 휘둘리는 것 또한 안 된다. 교인들은 그들에게 휘둘림을 당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섬겨야 할 성도이다. 몸소 종처럼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기준은 오직 하나 성경뿐이다. 성경을 튼튼히 붙잡는 것만이 믿음이라는 나무의 뿌리를 땅속 깊이 박게 하여 아무리 강한 바람에도 끄떡없게 한다. 교인 수가 적어 심약한 목사들이여, 교인들을 섬기되 그들의 힘에 끌려 다니지 않고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 신앙의 바른 자세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를 한풀이나 공격의 무기로 쓰지 말라

 

‘교만한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더 많다.’ 필자가 전에 출석했던 교회의 주일 대예배 설교에 거의 거르지 않고 등장한 말이다. 필자는 기도를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밤에 교회에 나가 두어 시간씩 기도를 했으니 적게 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도하는 것조차도 목사님께서는 못마땅했던 것 같다. 목사님은 무엇인가로 인해 필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주일 밤 예배 후 교회에 남아 기도를 하는데, 젊은 전도사님 한 분이 필자 옆에 바짝 다가앉아 기도를 했다. 아니 하는 척했다. 교인들이 다 돌아가고 5,6백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모두 비어 있는데 왜인가라는 의심은 할 필요가 없었다. 목사님이 전도사님을 시켜 필자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아보라 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여전도회 헌신예배의 기도에 필자를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누가 들어도 필자를 비난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기도였다. 그런데 기도를 한 회원은 필자와 동향으로, 필자가 모교회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사람이었다. 그런 기도를 할 사람이 아닌데 필자로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그녀도 필자도 서먹서먹하여 서로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목사님이 기도문을 써 주며 그대로 읽으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하!’ 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대응을 해 봤자 교회만 시끄러워질 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러니 목사님으로서는 화도 낼 수 없고 답답하기만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설교로, 또는 기도로까지 보복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정말로 신앙의 귀감이 될 만한 노인 권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권사님이야 말로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다. 그러니까 그 권사님과 필자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거의 매주일 설교를 통해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대전으로 이사를 한 뒤로는 그런 설교가 두 번 다시 없었다 한다. 권사님은 필자 때문에 큰 피해를 입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설교를 자신의 한풀이, 또는 공격의 수단으로 쓰고 있는 목사들도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필자도 설교를 했던 사람인데, 솔직히 자신에게도 그리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참으로 위험한 일로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지 않으면 크나큰 죄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설교의 청중인 교인들로서도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닌데도 자기 들으라 한 설교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 또한 그런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 자기 들으라고 한 설교라 해도 옳은 것이라면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이다.

설교는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설교는 교인들에게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하는데,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혹 바르지 못한 내용이 있다 해도 그것을 반면교사로 하여 자기 영혼의 자양분으로 섭취할 수 있는 성숙한 자세의 지혜로움을 쌓아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