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귀족 목사가 '깨끗한 부자'인가

moonbeam 2015. 3. 3. 09:00

수년 전 어느 대형 교회의 유명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여 소위 '청부론'의 포문을 연 적이 있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참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에 동조하고 호응한 목사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청부론은 목사가 고가 주택과 고급승용차는 기본이고, 추가로 터무니없는 고액 연봉과 부대비를 받으며 자기 교인들 평균보다 크게 사치하게 살더라도 이를 적당히 무마할 수 있는 '면죄부'가 되어주기 때문에 일부 목회자들에겐 매우 고무적인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지 않는 비신자들 중에도 갑부가 많고, 반대로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도 평생 가난한 목사님과 성도들이 아주 많은데, 청부론은 이를 또 어찌 설명할 것인지 다소 궁금합니다.

 

청부론의 본심은 '나머지 부'에

 

아무튼 정작 많은 성도들이 그 청부론의 진의에 대해 크게 우려한 이유는 그 다음 이어진 그분의 발언에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위한 십일조와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헌금을 드린 뒤 '나머지 부'에 대해서는 자유로워도 좋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소액은 헌금과 기부를 하고 나머지 거액으로는 부를 누리든, 축적을 하든, 아니면 무슨 옆차기를 하든 자유롭게 쓰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게 그 심오한 청부론의 본심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만일 보통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고 또한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구제에 사용한다면 이는 매우 잘하는 일입니다. 그 정도만 해도 남은 돈으로 생활을 하려면 별로 여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부자의 경우는 크게 다릅니다. 같은 비율로 헌금과 구제를 해도 여전히 돈이 많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부자들이 "그걸로 충분히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사실상 '율법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온전히 행하지 않고, 겨우 율법의 껍데기만 지키겠다는 처사이지요.

따라서 청부론은 성도들이 재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라 하며 평소에 '청지기 정신'을 운운하시던 목사님들께서 당당하게 주장할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토록 큰 나머지 부를 관리하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쓰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게 정말 제대로 된 청지기일까요. 이는 3살 먹은 어린 아이도 웃을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깨끗한 부자'라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생활비로 하고, 반대로 그 나머지 목돈을 선한 일에 사용하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런 면에서 청부론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격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한때 고액 연봉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한 대형 교회의 목사님 입에서 저런 주장이 나와야 했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갈수록 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으며, 교회조차도 이런 여파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소위 '교회에 다니는 부자'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점차 따거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살찐 양들을 보살피며 보호하시려는 목자의 심정으로 그런 기름진 주장을 펼치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저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수준의 의미가 아닙니다. 낙타는 절대로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못 가나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왜 부자는 안 되나? 돈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예수님 십자가 사역이 부자들에겐 예외인가? 부자도 그 많은 재산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살면 더 좋지 않나? 아마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저리 극단적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먼저 우리는 부자에 대한 정의를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산과 수입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일까요. 부자의 기준에 대한 문제는 누구도 일률적으로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여 모두 극빈층으로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상식선에서 이야기하자면, 일단 부자란 사회의 평균 재산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산층보다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면 부자라고 보아도 큰 이의는 없을 것입니다. 중산층이란 돈이 아주 넘치지도 않지만, 반대로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경제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보편적 계층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왜 그리스도인은 중산층 이상의 과도한 부를 추구하면 문제가 될까요.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 무조건 부자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방법이 정당하기만 하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것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돈을 얼마나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매년 10억 원이나 벌어도 그 돈을 구제에 다 쓰면 그는 부자가 되지 못 합니다. 순수입은 거의 없는 셈이지요. 그러나 매년 1억 원을 벌어도 해마다 그 절반만 꾸준히 모으면 그 사람은 나중에 결국 부자 근처에 갈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스스로 돈을 불려주니까요.

자산이 1억 원인 사람은 평생 부자가 되기 힘들지만, 10억 원을 지닌 사람은 상대적으로 부를 늘리기가 보다 유리합니다. 물론 100억 원을 지닌 사람은 그 속도를 더욱 가속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단 그 '돈모으기 열차'에 한번 탑승하면 보통 사람들은 뛰어내리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 다음엔 1000억 원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 대부분의 부자들은 '돈의 신'인 맘몬을 이기지 못 합니다. 과연 자신의 부를 과감하게 소비하여 실제로 구제나 선한 일에 '전폭적으로' 힘쓰는 부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요. 극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거의 다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적극적 나눔'에 그다지 열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부자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필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론적으로 단순히 돈이 많은 부자라서 천국에 못 가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품은 진정한 성도라면 한낱 부귀에 욕심을 두고 결코 부자의 자리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눔'은 하나님의 계명

 

지금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 보십시요. 얼마나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까. '인생 문제의 절반은 돈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언제나 성도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돌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나눔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나눔은 준엄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를 외면하고 마냥 부를 축적할 명분이 있겠습니까. 우선 당장은 돈을 모아 사업을 성장시키고 나중에 크게 성공을 한 후에 가난한 이웃을 돕겠다는 말은 그 대부분이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충분히 성공한 기독교인 갑부들조차도 자신의 부를 다시 털어서 '전심으로' 가난한 분들을 돕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부를 키워 자식에게 고스란히 대물림할 뿐입니다. 다만 아주 단편적으로 극소수가 부의 사회환원에 적극 참여합니다.

따라서 깨끗하든 더럽든 부자는 그냥 부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깨끗한 부자'가 되라는 식의 가르침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에게 한 부자 청년이 왔습니다. 그는 율법을 아주 열심히 지켰으니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는 제법 깨끗한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 주변에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형제들이 많습니다. 돈이 없어 생계를 걱정하는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학비가 없어 꿈을 포기하는 친척들도 있습니다. 전세금이 모자라 고생하는 동생도 있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해 늘 우울한 형수님도 있습니다. 아파도 내색을 안 하시는 노부모님도 있습니다. 급기야는 생활고로 인해 목숨을 포기하는 이웃들마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을 모른 체하여도 정말 깨끗한 부자일까요. 돈을 더 모아서 나중에 이들을 돕겠다구요. 도대체 그 나중이란 것이 언제입니까.

전문적인 오너 기업인들에게도 할 말은 있습니다. 자신들은 거대한 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부를 관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명분으로 계속 사업을 키우고 주식을 늘려갑니다. 그리 크게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결국 자신들은 계속 사치하고, 회사 덩치는 늘 커지고 확장하여 갈수록 대형화합니다. 사업 수완이 부족하거나 운이 없어 망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부는 늘 확대될 뿐입니다. 사업 확장을 진지하게 절제하며 얻어진 이익과 늘어난 주식을 사원들이나 저소득층과 성실하게 나누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무한 경쟁의 경제 논리에 따라 '무한 증식'만 반복하는 것이지요.

세계적인 거부 '록펠러'가 단지 십일조를 잘했다고 해서 그의 나눔이 온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리어 그는 한때 미국인이 가장 증오하는 기업의 사주이자, 잔혹한 독점 자본가의 대명사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머지 부를 휘두르며 저지른 비행을 보면서도, 헌금과 구제를 제법했으니 그를 신앙적으로 깨끗한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질이란 '만나'와 같은 것

 

어떤 면에서 '청부론'은 오늘날 교회 대형화 논리와 매우 유사합니다. 비록 재산이 많더라도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과도한 부를 용납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좋은 일을 그다지 열심히 안 합니다. 다만 우아하게 부를 늘리려 더욱 고심할 뿐입니다.

일부 교회들도 처음엔 큰 일을 하겠다고 건물을 키워 사람을 더 모으고, 그래서 사람이 늘면 이번엔 또 비좁다고 건물을 다시 더 늘리고, 평생 그 짓만 반복하며 자산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제와 교육과 선교에 힘쓸 적절한 예산이 잠시라도 남아나겠습니까. 만날 돈 걷어 건축하고 은행빚만 갚다가 볼일이 끝나는 것이지요.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건축 완료 후에도 넘치는 돈으로 부패하며 단지 호사스런 '맘몬의 제자'들을 위한 밥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일부 귀족 목사님들처럼 십분의 일만 딸랑 바치고 나머지로 흥청거리지 않았고, 구제 조금 하고서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큰 건물 지어서 사람을 모으지 않았고, 사람 모아서 권력을 누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형통'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개부자'로 살라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자란 이미 그 깨끗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외면해야 비로소 큰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과욕을 포기하고 흩어 구제하면 결코 부자로 살기는 힘든 법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진리는 '고난주의'나 '고행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나눔'이란 내 가정이 피곤하고 빈궁할 정도로 털어서 남에게 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는 온 가족이 수도사처럼 고행하며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물질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은 피조물의 특권이며, 동시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 귀한 은총을 검소하게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과하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너무 많이 취하면 도리어 병이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취해야 좋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들에게 재물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나누던 '만나'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의 과소유를 금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나가 꼭 필요하고 좋은 양식이긴 하지만, 홀로 너무 많이 취해서 그것을 축적하면 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과소유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만나의 본래 목적에도 크게 위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열심히 일해서 남에게 손벌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동시에 적절한 절제와 절약으로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독교인이 돈을 많이 축적하여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면, 이는 "그 돈을 나눌 곳이 별로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 외에는 달리 설명이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부유하게 살고 싶으면 청부론 따위의 구차한 핑계를 대지 마시고 그냥 노골적으로 부자로 사십시요. 가난한 형제들을 못본 척하며 실컷 부를 채우십시요. 누구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로서 감히 청부론을 내세우지는 마십시요. 오늘도 거리에 널리고 널린 것이 가난으로 지친 이웃들의 그늘진 얼굴입니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깨끗한 부를 마음껏 누리라'는 식의 논리가 도대체 가당키나 한 것인지요.

 

제자 된 삶은 여리고로 가는 길

 

물론 가난이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은 선이고 부는 악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또한 구제에 끝이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는 가난보다 더욱 의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맘몬의 시녀가 될 여지가 더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실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 시간에도 대다수의 목사님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할 정도로 열악한 목회 환경 속에서 눈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설픈 청부론에 동참하며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귀족 목사들과 부자 교인들에게 중세적 면죄부를 함부로 안겨주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런 행위는 도리어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며 버릇없는 원숭이 손바닥에 송진을 발라주거나, 육갑떠는 광대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상승효과만 더욱 부채질할 뿐입니다. 아울러 이는 낙타가 바늘귀에 도전하려는 것만큼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틈만 나면 신도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그 정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려라(잠23:4, 공동번역)"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구구한 잡설이 더 필요할까요.

혹자는 부자를 예쁘게 치장하여 '깨끗한 부자' 또는 '의로운 부자'로 꽃단장하려 합니다. 하지만 부자가 아무리 깨끗하고 의롭다고 주장해도 그는 여전히 부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잡다한 수식어 없이 아예 '부자가 될 생각마저 버리라'고 단호히 경고합니다. 해 아래에 '돈과 권력' 앞에서 온전히 깨끗할 인생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부자, 도대체 이 두 단어가 조금이라도 어울린다고 보십니까. 헌데 목사도 하고 동시에 부자도 하겠다는 분들은 무슨 심보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부자의 자리를 거부하고 많은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사셨는데, 소위 예수의 종이라는 목사가 감히 부자로 살겠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논리인가요. 아니면 교회가 귀족 목사님들을 위한 무슨 수익성 좋은 무허가 영업장이라도 되는지요.

나그네 세상을 여행하는 성도에게 '깨끗한 부자'란 말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표현은 '가난한 부자'나 '친절한 강도'란 말만큼 모순적이며 공허한 말입니다. 특히 부자 목사를 '깨끗한 부자'로 단장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러느니 차라리 표절한 목사는 '학구적 목사', 횡령한 목사는 '야성적 목사', 세습한 목사는 '가정적 목사', 성추행 목사는 '감성적 목사', 그리고 사기꾼 목사는 '지성적 목사'로 미화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여리고를 향하던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돈이 많지 않고 부자가 아니어도 좋으니 기회가 주어지는 매 순간순간마다 성실하게 선을 행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숙한 제자들이 정녕 추구해야 할 것은 돈으로 즐거워하는 '부유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서로 돕고 나누는 '거룩한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24)"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