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생명의 언어, 말씀의 실상 / 김경재

moonbeam 2015. 3. 10. 08:13

구상 선생의 <말씀의 실상>을 서가에서 꺼내 첫 구절을 읽어본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다. 생명의 언어다. 말씀의 실상이다.

뉴델리 간디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마하트마(위대한 혼) 간디의 기념관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지만 서민적 친근감을 주는 기념관 입구 벽면의 한 글귀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진리가 하느님이다”(Truth is God)라고 영어로 표기된 문장인데 간디의 평생 신념이었다. 진리라는 말이 어렵게 들린다면 진실이라고 바꾸어 읽어도 좋다. “하느님은 진리 자체이다”라고 늘 듣던 신학도로서 놀랄 일도 아니련만, 문장의 주어와 술어를 바꿔 표현한 기념관 입구 글귀의 뇌성벽력 같던 울림을 필자는 잊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필자가 늘 듣던 명제는 관념의 말인데 간디 기념관의 글귀는 간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생명의 말이기 때문이다. 관념의 말은 몸으로 육화되어 삶으로 표현되지 않고 머릿속에 이념으로만 남아 그 사람을 지배하는 말이다. 생명의 말은 머리에서 가슴을 통해 나오는 말, 생명으로 경험된 말, 언행일치의 말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정당화하면서 “신(알라)은 위대하시다”라고 말하거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공공장소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확성기로 말해도 감동은커녕 내심 반감마저 생기는 것은 그들의 말이 관념의 말이요, 도덕적 공공성도 지키지 않는 교조주의적 폭력언어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는 가톨릭 신도가 가장 많지만 빈부격차가 심한 필리핀을 지난 1월 교종 프란체스코가 방문했을 때였다. 팔로마라는 이름의 12살 된 고아 소녀가 프란치스코 교종을 만난 자리에서, 그 어른도 당황스러워할 어려운 질문을 눈물 글썽거리며 하였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버림을 받고 많은 고아가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있어요. 마약중독이나 성매매 같은 나쁜 일이 아무 잘못 없는 어린이들에게 일어나고 있어요. 교황님, 하느님은 왜 아무 잘못이 없는 아이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시는 걸까요?” 프란치스코 교종은 아무 말도 아니 하고 고아 소녀 팔로마를 꼭 껴안아 주었을 뿐이다.

 

말없이 소녀를 껴안아주는 의미를 간디 기념관 입구의 글귀로 조명한다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태양광선이란 전자기적 복사열이다”라고 설명하는 물리학자의 광학이론 속에 빛은 있지 않다. 현실적 빛은 밝음과 열에너지로서 사물을 보게 하고 만물을 육성시키는 효능과 함께 거기에 구체적으로 있다는 뜻이다. 진리, 사랑, 아름다움, 정의 등은 초월적 보편자로서 하느님이라는 ‘주어’(主語)를 설명하는 술어(述語)가 아니다. 그것들 자체가 하느님의 구체적 현존방식(現存方式)이고 현실적 체현(體現)이라는 말이다.

 

1970년,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22살 된 한 청년의 분신 사건은 당시 양심적 지식인들과 강단 신학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의 요구는 단순 명료했다. 이미 있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어린 여공들이 최소한 사람대접 받는 노동조건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당대의 양심적 지성인 함석헌은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당신이 우리 모두의 진정한 선생이었소”라고 젊은 노동자를 선생이라고 양심고백했다. 안병무 등 십여명의 신학자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수입한 ‘관념적 신학언어’에 그동안 갇혀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옥중 경험을 통해서 성서를 ‘생명의 언어’로서 새롭게 읽는 눈이 트여 ‘민중신학’을 출산하였다(1975). ‘민중신학’의 요점은 오늘날 신의 현존을 만나려면 장엄한 예배, 계시적 경전, 권위적 전통 안에서 찾기보다 ‘민초들의 고난과 희망과 기쁨’ 속에서 체험하라는 것이다.

 

한국불교 정토회가 결성된 지 십년쯤 지났을 무렵,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국제학술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렸을 때(1996) 필자는 법륜 스님을 거기에서 처음 만났다. 대회 장소였던 드폴대학교의 기숙사에 함께 기숙했던 필자에게 당시 법륜 스님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나는 1970년대 중반, 기독교 소수 진보신학자들 가슴에서 일어난 민중신학 불꽃을 통해서, 초기 불교의 핵심 정신을 다시 확연하게 되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생이 곧 부처의 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실천불교, 민중의 고난과 희망이 곧 하느님의 고난과 희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민중신학, 그 둘의 직방회통을 법륜 스님이 말했을 때 필자는 놀랐고 감사했다.

 

왜 45년 전 전태일을 다시 회상하는가? 그의 젊은 혼 속에 일어났던 ‘거룩한 분노’가 새삼스럽게 존경스럽고, 최근 법조계 일부에서 ‘거룩한 분노’의 불씨가 식은 잿더미 속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9일 서울고법 형사6부 재판정(재판장 김상환)의 한 장면은 어느 날 신문 사회면의 큰 기삿거리로서 기억하고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다. 그 재판의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크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 찾기에 목숨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해방 후 다 피어보지도 못한 젊은이들의 생명을 희생하고 되찾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아니던가? 그 국가 정체성을 살려내느냐 죽이느냐, 실효헌법이냐 휴지 조각이냐 양단간 판가름내는 한민족 양심재판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 최고 정치책임자로서 이 재판 사건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그리고 당선된 후에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관련된 언급을 할 땐 마치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는 듯이 단호하고 예민한 반응을 국민에게 보였다. 원칙을 강조하고 원칙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당사자에겐 본인이 직접 개입하지도 않은 사건들로 인해 자신의 명예에 커다란 상처를 주며, 대통령 통치권에 추호라도 손상을 입히는 문제의 사안에 대하여 격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장을 비롯한 과잉충성파들과 후보자가 묵계나 야합을 했을 거라고 속단하고 국민이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재판과 수사 중인 여러 의혹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확실히 밝혀나갈 것”이라고 대통령이 말했다. 그 발언의 전반부, 곧 박 대통령의 결백 주장을 믿으니, 후반부 약속을 결행하라는 국민의 말 없는 명령이었다. 이제 고등법원에서 국기문란의 범죄라고 판결이 났다. 대통령직 정당성에 씻을 수 없는 흠집을 초래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큰 상처를 낸 관련 공직자들에게 준엄한 책임을 묻지 않는 대통령의 안이한 처사를 뜻있는 국민은 이해 못 한다. 원세훈은 “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국가와 국민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출세를 도모하는 권력지향적 어용 관료들과 부패한 군장성들이 국민을 농락하는 형국이다.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세종로 가로수 단단한 둥치를 뚫고 새순들이 함성 지르며 나오는 봄이다. 수많은 생명의 희생들이 역사의 밭에 거름처럼 되어 주었기에 우리가 오늘 여기 있다. 모두 겸허해지고 정직해야 한다. 혼자 잘나서 자기 된 줄 아는 권력가, 재력가, 그리고 사회 상위계층은, 사람은 모두 은혜 입은 빚진 자임을 강조하는 원불교의 사은교의(四恩敎義: 天地恩, 父母恩, 同胞恩, 法律恩) 가르침을 경청해야 한다. 광활한 대우주 가운데 여린 녹색별 지구를 타고 동시대를 짧은 인생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서로 적들이 되는 것, 무기 만들고 전쟁연습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서로 격려해주고 축하해줘야 할 길벗들이다. 구상 선생의 <말씀의 실상(實相)>을 서가에서 꺼내 첫 구절을 읽어본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다. 생명의 언어다. 말씀의 실상이다.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