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다니기(펌)

달빛 속에 성북동 걷기

moonbeam 2015. 8. 27. 07:48

‘성 바깥 북쪽 동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성북동. 조선시대 한양도성 밖에 생겨난 성북동은 산 깊고 물 맑은 마을이었다. 산세가 아름답고 한적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살았다. 만해 한용운, 소설가 염상섭, 간

송 전형필, 서예가 오세창, 시인 조지훈, 운보 김기창이 이곳 성북동에서 시를 쓰고 붓을 들어 창작의 혼을 불살랐다. 서울성곽이 복원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앞두면서 성북동을 재조명하는 발걸음이 늘고 있다. ‘자연주의 살림꾼’이자 한복 디자이너, 보자기 예술가인 이효재씨(57)는 성북동 길상사 앞에 둥지를 튼 지 10년 가까이 된다. 이방인의 여행길이 아닌 주민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북동은 어떤 곳일까. 이효재씨를 따라 성북동을 2시간가량 걸었다.

 

낮과 밤이 다른 성북동“성북동은 밤에 봐야 해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밤에 걸어요.”

이효재씨를 만난 것은 지난 26일 저녁 9시였다. 가로등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깜깜한 밤에 서울성곽길을 걷기로 했다. 그의 집 앞 길상사에서 출발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기리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달빛이 얼굴을 내미는 시간, 길상사는 대낮의 번잡함을 걷어내고 적막을 입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100m쯤 떨어진 ‘북악수퍼’에 들러 발효 음료수를 하나씩 샀다. 북악수퍼는 길상사 부근에 있는 유일한 동네 가게다. 하지만 없는 게 없었다. 수십개국의 대사관이 있고 외국인들이 많이 살기 때문인지 진열대에 수입 제품들이 가득했다. 산책 나온 강아지를 매두는 고리가 인상적이었다. 주변의 집들은 성채를 닮았다. 감히 넘볼 수 없는 담벼락을 따라 쉬엄쉬엄 내려갔다. 빨간 벽돌 담장 아래를 뒤덮은 영춘화가 초록 커튼 같았다. “누가 살길래, 얼마나 지킬 것이 많길래 저렇게 높게 담을 쌓아올린 것일까요.” 그가 묻고 답했다. “미국이나 유럽 주택가처럼 성북동의 담벼락을 모두 허물면 좋겠어요.”

서울 성북동 서울성곽에서 바라본 북정동 밤 풍경. 처마를 맞댄 채 가난한 등불 하나씩 밝힌 집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듯하다. 이준헌 기자

15분 정도 걸었을까. 마을버스가 나타났다. 지난 4월 소리소문 없이 생겨난 2번 마을버스다. 성북동을 찾는 발걸음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해 떨어지면 우리 식구만 타요. 운전을 못하는 제게 자가용 대신 전용버스가 생긴 셈이에요.”

길 왼쪽 성당을 지나 구불구불 내려가니 스티로폼 화단이 이어졌다. 더덕, 국화, 장미 등 온갖 꽃들이 골목을 꽃밭으로 수놓았다.

“여름은 솔직히 매력이 없어요. 파마 머리의 아줌마들처럼 다 똑같잖아요.” 여름 산이 파마 머리 같다는 비유가 그럴듯했다.

 

한밤에 서울성곽 오르기한양도성 걷기는 성곽이 끊긴 곳부터 시작했다. 서울성곽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 1395년(태조 5년) 세우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성곽을 따라 가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600년 성곽에 둘러싸인 소나무들이 달빛을 이고 우뚝하다. 이내 숨이 차올랐다. 그가 “이쯤 와서 쉬었다 가야 한다”며 북악수퍼에서 산 음료를 책받침보다 작은 손가방에서 꺼냈다. 산자락에서 부는 바람의 결이 순하고 시원했다.

이순을 바라본다는 그는 성북동을 거닐며 “고통은 혼자 느끼고, 기쁨은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자신을 온전히 되돌아보는 시간, 걷기는 행복이라고 했다. 또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서울 성곽길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되겠다고 중얼거리는데 오른쪽으로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 성벽에 누(樓) 없이 만들어진 비밀의 문, 한양도성 북서쪽의 암문(暗門)이었다. 유사시 도성의 문이 봉쇄당했을 때,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문. 평소에는 돌로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여는 비상구였다.

문을 나왔다. 이제부터 성 밖이다. 성 안은 종로구, 밖은 성북구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성벽에 뿌리를 내리고 낮게 웅크린 작은 풀들이 예쁘다. 발 아래 텃밭을 이고 있는 지붕들이 정겹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간’ 성북동 비둘기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휘황한 서울 야경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저 풀을 보세요. 저러고도 살아내는데 우리 모두 잘 살아내야 해요.”

 

북정동 골목 걷기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경사를 내려오니 낡은 동네가 보였다. 서울성곽과 마주한 첫 마을 북정동. 일제강점기에 성곽이 무너지면서 왕과의 경계가 사라졌다. 한국전쟁 후에는 피란민들이 몰려와 판잣집을 지었다고 한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었다. 회색 담벼락 골목은 딱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팔을 벌리니 두 손이 벽에 닿았다.

작은 집들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벽을 하얗게 칠한 집도 있고 장독대를 올린 집도 있다. 화분을 내놓은 집도 여럿이다. 러닝셔츠 차림으로 TV를 보는 아저씨, 빛바랜 자개장 아래 누워 잠을 자는 할머니도 보인다. 담이 높으면 이웃을 모르지만 서로가 다 보고 사니 진솔해질 수밖에 없다. 마주치면 시시콜콜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는 골목이 북정동에는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성곽과 북악산에 둘러싸인 성북동은 외진 동네다. 도심 진입도 번거롭고 오르막길로 이어져 불편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지 모른다. 도심에서 떨어져 주변화된 일상이 거기에 있다. 돌담 사이에 꽃이 피고 골목에 작은 화분을 내놓는 마음이 있다. 이 소소하고 작은 풍경이 진짜 아름다움 아닐까.

 

일제강점기 ‘성북동 이웃’ 4인의 흔적을 더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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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성북동에 살았다면 이웃이 누구였을까.

만해 한용운, 시인 조지훈, 간송 전형필, 소설가 이태준….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3번으로 갈아타면 소박하고 정갈한 그들의 삶을 마주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1879~1944)부터 만나보자. 마을버스 종점인 북정노인정에서 내려 좁은 골목으로 조금 내려가니 심우장이 보였다. 심우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시인이었던 만해가 1933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마지막 11년을 살았던 곳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성북동 골짜기에서 셋방살이를 하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 집을 지었다. 잘 알려진 대로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고 싶지 않다며 북향으로 터를 잡은 집이다.

한용운은 시 ‘산거’(1936)에서 “공산의 적막이여/ 어데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라고 했다. 그에게 산거는 성찰이 아니었을까. “조선 전체가 감옥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불을 피운 따뜻한 방에서 잠을 편히 잘 수 있겠느냐”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만해는 실제로 한겨울 냉방에서 지내면서 몸과 마음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어 ‘저울추’라는 별칭을 얻었다.

시인 조지훈(1920~1968)은 아랫동네에 살았다. 조지훈은 1937년 만해를 도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심우장으로 모셔 5일장을 함께 치렀다. 조지훈은 자신의 성북동 집을 ‘방우산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만해의 심우장이 “소를 찾는다”는 의미라면 방우산장은 “소를 모아놓는다”는 뜻이다. 조지훈은 “마음속으로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고 한다. 훗날 조지훈은 ‘신천지’(1954)라는 잡지에서 “한용운 선생의 향기를 나는 일찍이 어려서 들었다”고 적었다.

조지훈은 방우산장에 32년 동안 살며 작품을 썼지만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1998년 집이 헐려버린 탓이다. 골목 귀퉁이 동네쌀집 앞에 집터를 알리는 초라한 비석이 쓸쓸하다. 2번과 3번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 조지훈의 시가 적힌 쉼터가 있다. 조지훈은 소설가 이태준(1904~?)이 편집장을 지내던 잡지 ‘문장’에 시 ‘승무’(1939)를 처음 발표했다.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태준은 1933년 만해의 집 건너편에 터를 잡고 1946년까지 14년 동안 성북동 산기슭에 살았다. 100평이 조금 넘는 규모에 안채, 사랑채, 아담한 꽃밭을 둔 한옥 집에서 <실락원 이야기> 등을 썼고 정지용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문체가 뛰어났던 이태준은 <달밤>이라는 소설에서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이라고 적었다. 수연산방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지금도 스테디셀러인 그의 책 <문장강화>를 펼쳐본다.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아 나라를 지킨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은 이태준과 휘문고 동창이다. 간송은 1933년 성북동 일대에 땅을 사기 시작해, 1934년 북단장이라는 집을 지었고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지었다. 간송은 전 재산을 털어 세계기록문화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풍속도를 포함해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 5000점을 일본으로부터 사들였다.

성북문화원 박수진 향토사연구팀장(35)은 “1933년 한용운과 조지훈, 이태준과 전형필은 한동네에 사는 이웃이었다”며 “일제강점기 4명의 흔적을 더듬어가면 남다른 성북동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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