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씨 딸의 경우다. 승마를 하는 최씨 딸이 체육특기생으로 이화여대에 입학하려고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걸까. 특기자 종목에 승마가 처음으로 포함된다. 모집 요강도 ‘원서 마감일 기준 3년 이내의 수상 내용’을 평가하게 돼 있지만 원서 마감 후 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로 당당히 합격한다.
우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입학 후 수업 불참 등으로 제적 경고를 받았는데 엄마와 함께 학교에 다녀간 뒤 학칙이 개정된다. ‘국제대회·훈련 시 증빙서류를 내면 출석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규정이 소급 적용되면서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제물을) 다시신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친절한 e메일까지 보내주는 교수님도 만난다. “우린 수업 빼먹지 않고 들어갔는데….” “교수님이 ‘얘는 이미 F’라고 했잖아요.” 학생들이 억울해해도 소용없다. 대학 측 설명은 한결같다. “특혜는 없었다.” 하긴 성실함이 ‘운발’을 당할 수 있겠나.
대학생만이 아니다. 국회의원도 세렌디피티를 맛볼 수 있다. 선거법 위반으로 여당 의원 11명이 기소됐다. 야당 의원(22명)의 정확히 2분의 1이다. 자로 잰 듯하다. ‘친박’으로 분류된 의원은 단 한 명. 심지어 “(지역구 변경을) 안 하면 사달 난다니까. 내가 별의별 것 다 가지고 있다니까, 형에 대해서”(윤상현 의원)란 발언도 무혐의 처리된다. 검찰과 법무부는 편파 기소 의혹을 부인한다. “소속 정당과 지위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처리했다.”
이렇게 우연이 겹치면 수사기관으로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검찰도 우연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됐다. 김주현 대검 차장이 10년 전 빌라를 샀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공짜 주식을 준 혐의로 수사를 받은 넥슨 김정주 창업주의 아버지 소유였다. 김 차장은 국정감사에서 ‘우연의 일치’라며 통장과 매매계약서, 송금 영수증을 들어보였다. 민정수석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가 진짜 우연이었는지 조사하던 수사팀은 또 한 번의 기막힌 우연에 얼마나 놀랐을까.
신기한 건 대통령과 가깝거나 잘나가는 분들에게만 우연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꼭 필요할 때 ‘우연’이 끼어든다. 시민들의 팍팍한 삶엔 그 흔한 우연 하나 생기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다팔 강남 부동산도 없고, 주식을 줄 기업인 친구도 없다. 서울경찰청 운전병은 언감생심, 아들 군대 보내면 꼭 전방에 배치된다. 병든 닭처럼 조는 수험생 아들딸을 흔들어 깨우는 게 전부다. “아빠 엄마가 해준 게 뭐냐”고 대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나마 불운이 겹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경기도 안산, 경남 통영, 전남 광양…. 경기 위축과 취업난 속에 동반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쥐새끼 한마리 나타나지 않는다”(이성복 시 ‘아들에게’)는 절망 때문인가. 지난주 경북 포항의 야산에선 대구 건설업체 간부 두 명이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회사 대표가 비리를 저질러놓고 금전적 손해를 보상하라며 자신들을 압박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장화홍련이 따로 없다. 그들 곁엔 검사 친구, 기자 친구 하나 없었던 것일까.
우연이 거듭되면 운명이 된다고 한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대통령 말씀을 믿고 싶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처럼 세렌디피티의 순간이 오지 않는 건 간절함이 없기 때문일까. 운(運)에도 총량이란 게 있어서 누군가 행운을 누리는 만큼 다른 이들은 불운을 나눠 가져야 하는 걸까. 그것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일까. 부디 시민들의 지성을 개돼지쯤으로 여기지 않길 원할 뿐이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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