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의 희망이었다 ---김영하 촛불집회 참가기

moonbeam 2016. 11. 14. 11:52



친구 세 명이 모이기 위해서도 참으로 많은 것이 필요하다. 백만 명이 모이려면 뭐가 필요할까. 분노다. 그것도 거대한 분노.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분노는 무언가를 빼앗겼을 때 일어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면서 시작한다. 불패의 영웅조차 사랑하는 여자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사랑하는 친구를 적에게 잃으면 분노에 사로잡힌다. 애초에 그리스인들이 바다를 건너 트로이로 온 것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아내 헬레네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2016년의 한국인들은 어떤 소중한 것을 빼앗겼길래 백만의 인파가 광화문으로 모여들었을까?

나라다.

거리에서 만난 청소년, 대학생, 자영업자와 직장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이 민주주의와 공화정에 대한 믿음을 빼앗았다고.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나라, 민주공화주의에 입각하여 운영되리라 믿었던 나라는 이미 사라져 있었고, 선출한 적 없는 ‘비밀 정부’가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깨알같이 결정하고 실행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가들을 탄압하고,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고, 담뱃값을 올리고, 철도파업을 탄압하고, 사리사욕을 위한 재단들을 만들고, 정당을 해산했다. 동시에 이 비밀 정부는 참으로 적극적으로 많은 것을 하지 않았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일곱 시간 동안 대통령은 아예 집무실에 나오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이후로도 침몰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규명하려는 노력마저 집요하게 방해하였으며, 경제민주화라는 공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으며,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 제대로 된 보육시설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모들을 방치했으며, 했으며, 했으며, 했으며….

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다. 모두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 통치했으니 참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권력이 이미 찬탈당했고, 주권자는 최순실 일당이라면, 이 나라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나라가 아닌 것이다. 조용하고 은밀한 쿠데타가 4년에 걸쳐 일어나고 있었다. 조용하고 은밀했기에 처음엔 알아차릴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이 정권은 처음부터 국가기관을 이용해 댓글 공작에 나섰고, 이를 수사하려던 검찰총장을 물러나게 하였고, 자신들에 반대하던 공직자들을 하나하나 자기 사람으로 갈아치웠고, 국가의 예산을 빼돌려 사익을 추구하였고, 청와대와 정부 내에 존재하던 감시 기능들을 차례로 무력화시켰다.

2016년 11월12일, 분노한 국민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지 박근혜라는 임금은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 2시, 시청역을 지나는 지하철 2호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2시15분, 목적지인 혜화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가자 벌써 곳곳에서 함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전국에서 집결한 대학생들이 깃발 아래 모여 질서정연하게 구호를 외쳤다. 연단에는 “청년 총궐기 ‘분노의 행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방 이화’ 깃발도 보였다. 따지고 보면 이화여대생들의 본관 점거 투쟁이 도화선이었다. 최순실의 약한 고리는 딸 정유라였다. 땅에 막대를 꽂아 그림자로 지구의 크기를 가늠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처럼, 승마 특기생 한 사람에게 집중된 특혜를 통해 비로소 국민들은 최순실이 찬탈한 권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대생들은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고립돼 있었고 이해받지 못했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와도 싸워야 했다. 이제 그들도 마스크를 벗고 다른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주와 부산,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대학생들도 분노를 말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느냐고 묻자 경남 김해에서 올라왔다는 대학생은 “그럼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사익 추구에 이용당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손수 만들어 온 “헬조선의 반항아들아, 분노를 참지 마라”는 손팻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광화문을 향한 ‘분노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대열 중간중간의 방송차들에선 퀸의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라든가 빅뱅의 ‘뱅뱅뱅’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제목은 ‘분노의 행진’인데 표정들은 밝았다. 청년들이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만 제거하면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희망의 싹이라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행진은 이제 종로5가로 접어들었다. 집회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행진이다. 평소에 자동차만 다니던 대로를 당당하게 걸으며 자신의 주장을 거리의 시민들에게 알린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있다. 같은 구호를 외치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생긴다.

오래 고립되었던 이들이 여기 또 있다. 세월호에서 가족을 잃고도 온갖 조직적 음해에 시달려왔던 이들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노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행진한다. 세월호에서 죽거나 실종된 이들의 사진도 지나간다. “사라진 7시간은 304명의 목숨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명령한다. 박근혜 구속, 새누리 해체”. 플래카드를 들고 가는 한 유족은 운동화 끈까지 노란색이다. 아침마다 운동화 끈을 묶으며 자신의 품 안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떠올릴 것이다. 시간은 고통을 희석시킨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고통이 희석될 것을 더 두려워하며 그 고통 안에 머물고자 한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행렬은 종로3가 탑골공원 앞을 지난다. 천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청소년 시국대회’를 열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온 고등학생이 연단에 올라 헌법 제1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해맑은 얼굴의 중고생들이 신나게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올린다. 교복을 입은 이 남학생은 말한다.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인들이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그랬겠지요. 그렇지만 그 부역도 철저하게 처벌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오늘의 집회에서 들은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어른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드는 ‘먹고사니즘’은 청소년들에겐 변명이 되지 않았다.

행렬은 종로1가에서 멈춘다. 방송이 나온다. 5대 종단, 즉 불교, 천주교, 기독교, 천도교, 원불교 종교인들은 시청 앞 광장으로 진입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집회를 계속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이틀 전 ‘박근혜 퇴진 5대 종단 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성명도 발표했다. 같은 신을 다른 방식으로 믿거나 아예 다른 신을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어 종로1가에 모여 있었다.

시청 앞은 원래부터 민중총궐기를 준비해왔던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 회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다. 사실 이들이 이날 집회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근혜 퇴진이라는 이슈가 겹치면서 집회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 정도 규모의 집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이다. 그들이 월급에서 떼어 꼬박꼬박 납부한 노동조합비가 없었다면 양초를 구입하고, 음향 시설과 대형 방송차를 대여해 곳곳에 적절히 배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쩐지 조금 주눅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집회를 기획하고 주최했음에도 언론에 의해 ‘순수한’ 시위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비치고 있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옥중 메시지를 낭독했다. 그는 지난해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죄로 무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박근혜나 최순실, 차은택 등은 몇년을 선고받게 될까? 끝내 유죄가 되기는 할까? 우리 사회에 끼친 해악과 형량은 왜 비례하지 않는 것인가. 집회장에 모인 노동단체 회원들은 당연하게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가톨릭농민회 회원인 고 백남기씨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이 정권 종말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던 쌀값이 속절없이 폭락한 것에 항의하던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에 이르게 된 것도 이 정권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후의 대응도 세월호와 판박이였다. 이 정권은 애도를 금지했다. 세월호의 유족들에게 가장 충분한 애도는 사태의 완전한 진상 규명과 선체의 온전한 인양, 안전한 사회 시스템의 정착이었다. 그 어떤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집회장으로 출발하기 전 페이스북에 “무엇이 여러분을 이토록 화나게 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을 때, 한 독자는 이 정권은 ‘사이코패스 같다’며 “세월호를 비롯해 국가에 생기는 모든 문제들을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태도를 비판했다.

이번 민중총궐기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외친 것은 ‘성과연봉제’의 철폐였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의 성과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집회장의 한 연사가 물었다. ‘서울역에서 표를 파는 역무원과 용산역에서 표를 파는 역무원의 임금이 성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들의 성과는 누가 어떻게 측정하나요?’ 결국 쉬운 해고를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대통령이 만드는 재단에는 천억이 넘는 돈을 쾌척하면서 인건비는 최대한 줄이겠다는 재벌 기업들, 그들의 기부는 아마 꽤 쏠쏠한 투자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시청 앞을 떠나 무교동을 지나 광화문으로 걸어갔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모들이 아이를 중심에 두고 셀카를 찍고 있었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중년 여성도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셀카를 찍었다. 연인들도, 직장 동료들도, 청소년들도 밝은 얼굴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2016년 11월12일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계석에 앉아 행진에 지친 다리를 쉬는 이들은 하나같이 포털 사이트에서 집회 관련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29년 전의 시민들은 다소 어리둥절해하며 시내를 행진했다. 그날의 전체적인 시위 양상은 이튿날 조간신문이 발행되어야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2016년은 광장과 휴대폰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넓은 광장에 나갔지만 휴대폰의 5인치 화면을 통해 그 광장에 모인 군중의 규모와 열기를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현장에 나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친구와 친지들에게 전송하는 것이다. 광장이 휴대폰으로 들어오고 휴대폰을 통해 광장이 확산된다.

오후 6시, 시청역 출구로 아직도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광화문광장 연단의 사회자가 “지금 현재 백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고 합니다”라고 밝히자 함성이 터져나왔다. 백만의 시민이 질서있게 집회를 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11월12일의 시민들은 그것을 해냈다. 지하철역이나 번화가에서 마주치던, 남을 배려하지 않고 무례하게 어깨를 치고 지나가던 그 익명의 타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라도 부딪치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으며, 약자를 배려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도 큰 어려움 없이 군중들 사이를 행진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고 어린아이와 유모차도 안전하게 집회장을 활보했다. 그것은 희망의 힘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희망이 있을 때 가장 너그러워진다. 성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희망의 작용으로 설명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예수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어떻게 수천의 군중을 먹일 수 있었을까? 군중들이 예수에게서 세상을 바꿀 희망을 보았기에 숨겨 두었던 자기의 떡과 물고기를 모두에게 내놓았다는 해석이다. 11월12일의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본 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이었다. 오후 7시, 광장에 어둠이 내린다. 광장에서는 모두가 불빛이 된다. 하나의 불빛이 발광하며 다른 불빛에게 희망을 암시한다. 내가 타인에게서 희망을 볼 때, 타인도 내게서 희망을 본다.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되며 거대한 불빛이 된다. 분노가 희망이 되는 마법이 거기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희망은 어떤 결과로 돌아올까. 우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김영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