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그리고 멋(펌)

거지갑 박주민의원

moonbeam 2016. 12. 26. 10:51







박주민은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큼지막한 백팩에 치약·칫솔, 물티슈, 휴지 따위를 챙겨 다닌다. 언제 어디서 ‘노숙’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6월에는 세월호 유족들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사흘, 지난 9월에는 백남기 농민이 누워 있던 서울대병원에서 이틀을 지샜다. 잠이 모자라면 아스팔트, 병원 탁자, 본회의장 가리지 않고 곯아떨어진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국회 표결을 앞두고 국회 로비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이불 펴고 철야하는 사진이 돌자 ‘민주당이 박주민 때문에 거지당이 돼 간다’는 글이 달렸다.


부스스한 머리, 넓은 이마에 선명한 주름살, 약간 졸린 듯한 눈매는 온라인 ‘드립’의 딱 좋은 소재다. ‘노숙자처럼 초췌한 모습, 피로의 제왕, 상시 시위 대기 중’ ‘저 거지는 뭐야. 국회의원입니다’ 등. 하지만 이미지는 보조축일 뿐 시민들이 정작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성실성이다. 등원 반 년 만에 그가 대표발의한 법안은 35건으로 20대 국회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본회의, 상임위 출석률은 100%다. 원내활동뿐 아니라 거리의 정치현장에도 빠지지 않는다.


박주민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의 바쁜 일정과 별도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학 시국강연, ‘대통령의 7시간’ 추적 토크쇼, 국회의원 소환제 도입에 대한 페이스북 라이브 토론, 광화문 촛불집회, 박근혜 퇴진 서명운동 등. 그의 일정을 따르다 만난 대학생은 “우리 중의 한 명 같은 느낌”이라고 박주민을 평했다.


지난 2일과 탄핵안이 가결된 뒤인 11일 두 차례 박주민을 만났다.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544호 명패에는 노란색의 큼지막한 세월호 추모 리본이 붙어 있다. 박 의원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을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할 때 생각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허겁지겁 걷고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정치인으로서의 ‘큰 그림’은 나중 얘기고 “우선 세월호 해결과 민주주의의 실질화를 위한 제도 개선을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 잠은 모자라고 책 욕심은 많고


- 많이들 궁금해하는데 백팩에 뭐가 들었나.

“작업용 노트북, 치약·칫솔과 물티슈, 책 두 권과 법안자료 같은 읽을 서류다. 치약·칫솔, 물티슈는 10년간 변호사 하면서 습관이 됐다. 당일치기로 제주 강정마을에 내려갔다가 바로 못 올라오는 경우가 많은 거다. 세월호 유족과 경찰이 맞붙을 때도 바로 안 끝날 때가 많아 잘 준비를 하고 다녔다.”


- 쪽잠을 잘 자는가.

“집에 밤 12시쯤 들어가도 낮에 못 본 자료들을 한두 시간 본다. 국회에 아침 5시50분에서 6시에 도착하니 잠이 모자라 차 안이나 소파에서 잠깐씩 잔다. 원래 강골인데 탄핵안 의결이 끝난 9일에는 혓바늘이 돋고 편도선이 부었다. 다음날 집회에 일요일 일정을 소화하니 못 견딜 정도여서 짝꿍(부인) 보러 전교조 사무실로 갔다가 거기 숙직실에서 한참을 잤더니 좀 개운해졌다.”

박주민보다 네 살 아래인 부인 강영구 변호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상근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남편 못지않게 바쁘지만 박주민이 로펌을 그만두거나 정치를 결심할 때 결정적인 ‘조언’을 해왔다.


- 학교 때 사진과 외관이 달라진 느낌이 든다.

“사실 가발을 쓰고 있다. 선거운동 첫날 명함을 돌렸는데 분장이 잘된 탓인지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 명함을 버리느니 가발 쓰기로 했다. 결혼할 때 짝꿍에게 ‘바람 안 피우고 가발 안 쓰겠다’고 했지만, 부득이 양해를 구했다.”


- 변호사 시절에도 매일 두 시간씩 책을 읽었다던데,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책을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최근에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생>을 읽었는데 내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존 로크의 <통치론>도 다시 읽고 있다. 많은 분들이 박근혜 이후 사회는 어떤 것인지, 시위가 꼭 평화적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좀 더 철학적으로 이야기해주기 위해 보게 됐다.”


- 정치를 결심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뭐였나.

“변호사로 현장 다닐 때마다 법이 제대로였으면 사람들이 고통을 안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정치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지난해 12월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200석, 야당 괴멸’이란 예상이 돌면서 ‘도와달라’는 제안이 왔다. ‘내가 만난 사람들과, 앞으로 하려는 일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개헌보다 선거법 개정이 먼저”


박주민이 국회의원이 된 건 ‘기적’이었다. 4·13 총선을 앞두고 문재인 전 대표가 영입했지만 방치됐다가 연고도 없는 서울 은평갑에 뒤늦게 공천됐다. 야당 후보 단일화도 막판에 가까스로 이뤄졌다. 고 김관홍 잠수사와 세월호 유족들이 표 깎일까봐 ‘도라에몽’ 탈을 쓰고 선거운동을 하며 기적을 만들었다.


- 이달 초 정치후원금 모금에서 4일 만에 목표액을 채웠다던데.

“선거 때 후원금이 바닥났는데 탄핵국면에서 얘기를 꺼내기 뭐해 자비로 버티려 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어렵다더라’는 이야기가 돌더니 하루에 4000만원씩 들어오더라. 2400여명이 10만원 이하의 소액 후원자다. 후원자들이 ‘고맙다’고도 하고, 건강을 챙기라고 격려해주시기도 했다.”


- 박 대통령 탄핵이 가결된 데는 시민들의 힘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태블릿PC 보도 이후 많은 이들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망가졌구나’ 하며 분노했고 대통령이 변명과 거짓말을 일삼으며 기름을 부었다. 막판에 ‘세월호 7시간’으로 불이 옮아 붙으면서 ‘타도의 대상’이 돼버린 것 같다. 누구나 가슴속에 세월호 아이들에 미안함과 7시간에 대한 의아함을 가졌을 것인데 거기 불이 붙은 것이다.”


- ‘박근혜의 7시간’으로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7시간만이 아니라 국가정보원 개입설, 침몰 원인, 구조 실패, 사건 은폐 의혹, 언론 장악 시도 등에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새로운 특별조사위원회 구성 준비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직무정지는 됐지만 시중은행들이 성과연봉제 도입을 전격 발표한 것을 보면 (무력화된 건지) 알 수 없다. 국정교과서나 사드 배치 등은 밀어붙일 것으로 본다. 결국 법으로 행정부를 견제해야 하는데, 새누리당이 어떻게 분화되느냐가 관건이다.”


- 탄핵이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어르신들조차 박 대통령이 아버지를 욕보였고, 상처 줬다는 평가가 많지만 그분들의 박정희 평가가 달라졌느냐 하면 잘 모르겠다. 다만 40대까지의 젊은층은 ‘친일’에서부터 뿌리를 찾더라. ‘그때부터 이어져 온 부패세력이 한번도 제대로 청산되지 않아 이 꼴이 났다’는 거다. 인적청산을 이야기하는 이재명 성남시장 같은 분들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다.”


- 선거법 개정 등 민주주의의 실질화가 필요할 것 같다. 어떤 프로세스가 필요한가. 개헌은 필요한가.

“지금의 국회 의석비율로는 국민의 의식지형을 반영한 헌법을 못 만든다. 먼저 법률 제·개정으로 민주주의 실질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독일식 정당비례대표제 중심으로 선거법을 바꿔 2020년 총선에서 의회 구성을 국민의 의식지형과 맞춰야 한다. 그런 뒤 개헌안을 만들어야 한다.”


- 박근혜 사태의 본질은 뭐라생각하나.

“민주화 이후에도 국민이 쉽게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비판할 수단이 없다. 국민들이 일상생활 하다가도 ‘야 뭐하냐’ 하면 ‘우리 이거해요’, ‘야 너 똑바로 안 해’ 하면 ‘아 예.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한다. 근데 지금은 백만명이 시위에 나서도 ‘나 몰라’로 끝이다. ‘권력간격지수’라는 개념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매우 높다. 실제로 국내에서 일어났던 비행기 사고인데 기장이 비행기를 잘못 몰고 있는데도 부기장이 제지를 못했다. 내부 고발이 안되고 아랫사람이 충언을 못한다.”



■ “뻘쭘·어색하지만 열심히는 하겠다”


박주민은 대원외고와 서울대 사법학과를 거쳐 2003년 변호사가 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에서 시국사건을 많이 맡았다. 그 기간 중 남들은 평생 1개도 어렵다는 위헌판결을 4건이나 받아냈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여전히 맞지 않는 기성복을 입은 느낌이다. 4월16일 세월호 2주년 집회 당선인사에서 이런 심정이 엿보인다. “어리바리, 우물쭈물, 뻘쭘, 어색. 그러나 여러분 힘으로 당선됐습니다.”


- 원래 어색·뻘쭘 스타일인가.

“원래 ‘저 이렇게 훌륭하고 잘났어요’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선거 때 명함에 ‘대원외고’가 들어가 있길래 참모들에게 빼자고 하니 ‘스펙 빼면 뭘로 승부할 거냐’고 하더라. 결국 타협했지만 저항감이 컸다. 그래서 엉거주춤, 우물쭈물한 모습으로 비쳐진 거다.”


- 동료 의원들과 자주 어울리는가.

“처음엔 외톨이였고, 어색했다. 그나마 아는 이들도 시민단체 시절 ‘야당 똑바로 하라’며 공격했던 대상들이다. 지금은 서로가 조금씩 곁을 두는 느낌이다.”


- 밥도 먹고 하면서 친해지나.

“그냥 농성장 같은 데서 자연스레 마주치면서 친해지는 것 같다. 친한 그룹을 만들어 일을 저지르면서 사람 만나고, 좀 더 큰 그룹에서 또 일을 만들며 친해진다. 일로 친해지는 식.”


- 대표발의 법안이 35개나 되는데 상임위(법사위) 스펙트럼을 넘어 다양하다. 변호사 때 문제의식이 반영된 건가.

“맞다. 공공관리갈등조정법안은 제주 해군기지나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검사장 직선제 법안은 (알다시피)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을 느껴 발의했다.”


- 정치가로서 최소 목표와 최대 목표가 있는가.

“민주주의 실질화를 위한 제도 개선 말고는 아직 다른 생각이 없다. 이러면 욕먹겠지만 ‘재선도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시민들이 평가하는 내 정치의 장점은 시민사회와의 연계, 현장을 지키려는 자세일 텐데 재선한다고 더 나아질까.” 이 대목은 그의 설명을 약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박주민이 ‘거리의 국회의원’이 된 것은 세월호 참사나 백남기 농민 사건이 변호사 때부터 관계해온 익숙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해결되지 않고 있어 답답한데 새로운 일을 제대로 해낼지 의문이라는 것이다(설명이 다소 ‘셀프 디스’적인 느낌은 있다).

박주민은 표창원, 조응천, 이재정 의원과 더불어 요즘 ‘핫한’ 초선의원 4인방이다. 집회장에 가면 사진 찍자는 이들이 몰려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다.


- 왜 주목을 받는다고 생각하나.

“정치인이 일도 안 하면서 돈과 특권만 챙긴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데 내 모습을 보고 좀 성실하다는 느낌을 받은 거 같다. 청년들 보기에 굉장히 좋은 스펙인데도 돈 잘 버는 길로 안 간 것도 신기하고 재밌어 하는 거 같다. SNS에서 ‘거지갑’이라길래 ‘은평갑인데요’라고 반응하니 ‘어 재밌네?’ 이렇게들 느끼시는 것 같다.”


-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저는 갈 방향을 명확히 알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 정치인은 아니다. 그냥 정치 시작 때 생각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허겁지겁 걷고 있는 상황이다. 나중에 어떤 모습이 돼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약속은 드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