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공공성 없으면 교회 아니다 --- 김근주 교수 "구약 없이 신약 이해 못 해"

moonbeam 2017. 1. 17. 09:12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를 만나 그동안 우리가 구약을 얼마나 오해했는지, 앞으로 구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들었다. 김 교수는 구약에 복음의 내용이 담겼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신구약이 일관되게 보여 주는 하나의 원리다.

교회가 구약과 신약이 대립하는 것처럼 가르치다 보니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나라의 은총을 모르는 교인이 많다. 김근주 교수는 구약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 상당수가 신학적 맥락 없이 교훈적인 메시지로 흐른다고 했다. 구약을 하나님의 구원과 무관하게 생각하거나 부차적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인터뷰 3부에서는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구약을 통해 복음을 어떻게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 듣는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11월 말, 한 카페에서 김근주 교수와 만났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구약을 통한 신약 이해

바울서신 등 신약 문서들이 구약과 동등하게 권위 있는 글로 인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가 주후 2세기다. 그때까지 성경은 구약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인, 그 한 줌도 안 되는 무리가 로마의 끔찍한 박해를 견디면서 지켜 낸 영광스러운 초대교회는 오직 구약만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바울도 그랬다. 그러니 구약 없이 신약을 이해할 수 없다. 구약을 통해서 신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구약을 경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신약에 있지만 구약에는 없는 개념들 때문이다. 가령 구약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국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구약 사람들이 내세를 몰랐던 것이지, 구약에는 없던 천국이 신약에 와서 새롭게 생겨난 게 아니다. 구약 사람들이 내세를 몰랐다고 구원도 못 받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세의 존재를 아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 아니다.

내세를 믿을 때 핵심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구약식으로 말하면 "지금은 바벨론이 이렇게 강하지만 우리가 이스라엘로 돌아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고백이다. 지금의 삶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바벨론의 국력은 끝이 없어 보여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이라 계속해서 예언했다. 그럴 때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눈앞에 보이는 것 하나 없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실 것이라 믿었다. 내세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만약 내세를 알았더라면, 펄펄 끓는 풀무불 앞에서 "지금 죽어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겠지만 그들은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다. 부활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분명 부활 신앙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내세 신앙이 생겨난 시기는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나온 이후부터 마태복음이 나오기까지의 중간기다. 주전 2세기 중반,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박해를 받는다. 기록에 의하면 3일간 무려 8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박해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고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는데 눈앞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 겪는 고난이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지만 집단적 학살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극심한 순교의 현장에서 꽃피운 것이 내세 신앙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었기에 고통 가득한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주전 2세기경 생겨난 내세 신앙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류 신앙이 되었다. 바리새파는 전부 내세 신앙을 가졌고 예수님도 물론 그러셨다. 룻기에 나오는 형사취수제에 대하여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사두개파는 여전히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두개파는 구약에 더 충실했던 것일까? 아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정의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사두개파는 현실 권력과 타협했다. 구약 율법의 근본 원리라 할 수 있는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구약 전체로 보면 부활 자체는 낯선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근본 원리로 부활 신앙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구약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당신이 오신 이유가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 구원자로서의 대속 사역은 희년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대속적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희년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대속적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내용은 바로 희년 법에 그려진 하나님나라다. 희년은 죄를 회개하는 속죄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든 잃어버렸던 토지가 돌아오고 종살이했던 몸도 자유가 되어 주체적인 존재로 다시 부름받는다.

죄에서 용서받은 자유인이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노동력으로 경작하며,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살아가는 것이 구약이 꿈꾸는 세상이다.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가게 될 내세의 본질도 구약이 그리는 희년의 실현이라고 봐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주어진 구원이 그러하듯, 희년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인간이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구약과 신약은 연결되어 있다.

삼위일체 개념도 구약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구약에서 그리는 성령은 능력, 재능의 개념으로 주로 나타나는 반면 신약의 성령은 탄식하시고 근심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에도 근심하신다는 표현이 1번 나오지만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분명 신약이 구약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고 구약에 없던 것이 신약에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드셨다고 하신다. 그뿐 아니라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하실 때 하나님은 의논하신다.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관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고 신약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같다. 하나님은 관계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묵상할 때도 추상적인 교리를 되새길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처럼 관계 안에 존재한다. 그만큼 이웃과의 '관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존재의 본질이다. 비록 삼위일체 개념은 신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구약을 통해 그 의미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김근주 교수는 구약을 통해 신약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사영리 다시 읽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소위 '사영리'의 틀로 복음을 이해해 왔다. 사영리에 복음의 엑기스가 담겨 있다고 가르쳤다. 사실 그 틀 자체는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알려진 것보다 더 풍성한 내용을 담아야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영리의 틀을 유지하면서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사영리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원리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뜻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듯 우리도 관계 안에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노동하시는 창조주를 따라 우리도 노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창세기가 보여 주듯 인간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은 노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의 내용이다. 하나님과 함께 노동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노동자로 영광스럽게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두 번째 원리는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고 그분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죄를 이야기할 때 선악과에 나타난 죄의 근본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갈망(desire)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욕망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타 종교에서 말하는 무욕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갈망 혹은 욕망을 긍정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욕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것이라고 금지한 게 있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아무리 커도 창조주 하나님이 악하다고 규정한 것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원적 관계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인간이 사사로이 선과 악을 선택할 때,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할 때 그 사회는 '만인의 만인을 향한 전투' 상태가 돼 버리고 만다. 공통으로 인정되는 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를 자연법이나 양심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믿는 자만 이롭게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악인과 선인에게 고르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은 온 인류를 이롭게 한다. 그 법을 깨고 내가 스스로 옳고 그름을 결정할 때, 나에게는 유익이 되고 타자에게는 불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이 보여 주는 죄의 근본이다.

이사야 2장에는 하나님 앞에 재판을 받으려고 열방이 모여드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라고 예언자는 선포한다.

개인이나 개별 국가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법이 판단 기준이 되자 더 이상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법은 그만큼 공정하고 공평하다. 어떤 민족도,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도 하나님의 법 앞에 서면 공정한 심판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공정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게 죄의 본질이다.

우리가 보통 원죄라고 표현하는 것의 실질적인 내용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법보다 자기 자신을 더 우선시하는 자기애다. 구약을 읽어 보면 '자기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우선 십계명에서 우상의 목적이 '자기를 위하여'라고 명시되어 있다. 실제 여로보암 시대의 우상도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우상의 본질이 바로 공공선을 해치는 과도한 자기애에 있다.

구약의 대표적인 우상숭배 장면을 뽑자면 시내산 앞에서 히브리 백성의 요구를 받아 아론이 금송아지 만든 금송아지를 섬기는 장면과 여로보암이 우상들을 만드는 장면일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만들고 나서도 여전히 야훼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이름을 찾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실질적인 삶의 내용이 중요하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공공성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 혹은 개교회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인도 교회도 아니다. 사영리 두 번째 원리에서 이러한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

사영리의 세 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이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언제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도저히 스스로는 바뀔 것 같지 않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이 부탁하셨던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 내는 것이 사영리 세 번째 원리다.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회개를 반복한다. 우리는 반복적인 회개로 용서받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용서를 받았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지 않은 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면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죄책이 없는데 왜 죄책감으로 고민해야 할까? 그저 영광의 십자가를 굳게 붙잡고 영광의 삶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사영리 네 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내용이다. 사영리의 가장 빈약한 부분이 바로 영접의 내용이다.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는 간단한 기도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8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목적이 나와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믿는 삶의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일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낮선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말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교회 회복은
공공성 회복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가장 회복해야 할 것은 단연 공공성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메시지의 핵심은 '관계'다.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의 빛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필연적으로 공공선을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미가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재판이 보여 주듯 교회는 온 열방에 공의를 세우는 공적 존재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는 공공선에 대한 묵상이 담겨 있다. 시내산 율법을 포함해 모세오경에 담긴 율법 대부분은 두 명 이상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향한 선포다. 심지어 레위기 19장 2절에 나오는 "거룩하라"라는 명령마저도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지금 한국교회가 말하는 거룩함은 완전히 개인화 되고 파편화되어 있다. 기독교인의 거룩은 개인적인 기도 생활이나 혼자 누리는 깊은 교제로는 불충분하다. 거룩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것이 아니다.

농부가 밭모퉁이에 난 과실을 수확하지 않고 그 땅의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남겨 두는 것이 곧 거룩이다. 성경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방에게 유익이 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오늘날 교회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는 공공성을 지향해야 한다.

교회가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려 했다. 솔로몬을 비롯해 많은 왕은 제사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제사를 거두고 삶을 드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정의로운 삶이다.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선교도 공공성의 지평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사야서 전반부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책망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에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비전을 선포한다. 이새의 줄기, 곧 예수님이 오셔서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이 되면 온 열방이 이 깃발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사야서 61장에서 희년이 선포되고 가난한 자, 우는 자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이 될 것이라 선포한다. 마지막 장인 66장에 가면 이방인들을 불러서 그들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겠다는 말씀으로 마친다.

희년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이 되고 나아가 이방인들도 제사장으로 세워진다. 이 이사야서 관점을 바울은 만인 제사장으로 표현한다. 신약이 특별하게 강조하는 선교의 지평이 이미 이사야서에 담겨 있다. 구약의 희년과 신약의 선교는 연결되어 있다.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 다윗,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바울이 인용한 두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정의와 공의를 위해 부름받았고(창 18:19), 다윗은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평가받았다(삼하 8:15).

그렇게 구약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고 살아가게 하신 그 영광의 삶과 다가올 영광의 약속들이 신약에서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 현실로 나타났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을 알아야 한다. 복음의 내용이 구약에 있다는 것이 그런 의미다. 복음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가 더 깊어지길 바란다.

김 교수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무엇보다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약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새롭게 된다. 구약은 참 경이로운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쓰인 문건인데, 지금도 소화하기 어려운 급진적인 생각이 들어 있다. 복음에 윤리적 지평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도 사실 구약과 신약을 분리해 이해했기에 생긴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복음의 내용이 구약에 담겨 있다는 김근주 교수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교회, 본질에 가까운 교회를 꿈꾸게 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