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그리고 멋(펌)

지적장애아 엄마가 사는 법 --- 장애아 엄마 류승연

moonbeam 2017. 3. 8. 09:01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류승연 씨는 쌍둥이 남매 김수인·김동환의 엄마다. 지난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올해로 9년 차 엄마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 승연 씨 일과는 아침에 아이들을 깨우면서 시작한다.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등교시키고 나면, 전쟁 같은 일상에 잠깐의 정적이 찾아온다.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면, 아들 동환이에게 중증 지적장애가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 승연 씨는 잘나갔다. 주요 일간지 정치부에 몸담았던 그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독종' 기자로 알려졌다. 새벽에 아직 자고 있는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멘트를 받아 내고, 식사 자리에서 의원들과 말싸움에 지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고 기가 셌다. 주요 정당 의원과 당직자가 사석에서 하는 가벼운 대화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여의도에 촘촘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열려 있었다. 승연 씨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다시 신문사에 복직할 계획이었다. 집도 래미안·자이 같이 유명 브랜드 아파트로 옮기고, 차도 독일·일본에서 만든 외제차를 사리라고, 그래서 남들에게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환이가 장애를 안고 태어나면서 승연 씨 꿈은 그대로 무너졌다.

승연 씨는 복직을 포기했다. 중증 장애인은 평생 혼자 생활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사소해 보이는 행동 하나에도 도움이 필요하다. 요즘에는 활동 보조 서비스가 있긴 하지만, 1차적으로 부양의 몫은 가족에게 주어진다.

장애인 가족의 일상을 자세히 듣고 싶어 승연 씨를 찾았다. 동환이를 키우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정치부 기자로 잘나갔던 류승연 씨(왼쪽에서 두 번째). 아들이 장애를 갖고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 계획은 180도 뒤집혔다. 사진 제공 류승연

"매일 울면서 지냈어요
신이 내게 '엿'을 먹였다
생각했어요"

첫돌이 지났는데도 수인이와 달리 동환이는 목도 가누지 못하고 뒤집기도 못했다. 승연 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인이와 동환이는 28주 만에 태어난 조숙아였다. 처음에는 또래보다 느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승연 씨는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는 재활과 작업치료를 권했다. 하지만 동환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동환이가 4세 때, 의사는 아들에게 지적장애가 있다고 판정했다.

"매일 울면서 지냈어요. 설거지를 하거나 기저귀를 갈 때, 갑자기 가슴속 깊이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면 펑펑 눈물이 났어요. 하루에 수십 번씩요. 장애 판정받기 전후로 3년은 그렇게 지낸 거 같아요. 확정받기 전부터 동환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 들었거든요.

모든 게 막막했죠. 이 아이 인생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장애아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건지, 또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지, 평생 아이에게 저당 잡혀 살아야 하는 건지, 온갖 생각이 들더군요.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싶었어요. 여기 이사 왔을 때는 신문사에 복직하고 돈을 모아 좋은 집으로 이사 갈 계획이 있었는데,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죠."

도움이 필요했다. 승연 씨는 장애아를 자녀로 둔 대학 선배 언니를 떠올렸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위로의 말이 몇 마디 오간 뒤, 선배는 현실적인 조언을 주기 시작했다. 지역 복지관과 장애 센터에 찾아가 치료를 신청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복지 혜택을 알아보라고 했다.

승연 씨는 선배의 충고를 따라 동환이를 센터로 데려갔다. 일주일에 2~3차례 언어 치료, 놀이 치료를 받게 했다. 센터에서 만난 어머니에게 육아에 필요한 정보도 얻었다. 본격적으로 장애인 엄마 역할을 배우기 시작했다.

중증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난 동환이(사진 왼쪽). 승연 씨 가족에게는 복덩이다. 사진 제공 류승연

승연 씨는 자녀들이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연은 이랬다. 어느 날, 승연 씨는 TV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영면식을 봤다. 승연 씨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추기경님, 천국에 가면 하나님에게 제 부탁 좀 전해 주세요. 우리 부부에게 자녀를 허락해 달라고요." 얼마 후, 남편이 꿈을 꿨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입고 있는 옷을 자기에게 입혀 주었다고 했다. 승현 씨는 태몽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진짜로 임신했다.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 승연 씨. 아이들 이름을 김수환 추기경 이름을 따서 김'수'인, 김동'환'이라고 지었다.

"처음에는 신을 향한 증오가 너무 컸어요.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중 하나가 장애아라니. 하나님이 제게 '엿'을 먹였다고 생각했어요.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의 책을 탐독해 신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겠다, 신을 부정하고 욕되게 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알게 된 한 장애아 어머니는 신을 증오하는 승연 씨에게 자신도 그럴 때가 있었다며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그 역시 한때는 신을 원망했다. 왜 자기 아이에게 장애를 주었는지 신에게 원망의 기도를 하던 중 그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너를 축복하기 위해서'라고. 승연 씨는 그 어머니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환이 '때문에'에서
동환이 '덕분에'로

우울증과 분노가 심해지자 승연 씨는 심층 심리 상담을 받았다. 상담은 승연 씨가 동환이를 보는 시각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오랜 시간 상담 받으면서 동환이를 향한 제 시각이 달라졌어요. 예전에 저는 콧대 높고 오만하고 도도하고 스펙만을 추구했어요. 아들 '때문에' 제 인생이 저당 잡히고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어요. 아들을 탓하기만 했죠.

그런데 만약 동환이에게 장애가 없었으면 나는 어땠을까. 복직해서 옛날과 똑같이 스펙만을 좇으며 살았겠죠. 가족은 뒤로하고 제 자신만 봤겠죠. 동환이 '덕분에' 스펙·물질을 좇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였어요. 그리고 행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승연 씨는 오랜 상담 이후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상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소소한 행복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난의 상징이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지금 사는 빌라도 이제는 다르게 느낀다. 저녁 때 창문을 열면 퇴근하고 귀가하는 남편을 볼 수 있다. 딸은 골목길에서 걸어오는 아빠를 향해 어서 와서 저녁 먹으라고 소리 지른다. 승연 씨는 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빌라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별거 아닌 소소한 풍경이 따뜻하고 행복하게 다가왔다.

동환이는 아직도 집 안에 아무렇게나 볼일을 본다. 어디서 냄새가 나서 가 보면 변만 있고 동환이는 딴 데로 도망가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잔소리가 아니라 웃음부터 나와요. 모르는 척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웃기거든요. 온 가족이 동환이 덕분에 웃고 즐거워해요."

승연 씨 가족은 동네에서 제법 유명하다. 동환이에게 지적장애가 있어서가 아니다. 주말이나 평일 저녁이 되면 네 식구가 항상 산책을 하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답답해하는 동환이를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동네 주민들은 요새 보기 힘든 가족이라며 승연 씨 가족을 알아본다.

"결혼 10년 차 부부들을 보면 말수가 줄고 서로 무미건조해지고는 해요. 그런데 저희는 항상 같이 다니면서 대화도 많이 하니, 같이 있는 시간을 즐거워해요. 동환이 덕분에 우리 부부가 묶일 수 있었던 거죠. 어느 날, 동환이가 엉뚱한 짓을 해 온 가족이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딸이 그러더라고요. '엄마, 동환이가 역시 (신의) 축복을 받은 게 맞아. 이렇게 귀여운 걸 보니'."

승연 씨 가족은 동네에서 잘 알려져 있다. 집에 있으면 답답해하는 동환이를 위해 매일 같이 산책하러 나온다. 사진 제공 류승연

부모가 없는 동환이
상상할 수 없었다

"엄마·아빠가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 동환이가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몇 년 동안 승연 씨는 이 문제를 놓고 남편과 진지하게 고민했다. 부모가 없는 동환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 누리는 행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결국 자신이나 남편 중 누구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은 사람이 동환이를 데리고 함께 생을 정리하자고 결심했다.

최근 승연 씨 생각에 변화가 일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다. 지난해 수인이와 동환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승연 씨는 동환이를 특수학교가 아닌 특수반이 있는 일반 학교에 보냈다. 두 곳에는 장단점이 있다. 특수학교는 장애 특성에 잘 맞춰 가르치고 다양한 치료 수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일반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사회 규율과 규칙은 배울 수 없었다.

"중증 장애인에게는 초등학교가 평생 마지막으로 비장애인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곳이에요. 남들과 어울리는 데 필요한 규칙·규율을 유일하게 배울 수 있는 곳이죠. 처음에 동환이는 5분도 앉아 있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40분도 끄떡없이 앉아 수업을 들어요. 학습이 된 거죠."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아이가 돌발 행동을 하면 엄마 마음은 다시 무너진다. 지난해 동환이는 반 아이들의 팔·얼굴을 손톱으로 수차례 할퀴었다. 학교가 낯설어서 나오는 '부적응 행동'이다. 승연 씨는 같은 반 학부모를 만나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인사보다 사과가 먼저 튀어나왔다. 아이가 정말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을지 회의감도 들었다.

지난해 승연 씨는 활동 보조 서비스 강의를 들으면서 동환이가 자립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게 탐탁지 않았다. 강연을 듣는 내내 생각이 달라졌다. 이미 여러 장애인이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으며 직업을 갖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행복하면
자녀도 행복하다

승연 씨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한 인터넷 매체에 동환이와 지내는 일상을 기고하고 있다. 동환이가 학교와 센터에 가 있는 낮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기 시작하면, 글 쓰는 시간을 더 늘릴 계획이다.

"코너명은 '동네 바보 형'이에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해 쓰기 시작했어요. 전 대학생이 돼서 처음 장애인을 봤거든요. 그만큼 장애인을 볼 기회가 없었죠. 그때는 치맛자락이 그 장애인에게 닿지 않게 하려고 몸을 피했어요. 보이지 않고 잘 모르기 때문에 편견을 갖고 장애인을 대한 거죠.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죠. 저와 동환이의 일상을 담은 제 글이 사람들의 편견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주변에 있는 몇몇 장애아 학부모는 승연 씨에게 충고한다. 옆에서 아이를 돌보고, 장애 관련 서적이나 좋은 치료법을 알아봐야 할 때 무슨 '일'이냐는 것이다.

"몇몇 사람이 보기에는 저는 좋은 엄마가 아니겠죠. 저는 교육관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일을 하면서 행복해지면 아이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저는 수인이와 동환이의 엄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