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그리고 멋(펌)

온전하게 느리게… 이 부부가 사는 법

moonbeam 2017. 12. 5. 11:51


  


'모모의 정원' 지킴이 채상병·이정호 씨 부부가 자신들이 가꾸고 돌보는 자연농 텃밭에서 둘째 담희를 안고 웃었다. 텃밭에는 배추와 무, 고수와 마늘, 양파, 유채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자연농 텃밭 '모모의 정원'에 만추의 햇살이 가득 내려앉았다. 경남 양산시 모래들 1길. 천성산 아래 그림 같은 집과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밭. 올해부터 교사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귀농인이 된 채상병(38) 씨가 텃밭의 토종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부인 이정호(36) 씨가 호박죽을 끓이고 있다. 오늘 아침 밭에 마침 늙은 호박이 보였단다. 상병 씨와 정호 씨는 모모의 정원 공동 운영자. 모모의 정원은 임대한 밭을 이용해 텃밭도 일구고, 닭도 키우고, 그렇게 수확한 곡물과 채소를 이용해 수제 화덕에서 조리한 음식을 이웃과 나누는 특별한 공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레스토랑 '리얼 타임 푸드'다.

38세 상병 씨와 36세 정호 씨
자연이 좋고 흙이 정겨운 두 사람
올해 교사직 훌쩍 내려놓고
천성산 아래 '모모의 정원' 꾸려

집은 전세 텃밭은 임대지만
7세·4세 두 아이는 물론
뜻있는 사람들과 공간 나누며
돈보다는 시간 즐기고파

채상병 씨가 수강생들과 함께 만든 화덕을 소개하고 있다.
■도끼질이 맺은 천생연분

지난 19일 모모의 정원에서 올해 들어 세 번째 열리는 작은 파티가 있었다. 이른바 '리얼 타임 푸드'. 자연농 밭에 모여서 제철 채소를 함께 수확하고 화덕에 불을 피워 요리해 먹는 파티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진짜 음식'을 생각해 보는 프로젝트. 넓은 밭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한 정호 씨의 아이디어다.

이날 파티에는 다큐멘터리 '자연농'을 제작한 감독 '수희&패트릭'도 참가했다. 강수희 씨와 패트릭 라이든 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작가로 세계의 자연농을 소개한다. 자연농은 인간도 자연 일부라는 세계관을 토대로 지속 가능한 농경을 제시하는 농사법.

이날 파티엔 두 감독이 함께 했고, 참가자들은 책으로도 발간된 '자연농'을 낭독하며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상병 씨와 정호 씨는 이런 자연농을 꿈꾸는 게 분명했다. 
이정호 씨가 직접 그린 자연농 텃밭 설계도.
정호 씨는 지난해 11월 지금 사는 작은 집을 전세로 얻었다. 집 앞엔 넓은 풀밭이 있었다. 동네 사람에게 물으니 원래 밭이라고 했다.

상병 씨가 주인을 수소문해서 7월부터 이 밭도 전세로 얻었다. 마당에 있던 닭장을 밭으로 옮겼다. 무성한 풀을 다 베고 나니 넓은 밭이 생겼다. 부부의 손발이 척척 맞다.

두 사람은 합천 서정홍 시인의 농장을 인연으로 만났다. 1주일 시차로 농장을 각각 방문했는데 상병 씨는 후배가 시키는 대로 "나는 결혼할 수 있다!"를 도끼질하며 외쳤다. 고함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뒤이어 방문한 정호 씨와 인연을 맺어 주었단다.
동심원을 형상화한 유채밭.
■민생고를 해결한 생태 화장실

합천에서 예사롭지 않은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2010년 결혼해 다음 해 첫 아이 동희(7)를 낳고 이어 담희(4)를 낳았다. 동희를 낳기 전부터 대안학교인 양산의 '꽃피는 학교' 교사를 한 정호 씨는 아이가 생기자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 서울 토박이인 데다가 부산에는 신랑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산달이 다가오지 꽃피는 학교의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

교사이던 상병 씨는 올 2월 학교를 그만뒀다. 생명과 생태 철학에 대해 학생에게도 자주 이야기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교사의 삶도 좋지만, 자신의 추구하는 삶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결심했다. 새 학기부터 담임을 맡으라는 요구를 받자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리얼 타임 푸드 때 만든 요리.
정호 씨는 서울귀농학교 출신. 도시에서 자랐지만, 늘 농촌을 꿈꿨다. 지난해 이사 온 이 집과 올여름 새로 마련한 텃밭을 통틀어 모모의 정원이라고 지었다. 모모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빌렸다. 금융자본의 세계에서 돈보다는 온전하게 시간을 즐기는 모모를 닮고 싶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농사 경력은 제법 길다. 5년 전부터 논농사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손 모내기를 하고, 낫으로 벼를 베고, 호롱기로 탈곡한다. 자연농 텃밭에는 배추와 무, 유채와 양파, 마늘이 자라고 있었다. 배춧잎은 벌레가 먹어 구멍이 쑹쑹 뚫려 있었다. 2800㎡의 넓은 밭은 혼자 지을 수 없어 몇몇 사람에게 임대했다. 대여섯 명의 사람은 각자 짓고 싶은 작물을 심는다. 앉은뱅이밀을 뿌렸는데 가뭄이 심해 수돗물을 주다 보니 상수도 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상병 씨가 걱정한다.

상병 씨는 밭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태화장실을 직접 지었다. 톱밥이나 쌀겨를 이용해서 용변을 처리하고 있다. 유명 브랜드의 변기는 버린 것을 주워 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텃밭에 모이기 시작했다.
자연농 다큐 감독 '수희&패트릭'이 함께한 낭독회. 모모의 정원 일부 제공
■닭을 키웠다. 닭을 잡았다

생태 화장실을 지은 뒤 교육 모임 하나를 진행했다. 화덕 만들기 프로그램이다. 추석 연휴 3일 동안 12명이 참여한 화덕 만들기가 끝난 뒤 멋진 화덕 하나가 밭 한쪽에 생겼다. 화덕이 생겼으니 뭔가 구워 먹고 싶었다. 그래서 '리얼 타임 푸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0월 29일 어른과 아이 17명이 화덕 옆에 둘러앉았다. 상병 씨가 애지중지 키운 토종닭도 3마리나 잡았다. 닭을 잡기 전에 참석자들이 모두 한 번씩 안아주는 의식을 치렀다. "닭이 그렇게 따뜻한 동물인지 처음 알았어요." 정호 씨가 말했다.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막내 담희가 토종닭 백숙을 가장 맛있게 먹었다.

이날 세상에서 가장 느린 레스토랑이 열렸다. 부산귀농학교 이관옥 선생은 밭에서 수확한 고수로 샐러드를 만들었고, 영상 전문가 에릭 스위트 씨는 드론을 띄워 이날의 행사를 기록했다. 장장 4시간 동안 진행한 이 파티의 주인공은 모두가 합심해 만든 화덕.

화덕 강사 김영주 씨는 화덕을 마당에 만들자고 제안했다. 다른 교육장에서 만들어놓은 화덕을 방치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는 것. 정호 씨는 자연농 텃밭을 선택했다. 모두가 화덕의 주인이 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종닭은 상병 씨가 펀딩을 통해 키우는 중. 닭 한 마리가 3만 원이라 20명에게 1만 원씩의 돈을 모아 닭을 샀다. 돈을 낸 사람에게는 달걀 20개씩 주기로 했다. 시중에 한 알 1500원이나 하는 토종닭 달걀이지만, 500원으로 계산하는 의도된 실수를 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토종닭은 달걀을 많이 낳지 않아 아직 빚을 다 갚지 못했다고.

최근 연 리얼 푸드 타임은 포트락(음식을 각자 챙겨와서 나눠 먹음) 파티로 했다. 첫 회 때는 닭도 잡고 해서 회비 2만 원을 받았는데 이번에 없앴다. 음식 나누는데 돈을 받기가 미안했단다.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란 자연농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빵과 채소를 나눠 먹었다.

아이들 학비 부담 말고는 아직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모모의 정원을 가꾸는 부부. 학교를 그만둔 뒤 '과연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을 떨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상병 씨는 "돈이 아니라 뜻으로 살면 하늘이 돕습니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