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가수 정태춘·박은옥씨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10월27일~11월1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으로 마련되는 이번 공연의 주체는 사회·문화·예술계 인사 100명으로 꾸려진 기념사업 추진단. 배우 권해효·오지혜씨와 가수 강산에·윤도현씨, 작곡가 김호철·윤민석씨, 시인 도종환·백무산씨, 영화감독 임순례씨와 영화제작자 이은씨 등이 참여했다. 2004년 콘서트 이후 5년 남짓 공식 무대에 서지 않았던 정태춘·박은옥씨를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두 사람은 그동안 ‘대중이 더 이상 자신들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해 노래도 만들지 않았고, 무대에 서지도 않았다고 한다.
공연과 함께 10월28일~11월3일 서울 정동 경향갤러리에서는 전시회도 펼쳐진다. ‘정태춘 박은옥 트리뷰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이 전시에는 배병우·박재동·임옥상·이철수·류연복·김홍희·노순택씨 등 화가 및 사진작가 40여명의 작품 50여점이 나온다. 아울러서 정태춘·박은옥씨가 직접 찍은 풍경 사진과 이들의 과거 음반 자료들도 함께 전시된다.
서울 송파에 있는 정태춘씨의 작업실에서 데뷔 30주년 공연을 앞두고 있는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문화평론가 김규항씨가 맡았다.
-아무래도 지난 몇해 동안 음악 작업과 사회활동을 중단한 사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 선생은 원래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멤버였지만 막상 선거 때는 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지요?
“나는 노문모가 노무현이라는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고 견인할 어떤 세대의 세력화를 이루어내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문건으로 제출했고 토론도 했지만 많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곳을 탈퇴했습니다. 선거 때는 고민 끝에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지요.”
-예술가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90년대 이후 사회운동가, 아니 정치인의 상상력을 뒤쫓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당선 가능성이라든가 현실적 실현 가능성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상상력의 최대치가 제도정당의 그것에 머문다는 건 우리가 현재 세상을 넘어서길 포기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상상력의 빈곤이 답답했어요.”
-예술가들의 그런 모습은 거대한 사회변화와 관련된 것이기도 한데요?
“김대중 정권 즈음에 다들 거대담론이 아니라 미시담론이 중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반대 생각이었어요. 거대한 것이 밀려오고 있었어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인 변화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래서 이전보다 오히려 더 큰 거대담론이 필요한데 그 변화를 읽지 못하고 시민의 일상, 지역의 문제 같은 미시적인 문제만 중요시했지요.”
-80년대 진보운동의 거대담론 편향에 대한 반성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반성이 반대의 편향, 말씀하신 대로 미시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편향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90년대 이후 각광 받은 대형 시민운동들에서 그런 모습을 적잖이 볼 수 있는데요?
“변혁을 말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너뜨리려 했던 주류 질서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권력이 국가에서 시민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권력은 시민이 아니라 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지요.”
-거의 예외 없이 그렇게 빠져들어갔죠. 한국의 진보운동은 대학 때 학생운동에서 출발해서 어떤 큰 흐름을 함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80년대의 변혁운동이 90년대의 시민운동으로 바뀐 것도 그렇고요. 선생이 대학을 다니지 않은 게 그런 면에서 좀더 특별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급진적인 세력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메인 스트림 속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메인 스트림에 한 발 걸친 운동으로 갈아탈 조건을 가졌다는 건 분명히 그들의 약점일 수 있었죠. 그런 면에서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나는 변혁운동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음악가로서 개별적인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개별성이 변화하는 상황을 그나마 내 나름의 눈으로 보게 했던 것 같기도 해요.”
-대학을 다닌 음악가들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웃음) 선생의 현실 인식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것이었음에도 함께하던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결국 2002년 이후 일체 음악 작업과 사회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언제까지나 뜻을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대중들도 더 이상 내 이야기나 노래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흡수되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대중들과 호흡하며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도 어려웠지요.”
인류문명에 자부심 버렸지만 포기못할 투쟁 있어
예술가는 대중과 유리되더라도 이상주의자 돼야
-아내이자 오랜 동지인 박은옥 선생 보시기엔 어땠는지요?
(박)“너무 힘들어하니까 보는 나도 많이 힘들었어요. 이 사람이 반복해서 말했어요. 군부독재가 물러났지만 이젠 더 공고하고 사악한 자본의 독재가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군부독재와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변화에 대해선 외면하고 그 질서 속에 들어가 명랑한 얼굴로 개혁을 말하고 민주화를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자본화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런 부정확한 현실 인식이 우리 사회를 내내 힘들게 만들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전에 함께하던 분들과 인간적인 갈등은 없었습니까?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건 없었죠.”
(박)“남에게 공격적이진 않았지만 서운함이나 고립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경기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인) 대추리 싸움 하다가 논구덩이에서 플래카드에 목이 졸려 경찰에 연행돼 가지고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거기 병원에 쫓아온 후배가 그랬대요. 형님은 아직도 이러고 사시냐고, 세상 좋아졌는데 이제 그만하시라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그러더래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왔다고? 그 세상이 왔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라고?’ 지금도 그 이야기만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박은옥씨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사회활동을 일체 중단한 상태에서 대추리 싸움은 예외가 되었는데요?
“함께 싸운 사람들에게는 결례가 될 말이지만, 나로선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사적인 참여였습니다. 내 서정의 본향이기도 한 그 들판에 대한 마지막 헌신이랄까….”
-대추리 싸움에 관심이나 연대가 참 적었습니다. 양극화나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서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변화가 많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보통 사람들의 내면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20, 3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렸죠.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을 윤리적인 잣대로 비난할 순 없지만 그런 변화가 우리 사회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 변화에 실망하고 화가 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젠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예술가들이 시대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시대엔 대중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슬로건을 가지고 혼자 치고 나갈 수도 있는 거죠. 예술가들이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더라도 진정한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거죠.”
-그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대중성을 좇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대중성이라는 말이 상품성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음악 작업과 사회활동을 쉬는 동안 뭘 하고 지내셨습니까?
“시를 쓰고 사진도 찍고 가죽 작업도 하고, 나름대로 바쁘고 재미있게 지냈어요.”(천진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는 <노독일처>라는 시집을 낸 바 있고 사진과 가죽공예 또한 전문가 수준이다.)
-재미있었다고 하시지만 노래를 만들지 않는 정태춘이 정말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진 않으셨습니까?
“가끔 좋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땐 나도 곡을 써야 한다, 또 어떤 특별한 화두가 떠오르면 그걸 곡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불끈불끈 솟아오를 때가 있죠. 그러나 더 이상 노래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아내 박은옥씨에게) 뭐든 안 하면 퇴보하게 되는데요, 음악 작업은 더욱더 그렇지요. 무례한 질문일 수 있는데 정 선생의 작곡 능력이 여전한지, 혹시 확인할 기회는 없었습니까?
“전혀 하지 않아서 나도 알 수 없었는데, 확인하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이번 공연 준비하는 후배들이 공연의 배경 음악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내는데, 아주 비장한 게 참 좋더라구요. 역시 대단하구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 신은 참 불공평하구나 싶기도 했어요.(웃음)”
-박 선생은 정태춘·박은옥이라는 듀오와는 별개로 매우 특별한 스타일을 가진 보컬리스트이고 팬들도 많습니다. 정 선생이 오랫동안 노래를 만들어주지 않아 원망스럽진 않았습니까?
“그런 마음도 들긴 했지만 음악 작업을 중단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원망을 할 수는 없었어요. 정태춘씨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알아보자고도 했지만 열심히 알아보게 되지 않더군요.”
-남편으로서 정태춘은 어떠신가요?
“예술가로서는 음악적인 능력 면에서나 그 안에 담긴 사상의 면에서나 전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해요.”
-남편으로서 어떠냐고 질문했습니다.(웃음)
“딸이 독립해서 둘이 살거든요. 식탁에서 둘이 밥 먹으면서 세상의 미래에 대해, 인간이라는 종이 희망이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 부부는 우리밖에 없을걸요.(웃음)”
-(다시 정태춘씨에게) 정 선생님은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런 유별난 진지함과 고뇌를 아내에게서조차 이해받고 존중받을 수 없었다면 어쩔 뻔하셨어요?
“감사합니다.(웃음)”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은 뭔가요?
“이 사람(박은옥)은 <정동진/건너간다>(1998), 나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내 능력 이상으로 구현해본 앨범이라서 음악적으로 만족해요.”
-대중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요?
“그랬죠. 그런데 사실 나는 처음부터 대중적인 가수가 아니었어요. 대중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건 행운이었고 고마운 일이지만 사실 나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죠. 운동을 하면서도 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한 곡도 만들지 않았죠. 대중 앞에서 부르는 노래만 만들었죠.”
-정태춘·박은옥의 팬들은 대개 <아, 대한민국…>(1996)이나 그 이전의 서정적인 노래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요즘 젊은 세대는 아예 두 분의 음악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지난번 ‘<고래가 그랬어> 후원의 밤’에서 그런 세대들이 선생의 노래에 감동하는 걸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번 30주년 공연을 계기로 정태춘의 복귀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도 될까요?
“나는 작년에 30주년이었고 이번 공연은 원래 박은옥씨의 30주년 공연에 출연하는 정도로 생각하다가, 이젠 두 사람의 공연으로 생각하면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내가 뭔가 변화를 보이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창작 활동을 재개할 생각은 아직 없어요.”
-분노나 좌절감이 아직 남은 겁니까?
“이젠 괜찮아요. 시간이 지난 것도 있지만 나를 좀더 객관화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역사를 보면 시대의 진보성이라는 게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진보가 주류 사회로 체제내화하면서 그보다 급진적인 것들은 ‘철 지난 이야기들’, ‘불편한 존재들’로 폐기되는 거잖아요. 그런 처지를 당하는 사람은 한때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죠. 나도 그랬듯이.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세대들은 인생에서 그런 격동기를 아예 체험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가죠. 그러니 인생에서 그런 역사적 격동, 변화의 시대라는 공공적 열정의 체험을 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정은 이제 식은 건가요?
“좀더 나은 세상요? 그에 관한 생각도 좀 바뀌었고… 지난 몇해 동안 시사 문제에 일체 관심을 끊고 세상을 타자의 눈으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관념적으로 들리겠지만 인간이라는 종, 그들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막연한 자부심도 버리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포기할 수 없는 투쟁과 그 새로운 아이디어들… 있죠, 그런데….”
-들려주시지요.
“그저, 한 이상주의자의 몽상이에요.”
-조금만 들려주시지요.(웃음)
“기본적인 뼈대는 역시 오늘 우리가 매여 살아가는 이 자본의 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겠죠. 어떻게 하면 그 체제에 불복종하고 그 체제에서 이탈해서 좀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그런 고민의 국제적인 실천과 연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당신들의 문명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말하면서 고작 그 비상구 앞에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현재 내 모습이죠.”
-전혀 무기력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이 캄캄한 현실을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고민하는 예술가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게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예술가가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게 더 많이 아쉽습니다. 이번 공연은 어떻게 꾸며집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저희가 받은 박수와 환대는 정말 과분했어요. 많은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을 골랐고요, 거기에 우리 두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보탰어요. 그 노래들 사이사이에 내 시와 사진들을 넣어 지난 5년여 동안의 내 시선의 일부를 보여드리려 합니다.”
김규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