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그리고 멋(펌)

상금 4억원은 아프리카에···내 옷값은 1달러---케냐·말라위 30년 백영심 간호사

moonbeam 2020. 9. 14. 10:45

1990년 9월, 김포국제공항 출국장. 당시 28세이던 백영심 간호사가 아프리카 케냐로 의료 선교를 떠나던 날이었다. 돌아올 날은 정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항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백 간호사는 2남 4녀 중 셋째 딸. 제주 조천읍 함덕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제주에서 마쳤다. 자식을 육지로 내놓는 일만 해도 조마조마했는데, 그 귀한 셋째 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로 간다니···.

백 간호사를 아프리카로 파송했던 한국 교회조차도 그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처음엔 정식 선교사 월급 대신, 교회 청년들이 모아준 300달러(약 36만원)와 병원 퇴직금을 가지고 떠났다.

하지만 백 간호사는 아프리카에서 30년을 ‘시스터 백’으로 살았다. 시스터 백은 현지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그는 케냐에서 4년, 나머지 세월은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빈국이라는 말라위에서 보냈다. 자기 월급을 쪼개고 아껴 말라위에 유치원·초등학교·진료소를 지었고,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종합병원인 대양누가병원과 간호대학 설립도 주도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백 간호사는 2012년 이태석상, 2013년 나이팅게일 기장, 2015년 호암상, 지난 8월 성천상을 받았다. 국내외에서 굵직한 사회봉사·의료인상을 두루 받았지만, 언론 인터뷰는 손에 꼽을 정도. 지난달 17일, 성천상 수상을 위해 서울에 온 백 간호사를 만났을 때도, 첫 인사는 ‘저는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였다.

 

지난달 18일 성천상을 받은 백영심 간호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날 입은 원피스는 후배가 시상식 날 입으라고 선물해 준 것이다. 하루 전 인터뷰에서 백 간호사는 국제 구호품 시장에서 1달러 주고 샀다는 남방과 면바지를 입고 왔다. 그는 “옷과 가방이 크게 필요 없다”며 “나에게 필요한 건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다”고 했다. 벽에 걸린 장식용 천은 말라위 특산품으로, 백 간호사가 현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사랑 실천’이 삶의 소명

성천상은 JW중외제약 창업자인 고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통해 의료복지 증진에 기여하면서 사회적인 귀감이 되는 참 의료인을 발굴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상을 사양하신 적도 많으시다고요. 인터뷰 거절당한 기자도 많고요(웃음).

“다른 사람들이 다 각자 주어진 길을 가는 것처럼 저도 제 길을 가는 것뿐이지, 언론에 나올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어쩌다 보니 제 일이 조금 알려져서 (인터뷰를) 하지만(웃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내가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선교사로 조용히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주변에 개인 정보도 잘 드러내지 않았어요.”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인 안필영 등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재외 동포 42명을 ‘건국 60주년 재외 동포 명예위원’으로 위촉했다. 백 간호사도 여기 포함되면서 처음 언론에 이름이 알려졌다.

–명예위원은 어떻게 되셨나요.

“당시 짐바브웨·말라위 겸임 대사님이 대양누가병원 기공식에 참석하시면서, 제가 일했던 진료소에도 오셨어요. 이후 한국에서 명예위원이 됐다는 연락이 왔어요. ‘저 너무 바빠서 못 갈 것 같습니다’ 했더니, ‘그게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된 건데 무슨 말이냐’고 하시더군요(웃음). 너무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할 것 같아, 알겠다고 했어요.”

–그때 비행기 좌석을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진해서 바꿨다고요.

“나랏돈이고 나는 몸도 작은데 비즈니스석을 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코노미석을 타고 왔어요. 차액을 돌려주셔서, 그걸로 현지에 필요한 약품을 샀습니다.”

–이태석상도 1회 때 수상을 권유받았지만, 사양해서 2회에 받으셨다고요.

“2회 때는 저희 간호대학이 막 문을 열었어요. 구급차도 필요하고 간호대학 버스도 필요한데, 가만 보니 상금이랑 필요한 금액이 맞아 떨어져서 받겠다고 했어요(웃음).”

백 간호사는 호암상 상금 3억원은 현지에 도서관을 짓는 데 썼다. 성천상 상금 1억은 “현지 중·고등학교를 짓는 데 쓸 예정”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꿈이 간호사였나요?

“큰언니 권유로 간호대학에 입학했지만,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나는 왜 사는가’ ‘뭐 때문에 간호 공부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여수에 있는 애양원(한국 최초의 나병원)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제가 많이 깨졌어요.”

–깨졌다니, 무슨 뜻인가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는데도, 감사하고 기쁘고 평안해요.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이유는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간호라는 걸 알았습니다. 간호를 공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내가 쓰임받았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아프리카로 간 건가요?

“졸업 후 대학 병원에서 6년간 일했는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나더군요. 급여나 생활 안정성 면에서 안주해버릴 것 같아서요. 그 무렵 서울의 한 교회를 통해, 아프리카 케냐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가족들 반대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가족들은 가지 않기를 바랐죠. 그때 선도 많이 들어왔거든요(웃음). 결혼해서 평범하게 아기 낳고 살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할 것 같았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도 대학 때부터 워낙 제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걸 아셨기에, 결국엔 지지해주셨어요.”

 

–대학 병원 간호사로, 혹은 한국에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요.

“아프리카에 가야만 봉사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를 더 요구하는 곳에서, 더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 도움이 됐으면 했어요. 그게 아프리카였고요. 한국 대학 병원은 제가 없어도 일할 사람이 많잖아요.”

 

2001년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현지인들을 진료하는 백영심(오른쪽에서 두 번째) 간호사의 모습. /백영심 제공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미국의 NP(전담 간호사·nurse practitioner)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은 전문의 진료 전, NP가 진단을 내리고 처방전을 쓸 수 있어요. 케냐 간호협회에 등록하고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현지 간호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동식 진료 차량을 타고 왕진 가방 들고서 각 마을을 돌았어요. 피부 문제 있는 환자부터 말라리아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를 돌봤습니다.”

–케냐에서 4년 일하다, 말라위로 갔습니다.

“케냐만 해도 동부 아프리카 중심 나라입니다. 수도인 나이로비에서는 국제 회의도 많이 열리고, 대형 병원도 있고요.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말라위는 의료진이 인구 대비 가장 부족한 나라였어요.”

–언어도, 음식도 다른데 힘들지 않았나요.

“저는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에는 자신이 있어요. 흙바닥에서도 잘 수 있고, 호텔에서도 잘 수 있고요.”

–성천상 시상식 전, 현지 교민 인터뷰에서 ‘백 간호사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했다’는 얘기가 나와요.

“말라위에 가니, 초기라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오래 내버려둬서 위험해진 경우가 많았어요. 조기 치료와 추후 관리까지 할 수 있는 진료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당시 한국은 IMF 외환 위기로 많이 어려웠어요. 지인들이 도와줬지만, 제 생활비도 줄여야 했죠. 바나나 하나, 커피 한잔으로 버티는 날이 많았어요. 내가 가진 건 몸 하나, 젊다는 게 전부여서 그거라도 바쳐야겠다는 심정이었어요.”

–진료소 다음은 병원 건립이었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아이 엄마가 뇌성 말라리아 아이를 품고 진료소에 왔는데, 이미 혼수 상태였습니다. 아이가 손도 못 써보고 제 품에서 죽었어요.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오면서, ‘의료 시설이라도 뒷받침된다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병원을 세워야겠다' 하는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진료소와 달리 병원 건축은 돈이 훨씬 많이 들 텐데요.

“꿈으로만 간직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이동 진료를 가는 길에 한국에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인데 ‘뭐가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1000불로 살림 사는 사람인데, 이분은 도와주시겠다는 규모가 달라요(웃음). 자꾸 필요한 걸 말해보라고 하기에, 병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평생 현역이 꿈

당시 백 간호사에게 전화한 사람은 해운 회사인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75)이다. 정 회장은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함께, 기근 국가를 위한 원조 식량 운송을 했다. 가난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국가를 직접 도울 방안을 찾던 정 회장은 WFP를 통해 백 간호사를 소개받았고, 그해 10월 아프리카에 ‘미라클 포 아프리카’ 재단을 세워 병원 건립을 시작했다. 정 회장이 재단 이사장, 백 간호사가 이사를 맡았다. 2년 5개월 만에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장비를 갖춘 ‘대양 누가 병원’이 말라위 수도 릴롱궤에 세워졌다.

–기공식에 말라위 대통령도 왔습니다.

“병원 기공식 날, 대통령이 오신다고 태극기를 가져오래요. 급하게 태극기 100개를 구했어요. 말라위 대통령이 달리는 길 양쪽으로 태극기 수십 개가 펄럭거리는데, 참 감격스럽더군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지은 병원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들 조언은, 병원에서 제일 좋은 방을 쓰래요(웃음). 그래야 사람들이 우습게 안 보고, 품위도 지킬 수 있다고요. 제일 좋은 방은 현지인 병원장 주고, 주요 직책도 다 현지인들한테 맡겼어요. 이 병원은 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한 거니까요."

‘미라클 포 아프리카’는 2010년에는 대양간호대학을, 2012년에는 정보통신기술대학을 세웠다.

–왜 대학을 세웠나요?

“아프리카에 온 지 15년 정도 됐을 때, 변화가 없다는 생각에 회의감에 빠졌어요. 이대로라면 100년을 여기서 살아도 그대로일 것 같았어요. 교육만이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목표는요?

“평생 현역으로 살고 싶어요. 이제 병원은 현지인들이 자리를 잡아서 잘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새로운 지역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2015년 말라위 ‘대양 누가 병원’에서 동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 /백영심 제공

–돈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살면서 돈이 필요한 건 맞아요. 그렇지만 ‘돈이 제일이다’라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후에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는데, 아프리카는 고구마도 많고 호박도 많고 농산물은 되게 싸거든요(웃음). 내 몸 하나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다는 배짱이 있어요. 지금 제가 입은 옷도 국제 구호품 시장에서 1달러 주고 산 거예요. 저한테 필요한 건 넘치도록 받고 있어요. 나눠줘야 할 만큼요.”

–후회 없는 인생인가요?

“네. 한 번 사는 인생, 가장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어떤 길인가 선택하고 보니, 그게 이 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