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열 다섯 살의 고민

moonbeam 2015. 3. 5. 09:39

열 다섯 살. 성인이 된 누군가는 '한창 좋을 때'로 기억하고 있을 시절이지만 요즘 아이들에겐 그 의미와 상황이 좀 다른 듯합니다. 대입의 전초전인 '고입'을 앞두고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 혹은 부모들이 있고, 또 다른 아이들은 줄 세우기, 경쟁교육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길을 찾는 등 애를 씁니다. 올해로 창간 15주년을 맞은 <오마이뉴스>는 세계 각국 15세 아이들의 현재와 그들의 고민을 담은 기획 '세계 속 15세'를 몇 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설렘으로 들떴던 2000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로 <오마이뉴스>가 창간되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바로 그 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되었다.

어느 덧 여드름이 나고, 첫사랑을 시작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꾸어야 할 나이 열다섯. 과연 창간 15돌을 맞은 오마이뉴스와 동갑내기인 대한민국 15세들은 어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부모님 소득에 따라 하루 일과도 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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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 밤 늦도록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 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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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에 사는 승환(가명·15세)이의 시간표는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까지 학교에 가고 오후 3시께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은 뒤, 다시 학원으로 직행해 밤 10시까지 공부한다. 그리고는 학원 수업이 끝난 밤 10시께, 바로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혼자 햄버거로 해결한다.

평일은 요일별로 영어, 수학 학원을 가거나 피아노 과외를 받고, 주말에는 밀린 학원 숙제를 하고 수학 집중 과외를 받는다. 엄마와 함께 짰다는 시간표에서 놀랍게도 '휴식'이라는 글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학교와 학원 사이, 남은 자투리 시간마저도 휴식 대신 독서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주 7일 근무에, 날마다 야근을 하는 것은 직장인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스케줄이다. 그런데도 승환이가 이토록 살인적인 스케줄에 따라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사가 되려고? 아니면 공무원? 하지만 아이는 자신에게는 꿈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연예인을 꿈꿨던 적이 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해서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맞벌이를 하는 승환이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한다. 그런데 승환이가 부모님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요즘 돈 벌기 참 힘들다'는 얘기다.

아이가 꿈을 포기한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연예인이 되면 극히 일부만 돈을 잘 벌지,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꿈을 접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교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부모님처럼 '좋은 대학'을 가는 것 역시 포기했다고 한다.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만이라도 들어가서 효도해야죠."

좋아하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듯 보였던 승환이. 그 이유에 대해 아이는 '효도'라는 두 글자로 명쾌하게 정리해줬다.

강남 학원가 vs. 강북 한 아파트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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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소재 한 여자중학교 교실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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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환이가 학원에서 뺑뺑이를 돌 시간, 서울 강북구에 사는 은서(가명·15세)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은서도 평일 아침 등교해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승환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은서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아니,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다. 은서네 집은 학원에 보낼 만한 가정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벌이에, 자영업을 하는 아버지의 소득은 은서가 자랄수록 줄고 있는 현실이다. 어쩔 수 없이 공부는 해야겠기에, 집에 오면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혼자서 공부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의 70~80%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때만 되면 바뀌는 실시간 검색어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결국 엄마의 폭풍 잔소리에, 한바탕 짜증으로 응수하며 하루를 보낸다.

"딱히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학원은 다니고 싶어요."

은서도 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장 소원 하나를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건 학원에 가는 것이다.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게 꼭 학원에 다니지 않아서인 것만 같아서다. 남들 다 다니는 학원에 보내주지도 않으면서, 공부하라는 엄마 잔소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다.

아이들이 태어나던 해인 2000년부터 지난 15년 간 한국사회에서 공고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0년 10.4%였던 상대적 빈곤율(중위 소득의 50% 미만 인구)은 2013년 14.5%까지 치솟았고, 월 소득 700만 원 이상 가정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42만 8000원에 달하지만, 소득 100만 원 이상 가정의 교육비는 6만 6000원에 불과하다(2014년). 그나마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여겨지던 교육이 도리어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올해 열다섯 살인 두 아이는 다른 하루를 산다. 효도하기 위해 별 생각 없이 학원 뺑뺑이를 도는 승환이와 엄마가 제발 학원에 보내주는 게 소원인 은서. 다른 하루를 살지만, 아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아무런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꿈도 없고, 고민을 나눌 상대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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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어도, 꿈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어도 좋을 그럴 나이가 아닐까? 보통 언론에서는 교사나 연예인을 요즘 중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직업이라고 보도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많은 아이들이 아무런 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는 사실이다. '2014년 학교진로교육 실태조사'에서 장래희망이 아예 없다고 답한 중학생이 무려 10명 중 3명에 달했다. 공교롭게도 꿈이 없는 열다섯 살 아이들에겐 한 가지 똑같은 고민이 있었다.

"당장 눈앞의 시험이요."
"공부하는 만큼 성적이 안 나오니까 미칠 것 같아요."
"학교 가도 공부! 학원 가도 공부! 집에 와도 공부! 잠깐 쉴 때 게임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데, 그것도 못하게 하니까 그냥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목동에 사는 민석(가명·15세)이는 요즘 자살충동에 시달린다고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열다섯 살 아이의 말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힘들 때, 털어놓을 상대가 있니?"
"아무도 없어요."

한창 단짝친구를 사귈 나이이기도 하거니와 가족들에게 상의할 수도 있을 텐데, 아이는 왜 죽을 정도로 괴로운데도 혼자서 고민을 떠안고 있는 것일까? 민석이는 가족도, 친구도 내 편이 아니라고 했다. 언젠가 엄마한테 이야기해봤지만, "그런 고민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는 잔소리가 돌아왔을 뿐이라고 했다. 친구들 역시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서로의 성적을 모두 꿰뚫고 있을 정도로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어 진짜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게 과연 민석이만의 이야기일까? <2014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10명 중 2명의 아이들이 혼자서 고민을 해결한다고 답했다. 아이들이 사실상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 순간,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잠재된 분노를 안고 사는 착한 아들,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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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베스트 저장소 캡처화면
ⓒ 일간베스트 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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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에서 남자애들 절반이 스트레스 풀려고 일베 해요."

서울 강남에서 남녀공학 중학교를 다니는 현우(15세·가명)에게서 '일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남자애들의 절반이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일베'를 하고, 그걸 과시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일베'를 하는 아이들 중에는 논리적인 친구들이 많고, 주로 부모님이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할 때 '일베'를 시작한다는 게 현우의 설명이다. 자신도 '일베'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엄마가 성적 문제로 심하게 나무랐을 때 '일베'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 간신히 참으면서 견디고 있다는 현우. 과연 아이에게는 '해야 하는' 공부 말고,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까?

"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니?"
"농구요. 농구할 때 행복해요."

"그럼, 농구선수가 되면 어때?"
"음. 그걸로 먹고 살 수 있나요?"

아이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눈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열다섯 살인지 서른다섯 살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들었던 익숙한 말들을 흉내 내고 있었다. 끝도 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꿈'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차라리 일찌감치 '공부하는 인형'으로 살아가는 삶을 택한 우리의 착한 아들, 딸들. 하지만 아이들의 잠재된 분노를 걱정해야 하는 때가 왔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0년 이후,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사망원인 1위를 자살이 차지하고 있다. 분노는 어떻게든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로 향하면 자해가 되고, 타인에게로 향하면 왕따나 '일베' 같은 사회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과연 누가 우리 아이들을 이토록 외롭고, 위태롭게 만든 것일까?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지난 2000년,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올해 열다섯이 된 이 아이들에게서 '첫 사랑'이나 '꿈'같은 낭만을 엿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오산이었다. 꿈꿀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부모님을 위해 책상 앞을 지키는 안쓰러운 모습, 지금 대한민국에서 15세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