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져라!” 욕먹기 딱 좋은 말이다. “꿈을 버려라!” 이 말 역시 욕먹는다. 꿈을 이루기 어려운 세상에선 꿈을 가지라고 말해도 욕먹고, 꿈을 버리라고 말해도 욕먹는다. 오히려 후자가 더 욕먹을 수도 있다. “당신은 꿈을 이뤘다고 이따위로 말하는가?”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결국 꿈과 관련된 좌절의 수렁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말을 해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세상,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꿈을 갖자”고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종교인과 정치인은 그런 말을 상습적으로 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집단 의례의 성격이 강한 곳에선 “꿈을 갖자”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 고문’은 고문을 하는 사람의 뜻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도 속는 줄 알면서도 희망을 원한다. 그래서 양쪽이 암묵적으로 공모한 가운데 ‘희망 고문’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희망 고문’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 목소리의 진정성을 믿기는 어렵다. 그건 사실상 희망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라는 주문일 뿐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도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많은 이들이, 특히 진보 인사들이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을 개탄한다. 그러면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게끔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게 과연 올바른 해법인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개천에서 난 용을 보면서 꿈과 희망을 품곤 하지만, 모두가 다 용이 될 수는 없으며, 용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하며, 용이 되지 못한 실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좌절과 패배감을 맛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개천에서 난 용을 향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 만하다고 자위하는 동시에 ‘희망 고문’을 사회적 차원의 정책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일을 계속해오지 않았던가?
그간 지방은 개천을 자처하면서 ‘용 키우기’를 지역인재육성전략이자 지역발전전략으로 삼아왔다. 용은 어디에서 크나? 무조건 서울이다! 그래서 서울 명문대에 학생을 많이 보내는 고교에 장려금을 주고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서울에 학숙을 지어 각종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유능한 학생을 서울로 많이 보내기 위해 발버둥쳐왔다. 사실상 ‘지방대학 죽이기’를 지역인재육성전략이자 지역발전전략으로 삼은 셈인데, 그게 어이없다고 웃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지역의 이익과 지역민의 이익이 같을 걸로 생각하지만, 그게 꼭 그렇진 않다는 데 지방의 비극이 있다. 지방대학이 죽는 건 지역의 손실이지만,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건 지역민의 이익이다. 각 가정이 누리는 이익의 합산이 지역의 이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실이 되는 ‘구성의 오류’가 여기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서민층 학부모마저도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꿈을 꾸기에 그런 지역발전전략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이 나는 걸 진보로 생각할 뿐, 개천에 남을 절대다수의 미꾸라지들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다. 미꾸라지들의 돈으로 용을 키우고, 그렇게 큰 용들이 권력을 갖고 ‘개천 죽이기’를 해도 단지 그들이 자기 개천 출신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내부 식민지의 기묘한 자학이요 자해라 아니할 수 없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버리지 않는 한 지금의 과도한 학력·학벌 임금격차와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출세하지 못한 채 개천에서 살아가야 하는 다수 미꾸라지들에게 불필요한 열패감을 안겨주면서 그들을 불행의 수렁으로 밀어넣는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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