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옆모습을 품고 시간을 견뎌내다서울 이화동 일대에는 ‘서울의 잊힌 현재’가 파묻혀 있다. 1958년 지어진 이름 없는 2층집이 목인헌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남산에서 인왕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집이라는 의미다. 1층 카페의 콩고물 아이스크림이 일품이다.
제대로 지어진 집이 아니었다. 누군가 설계한 집도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생겨나버린 집, 어쩌다 보니 60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텨낸 집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9-541번지에는 1958년 무렵에 생겨난 이름 없는 2층집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집짓기를 체득한 목수들이 이화장과 낙산 한양성곽 사이의 이화동 산비탈에 지어놓은 여러 채 가운데 하나였다. 경사가 45°나 됐던 낙산 아래 산동네는 이내 슬럼화됐다. 난개발의 시대가 시작됐다. 서울 중심가에서 밀려난 서민들이 산동네로 흘러들어 오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동네 전체가 불법 증·개축의 온상이 되었다. 무명의 2층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창은 벽이 되고, 벽은 방이 되었다. 집 속의 방 속의 방 속의 방 같은 집으로 변해버렸다. 2층집은 그 꼴로 언덕 위에서 반세기를 넘게 버텼다. 이충기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가 이화동 2층집과 처음 만난 건 2012년 무렵이었다.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의 손에 이끌려 이화동 일대를 둘러보게 되었다. 최홍규 관장은 이화동 지킴이로 나선 지 오래였다. 2003년 동숭동 대학로에서 이화동 안쪽으로 이어지는 초입에 쇳대박물관을 세웠다. 그 인연으로 이화동 산동네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이충기 교수는 이화동 일대에도 서울의 잊힌 현재가 파묻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최홍규 관장은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박물관으로 과거를 현재화하고 있었다. 이 교수 같은 건축가의 구실은 이화동의 주택을 선벽원처럼 재생시키는 일이었다. 이 교수는 사재를 털었다. 마침내 낙산 산비탈에서도 개발의 시대가 끝나고 건축의 시대가 시작될 참이었다. 이충기 교수의 눈에 띈 주택이 이화동 2층집이었다. 단단한 축대 위에 오롯이 서서 서울의 서쪽 면을 직시하고 있었다. 타의로 변형되고 자의로 증식해서 본래 모습을 잃은 듯했다. 시간의 먼지들을 하나하나 걷어내자 내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방을 없애고 창을 냈다. 전망을 되찾자 서울의 전경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예전에 목멱산이라고 불렸던 남산은 광화문이나 강남에서 보면 뾰족한 삼각형이다. 서울의 동쪽인 낙산에서 바라보면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남산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동대문 두산타워부터 세운상가를 거쳐 을지로 센터원과 페럼타워,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를 거쳐 인왕산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스카이라인도 한눈에 들어온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과는 또 다르다. 이충기 교수는 이 풍경을 보고서 택호를 목인헌이라고 지었다. 목멱산에서 인왕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집이란 의미였다. 분명 서울 풍경의 재발견이었다. 이화동 일대가 슬럼화되면서 동네 주민 말고는 아무도 낙산에 오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은 옆얼굴을 잃어버렸다. 목인헌에서는 잊혔던 서울의 옆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 개발 건축 시대에서 ‘재생 건축’ 시대로 1958년 당시 목인헌은 듀플렉스 집이었다. 가운데 나무 계단을 중심으로 두 채가 샴쌍둥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구조였다. 무차별 증·개축한 흔적들을 싹 걷어내고 본래의 형태부터 되살렸다. 이충기 교수는 선벽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삼각 지붕의 거친 목재와 벽돌로 쌓아올린 마른 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선벽원에서처럼 목인헌의 목재와 벽돌들도 세월의 풍상과 함께 고목과 바위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았다. 목재 한 조각까지도 집의 일부였다. 부득이하게 뜯어낸 목재로는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다. 다시 집의 인테리어로 되살렸다.
사실 목인헌의 진가는 그곳에서 시간을 얼마간 보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9-541번지 2층집이던 시절부터 60여 년 동안 목인헌에서는 수많은 이가 살다 갔다. 집에서 펼쳐졌던 일상의 모습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달랐다. 너무 사소해서 기록에도 없는 도시 소시민의 일상들이다. 반면에 공간과 풍광은 한사코 그대로였다. 목인헌이라는 집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옆얼굴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목인헌의 지금 모습은 1958년에 지어졌던 형태 그대로다. 거기에 현대적인 윤기를 입혔을 뿐이다.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멈춰버린 공간은 흘러간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반세기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목재와 벽돌은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바라봤겠고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목멱산과 인왕산의 풍광은 어쩌면 그들이 느꼈을 심상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준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은 관람자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목인헌도 마찬가지다. 목인헌의 건축 역시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흔적을 느낄 때 비로소 준공된다. 서울은 개발 건축의 시대에서 재생 건축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다. 반세기 넘게 스스로를 가득 채워온 서울한테 화두는 도시 재생이다. 결국 무엇을 기억할 것이냐의 문제다. 목인헌은 도시민의 잊힌 일상을 주택 재생이라는 방식으로 기억해낸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현재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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