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자연휴양림에서 채광석 시인을 만나다.
한 시대를 열정으로 살다간 시인.
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강제 징집.
시인이면서 펜보다는 몸으로 살다간 흔적을 남긴 사람.
동시대의 아픔을 같이 공유했다는 느낌으로 추모한다....
과꽃
광주에서 순 깡패짓만 골라하던 그 새끼
인문고 문턱에도 못 가보고
겨우 상고에나 다니던 그 새끼
툭하면 땡땡이치고 툭하면
야 꼬마야 돈 내놔
야 꼬마야 누나 내놔
하던 그 새끼가
어느날 군인이 되어
우리 집에 찾아왔어
학교 끝나는 시간만 되면
스포츠 머리에 기름 발라 넘기고
어이 은희씨
수피아 여고생허고 상고생허곤
영 수준이 안맞는당가
키득키득 우쭐거리며
누나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 새끼
야이 씨발년아
누군 공부 못해 인문고 안간 줄 알어
그놈의 돈 때문에 내 청춘 종친거지
박박 악쓰던 그 새끼였어
그 새끼는 느닷없이
벌벌 떠는 아버지 앞에 넙죽 큰절을 했어
은희 누나를 절대 집 밖으로 내보내비 말라고
나가면 무조건 개죽음이라고
두부처럼 다 뭉개진다고
죄없는 광주시민 다 죽이는
공수부대 샅샅이 때려잡고
민주화되면
사람돼서 돌아오겠다고
숨 넘어가듯 주절댔어
그때서야 난 알았어
그 새끼 군복과 공수부대놈덜 군복이 틀리다는 걸
그 새낀 회색 깨구락지 군복을 입고 있었어
그때였어
처음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누나에겐
수십통의 편지를 툭 던져주었어
그리곤 어둠넘어 사라졌어
그날부터 누난 울었어
이 이 미친년이
이 이 난리에 사귈 놈이 없어
저런 날깡패를 사귀어
아빠 호통에서 아랑곳 않고
아빠 매질에서 아랑곳 않고
매일 헌혈을 갔다와선
한 통 한 통 편지마다
얼굴 파묻고 울었어
나타나지 않았어 그 새끼는
하얀 교복 입고 등교길 서두르는
작은누나 골목길 어귀
예전처럼 뒷호주머니에 손 찔러넣고
보라색 배꼽바지 펄렁거리며
헤이
헤이
거들먹거리지도 않았어
우리 반 애들 돌 빼앗던
그 새끼 똘마니들도
하늘나라 가 버린거야
그 새끼는 아예 하늘로 올라가 버린 거야
누나가 매일 과꽃을 꺾어와
한 잎 두 잎
길 골목에 흩뿌리기는 하지만
하얀 눈물 맨날 맨날
꽃잎처럼
하늘거리기는 하지만
기다림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이름 모를 산새들 떼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리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