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술과 크리스천 --- 박성건목사

moonbeam 2015. 10. 17. 19:08


 

 

 


21세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경우, 음주문화가 거리낌 없는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를 통해 많은 크리스천들이 술자리의 사진을 올리기도 하고, 술 마시는 사진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에 대해선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질문을 자꾸만 하게 되고 술에 대한 이야기와 설명을 들었는데도 찜찜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설명이 부족한 것 보다 답변이 현실과 잘 맞지 않아서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고, 또 자신의 음주를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술이란 것이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느끼는 현실과 오늘날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가르침과는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술에 대한 생각을 잠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서양의 경우 술 문화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입니다. 물에 석회가 많이 나오는 유럽의 경우 맥주나 와인을 물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문화 속에서의 술은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초기부터 술 문화를 엄격히 제한하여 왔습니다.



1)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음주를 금한 이유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는데,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의 문화를 관찰하고 판단해보니, 한국남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담배와 도박도 많이 하더라는 겁니다. 이러한 생활습관이 한국의 문화와 사회를 나쁘게 만드는 요인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개종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시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여 술을 먹지 말라는 규정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지나친 술 문화가 한국의 개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지요.


선교사가 조선이란 나라에 와서 본 모습에 대해 ‘다니엘 기포드’는 ‘조선의 풍속과 선교’라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는 술에 취한 감상주의자들 혹은 서로 상투를 잡아당기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대쾌도의 길거리 술집]




조선이란 나라에 와보니, 남자들은 술과 흥에 취해 있고, 도박을 즐기며 살아가니 이래서는 나라가 될 것 같지 않으니까. 술을 아예 금지해 버리게 된 것이고, 건강하게 자신과 나라와 가정을 살리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맥락에서 금주와 금연과 도박을 금지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표지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영조실록을 보아도 조선인들의 술 문화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 근래에 술을 금한 후로 마을과 거리에서 서로 욕하고 싸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는가?”라고 하니, 병조판서 홍상한이 말하기를, “추조(秋曹, 형조)와 경조(京兆, 한성부)에 서로 싸워 소송하는 일이 영원히 그쳐서 곤장을 칠 일이 없을 정도로 형벌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은 금주령의 빠른 효과입니다” 하였다. (영조실록 32년(1756) 4월 4일)


오늘날의 음주문화를 미뤄 보건데, 가능한 일이라 생각되는데요. 이런 논의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술이란 것이 우리 일상을 비춰보면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가진 것이다보니 술 때문에 가정과 사회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음주와 범죄와 연관되어지며, 자제가 안 되는 경우는 심각한 파장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의 경우 음주로 인한 사고와 사건이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청소년의 음주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음주로 인해 이 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은 기독교 뿐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회전체의 문제로 번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죠선크리스도인회보’의 ‘계주론’에서는 계속해서 술에 대해 지속적인 개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97년 9월 8일자 내용 「호랑이나 사자에게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거니와 술먹다가 죽으면 어찌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으리오.」 이것을 보면, 음주를 무시무시한 죄로 규정을 해버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금주에 관한 부작용


물론 기독교내의 금주문화가 결국은 우리의 신앙은 아름답게 하는 것도 있겠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 부작용중 심각한 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판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음에도 기만하게 되고 경건한 척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긴 요즘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음주를 드러내더군요. 그만큼 자기정당화에 익숙해 있고 그러한 신앙은 결국 위산과 교만과 자기합리화에 빠질 수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원칙만 놓고 보면, 선명합니다.  신앙적인 원칙은 마셔도 되는데 과하지 말라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재미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바를 생각하여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지식에 따라서 술을 편안하게 마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옆에 있다면, 내가 편하다 해도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난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셨어요. 그 자리에는 나만 있던 것이 아니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크리스천이란 것을 아는 몇 몇의 사람들이 내가 술을 먹는 것을 보고 “어떻게 크리스천이 술을 마실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면, 술을 먹은 당신은 죄를 지은 것이란 이야깁니다.


바울은 ‘네가 가진 지식을 따라 행동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라.’ 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자신들만의 원칙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에 대해 질타하면서 이것이 아니란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럼 잠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토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8장 1절에 고린도교인이 “우리는 다 지식이 있다. 우리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우리는 배운대로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자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신앙의 원칙은. 당신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의 선택이 다른 이에게 잘못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 하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서는 자신의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에 술자리를 올리는 크리스천이 계실 겁니다. 만약 이 글을 보신다면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질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보는 곳에 이를 올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만약 한 명이라도 여러분이 올린 술자리의 사진을 보면서, '술은 마셔도 되는거구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길 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고기를 먹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목사로서 술을 마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많은 사람들앞에서 술을 마신다면 분명 상처를 받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술뿐이 아닙니다. 제사상에 놓였던 음식은 어떤가요? 먹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10장 27절을 보면, 불신자 중에서 누군가가 배고픔으로 인해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라는 제한을 한다면,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그것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 시원하게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전 여러분이 부부끼리 술을 마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것이 죄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지만 술로 인해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었다면, 또는 아내와 남편, 둘 중의 하나에게 상처가 되게 하였다면 술을 먹지 마십시오. 이는 죄이며 그런 의미에서 술은 여러분의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 될 것입니다. 회사원들끼리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중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가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천은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것이고, 별 문제 없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한다면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어떤이는 술을 마시는 이를 보며 한 소리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크리스천이라 하여도 정죄하거나 위선자로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이 또한 죄입니다.


이 말이 나온 이유는 고린도에서 지식 있는 사람들이 지식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자 바울은 약한 자 편에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크리스천 중 누군가 술 마시는 자들을 비하하며 “네가 크리스천인데 어떻게 술을 마실 수 있는가?”라고 당신이 정죄한다면 사도바울은 나도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칙이 있다해도 그들을 조롱하는 원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볼 때 위선이란 것입니다.




3) 성경에서는 술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구약과 신약을 통털어 술이 상징하는 것은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술은 사실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입니다.
이사야 25장 6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에서 온 백성을 위해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가장 좋은 음식과 잘 익은 포도주와 맛있는 고기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등등 많은 성경구절에서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술이 없다는 것이 저주와 고난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신명기 28장 39절을 보면 “포도밭을 아무리 열심히 가꾸어도 벌레가 먹어 버려 포도도 따 먹지 못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못할 것이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4장 26절을 보면 “소든 양이든 포도주든 묵은 포도주든 아무것이나 여러분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여러분의 가족과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시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술이라는 것은 귀하고 좋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도 즐겁게 받으신다는 것이며 가족들과도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라는 내용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포도주를 즐기셨지요. 누가복음 7장 34절을 보면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술에 대해 아주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루터’도 술을 좋아했고, 신학자이자 개혁신학자인 ‘로이드 존스 목사’도 술과 담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보는 것보다 술을 더 좋아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본 후 그는 술과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술 먹는 크리스천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성경에 예가 이런 것이지요. “성경을 보니 술을 마시고 술은 취하지 말라더라.”는 것인데요. 이 말의 뜻을 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그 당시 문맥에서 보면, 이 말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헬라어로 ‘술 취함(메다이)’은 ‘방탕함(토다이)’과 함께 언급되면서 무절제한 방탕한 삶을 멈추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의 부분을 이야기 하는 것이 크다는 것입니다.




4) 결론


전 교회에서 무작정 술을 마시지 말라는 설명은 21세기에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설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의 바른 문화를 위해 술 문화를 개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음주에 관해 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술을 마음껏 마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술로인한 문제는 이미 이 사회에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술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고 금주라는 전통에 대한 중요한 인식을 성도들에게 교육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조건 정죄하고 죄라 판단하기 보단 지금의 술 문화에 대한 절제를 가르칠 수 있는 올바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지금의 크리스천들에게 술에 대한 대안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날로 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가운데 술 문화를 접하게 되고, 오히려 크리스천들이 세상인들과 함께 타락되어가는 현상을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초창기 술에 대해서 잘못된 문화를 이야기하고 이를 고쳐왔듯, 술에 대한 문화가 정죄적 선언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 아래, 술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신입생 때나, 입사 시 술을 안 마신다는 것에 대해 손해를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논리는 기독교적으로 볼 때는 위험합니다. 회사든 어디든 따라가선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안되지만, 나로 인해 다른 이가 갈등할 수 있다면, 그러한 표현과 행동을 자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유익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는 것”이 궁극적인 바울의 주장입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나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술을 마심으로 다른 사람이 유익해 질 수 있느냐? 아니냐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하단 것입니다.

바른 기독교인의 신앙과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에 올바른 말씀과 신앙으로 정결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