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세상의 끝 그네’를 탄 박웅씨. 박웅씨 제공
1.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세상의 끝 그네’를 탄 박웅씨. 박웅씨 제공
‘수능 대신 세계일주’ 나선 박웅씨
수능을 2주 앞둔 고3 시절. 학교에 더이상 가지 않고,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어공부를 했다. 두달 뒤. 모은 돈으로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 갔다. ‘세계일주’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학을 가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고 20대의 80~90%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 ‘똑같은 게임’을 하는데 그 안에서 뚜렷한 주관 없이 가다간 답이 안 나올 거 같았다. 오히려 내 맘대로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3 시절, 수능 2주 앞두고 호주행
돈벌어 1년간 6대주 24개국 돌아

‘남들 다 가는 대학 꼭 가야 하나’
‘내 맘대로 살아보자’ 떠난 여행길
내 행보, 다른 이들에게 영감 주었으면

2. 칠레 아타카마에서는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과 코파아메리카컵 결승을 함께 봤다. 박웅씨 제공
2. 칠레 아타카마에서는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과 코파아메리카컵 결승을 함께 봤다. 박웅씨 제공
지난 12일, ‘수능 대신 세계일주’를 떠나 지구 한 바퀴를 빙 돌아온 박웅(21)씨를 서울 사당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달여 전 귀국했다는 그는 아직 ‘여행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2014년 1월13일. 한국을 떠난 ‘고딩’이 호주에서 구한 첫 직장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청소업체. 두 달 뒤 월급 150만원을 떼였다. 박씨는 “고3 때와 비교도 안 되게 절박했던 시기였다. 하루종일 일하고 잠잘 시간에는 이력서를 썼다”고 말했다.

다행히 청소했던 경력으로 브리즈번의 한 호텔에 취직했다. 6개월간 객실 청소와 서빙을 해 당시 호주달러 기준으로 2만달러(한국 돈으로 1900만원가량)를 벌었다. 같은 해 12월. 뉴질랜드로 떠났다. 세계일주의 ‘시작’이었다. 짐은 배낭 하나에 보조가방 두개. 20킬로그램가량 됐다.

1년 동안 6대주 24개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 쿠바, 멕시코, 콜롬비아 등을 다녔다. 중남미에는 9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는 가장 기억 남는 나라는 “쿠바”라며 “여행은 ‘사람빨’”이라고 말했다. “여행은 장소보다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쿠바라는 나라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유쾌하고 재밌었다.”

 3. 볼리비아 수크레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박씨. 박웅씨 제공
3. 볼리비아 수크레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박씨. 박웅씨 제공
외국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학교 다닐 때 수학은 못했는데 영어는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라 열심히 했다. 공부해두면 써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스페인어였다.”

박씨는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지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쿠바와 볼리비아에 머무는 동안 스페인어도 배웠다. “남미에서 짧으면 8시간, 길게는 30시간을 버스로 이동했다. 혼자 다니니까 노트를 만들어서 버스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스페인어로 어설프게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됐다.”

학창 시절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던 박씨가 세계일주를 하게 된 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만드는데 그 가운데 세계일주를 적는 이들도 많다”며 “나도 그랬고,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행동에 옮겼다”고 했다.

 4.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돌아온 박씨.  박웅씨 제공
4.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돌아온 박씨. 박웅씨 제공
그는 무엇보다 여행을 하며 “인생도 계획대로 안 되고 여행도 준비한 대로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거나 예약한 비행기를 놓쳐 추가로 100달러를 내기도 했다. 고장 난 노트북을 수리하는데 정품 부품을 바꿔치기 당해 한국에 돌아온 뒤 몇 배의 돈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할 거야’라고 마음먹은 걸 직접 해보는 경험은 크다. 앞으로 내가 원하고 노력하면 될 거라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여행을 떠날 당시 부모님 외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설레발은 필패’라는 평소 생각 때문이었다. 돈을 모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고 여행계획도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때였다. “호주에 가면서 연락을 끊었다가 여행 시작 전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공개했다. 흔적 없이 사라져 그동안 주변에서 내가 ‘자살했다’, ‘실종됐다’는 소문이 돌았다더라.”

5. 볼리비아의 아마존 숙소 앞에서 악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박웅씨 제공
5. 볼리비아의 아마존 숙소 앞에서 악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박웅씨 제공
그의 생생한 여행담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fromtheplanet)에서 볼 수 있다. 페이지 정보에 ‘수능을 앞둔 고3이 가출한 이야기에요’라고 쓰여 있다.

부모님은 박씨를 믿고 지지해줬다. 엄마는 “이왕 가는 거 도중에 포기하거나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평소 할 일 똑바로 안 하고 정신 못 차렸으면 나를 못 믿었을 거다. 내가 노력해서 결과를 보여주면 부모는 그만큼 나를 믿는다.” 물질적 지원보다 부모의 신뢰와 지지가 더 큰 힘이 된 셈이다.

청소년들 가운데 방학을 맞아 여행학교에 가거나 캠프를 떠나는 학생이 많다. 그는 “억지 여행은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딱히 가고 싶지 않은데 ‘여행을 가서 또 다른 나를 찾고 세상 보는 눈을 넓혀보라’는 당위적 압박 때문에 가는 건 좋지 않다. 베이징 가서 남들이 천안문을 다 봐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 싫으면 안 가는 거다. 자신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냥 내키는 대로 떠나라.”

박씨에게 ‘대학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학생들, 그 길이 유일하며 반드시 가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한마디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직접 살아봐야 알 텐데, 내 말을 맹신할까봐 망설여지기도 하고, 딱히 해주고 싶은 말도 없다”고 했다.

“굳이 대학을 안 간 이유를 찾자면 학벌을 뛰어넘고 싶어서다. 학벌에 집착하는 건 그게 있어야만 잘되고 대학에 안 가면 망할 거 같다고 생각해서다. 즉, 학벌로 인간을 판단하고 그게 없으면 나 자신이 증명이 안 된다는 의미다. 거기에 흔들리지 말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씨는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대학을 안 나온 자신이 앞장서 학벌주의에 대한 인식의 균열, 틈을 만드는 것이다. 학벌을 지나치게 따지는 것은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난 ‘시대운’이 좋은 거다. 10년 전이었다면 ‘또라이’로 묻혔을 텐데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온다”며 “지금은 멋있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오랫동안 내가 성과를 안 보이면 그 사람들이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라고 말했다.

“대학 안 가도 소신대로 밀어붙여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한다. 내 행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같은 애들이 많이 나오면 지금보다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