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노래 인생 30년, 아티스트 홍순관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나처럼 사는 건', '조율', '쿰바야', '쌀 한 톨의 무게', '귀천', '십자가' 등 울림 있는 노래를 부른 홍순관이 신보를 발매했다. 10번째 정규 앨범 '저기 오는 바람'과 함께 동요 앨범 '엄마 나라 이야기'를 함께 들고 나왔다. 발매 기념 콘서트도 한다. 5월부터는 해외에 있는 한글 학교를 순회하며 공연한다. 찾아가는 '동요 콘서트'를 하기 위해서다. 3년간 세계 곳곳에 있는 동포들과 만나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릴 생각이다.
볕이 좋은 4월, 이야기를 듣기 위해 홍순관을 만났다. 인터뷰하는 날 신보가 나왔다. 홍순관은 이야기 도중 "도착했다네, 앨범이"라고 말했다. 그는 앨범 사진을 보여 주며 특유의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간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고 앨범을 냈겠냐마는, 7개월간 녹음실에서 살며 만든 앨범을 보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볕 좋은 4월, 10번째 정규 앨범을 발매한 음유시인 홍순관을 만났다. ⓒ김선식 |
7개월간 버티며 만든 앨범
'춤추는 평화' 이후 7년 만에 앨범을 냈다. 2년 전부터 내고 싶던 앨범이다. 미술 전공을 살려 철조·서예 작품전을 준비했다. 작품을 팔아 앨범을 만들 생각이었다. 서예전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음반 제작할 수 있는 금액이 모였다. 그러던 차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교회에도 현장에도 공연이 없었다.
지금껏 해 온 게 노래밖에 없었다. 그는 제작비로 모은 돈을 살림에 보탰다. 여전히 앨범을 내고 싶었다. 1년이 지나고 남은 돈을 녹음실에 보냈다. 그렇게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늪'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뮤지션'이자 '가장의 위치'에 있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7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번 앨범을 만들었다. 자작곡 앨범이다. 1989년에 낸 첫 앨범 '새 날개' 이후 처음이다. 작곡을 해 왔지만 주로 작사에 집중했다. 주변에 작곡가가 많았다. '굳이 나까지 작곡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며 노랫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쉰 넘어 자작곡을 만들며 생각이 달라졌다.
"이번에 곡을 쓰며 '젊었을 때 진작 쓸 걸'이란 생각도 들었다. 역시 내 곡은 내가 써야 맛이 나는 구나. 내가 내 느낌을 가지고 쓴 거니까. 나도 물론 듣기 좋다."
신앙 담긴 노래, '저기 오는 바람'
이번 앨범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건한' 노래가 많다. 반면 한국 기독교가 말하는 메시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래도 몇 곡 있다. 기도를 주제로 한 노래다. 노랫말을 보면 이렇다.
내가 드린 기도로 꽃이 피진 않는다.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지는 않는다.
내가 드린 기도는 노동처럼 오래 걸린다.
내가 드린 기도는 노을처럼 아침을 기다린다.
기도하면 된다, 반드시 이뤄진다고 가르치는 교회 입장에서는 도발적인 이야기다. 어떤 목사는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이 노래에는 홍순관의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에게 기도는 노을처럼 내일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지, 아침을 빨리 오게 하고 꽃이 피게 하는 촉진제가 아니다.
▲ 홍순관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신의 신보 '저기 불어오는 바람' 이야기보다는 한국교회가 놓치고 있는 예배음악에 대한 문제점을 짚었다. ⓒ김선식 |
'동시대' 빠진 오늘날 CCM
화제는 자연스럽게 한국교회 안의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으로 이어졌다. 홍순관은 '동시대'에 끌려 외면당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노래했고, 기존 기독교음악에서는 낯선 장르에 도전했다. 홍순관은 이를 본인의 사명으로 여겼다. 정신이나 문화는 한 번 사라지면 아무리 부지런히 복원해도 40~50년은 걸린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시대가 배제된 기독교음악을 살리기 위해 국악을 도입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노랫말을 피했다. 국악을 하니 굿 음악이라 손가락질 했다. 자연을 노래하니 범신론자 딱지를 붙였다.
"바위에 계란 치기도 아니고 허공에 계란 치기였다. 그래도 20~30년 전부터 국악으로 노래 부르고 일반 용어를 쓰는 게 내 사명이었다. 가스펠은 교회 안에 갇힌 노래가 아니니까.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온 예수는 당시 신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썼던 '아람어'를 썼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썼다는 게.
지금의 CCM은 우리끼리만의 가사를 쓴다. 비기독교인이 들으면 용어 자체가 생소하다. 그러면 우리끼리의 노래가 된다. 가스펠이라는 건, CCM이란 건 그런 게 아니다. 대중, 동시대를 향해서 하는 노래다. 우리는 컨템포러리 마인드(contemporary mind)가 없다.
오래 걸리지만 씨앗을 심어 놔야 죽지 않는다 생각했다. 나는 '땅 속에 흐르는 물'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물은 냇물도 되고 강물도 되고 바다도 된다. 사람들은 위에 흘러 눈에 보이는 물만 보고 평가한다. 그러나 땅 속에 흐르는 물이 중요하다. 이게 없으면 땅 위로 흐르는 모든 물이 끊어진다. 강으로도 안 가고 바다로도 안 간다. 아무도 땅 속에 흐르는 물은 알아주지 않는다. 알아주지 않아도 해야 한다. 그게 운동이고 그게 예수 제자의 모습이다."
▲ 그의 신앙 기저에는 '연민의 예수'가 있다. 10대 때 윤동주 시 '십자가'를 보고 예수의 장르를 알았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리라'를 읽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았다.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자리가 아닌 시선이 모이지 않는 곳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하던 홍순관은 "윤동주 시인이 원수이자 내 스승이지"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김선식 |
땅속에 흐르는 물처럼
이런 마음으로 꾸준히 노래 운동을 해 왔다. 사람들 시선을 잘 모이지 않는 곳으로만 다녔다. 젊은 시절, 예선 없이 대학가요제 본선에 보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방송 출연 제의도 거절했다. 텔레비전을 뚫어야 성공한다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 정호승, 정희성 시인과 싱어송라이터들이 모여 시노래 운동 '나팔꽃'으로 10년을 활동했다.
90년대부터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거리의 악사가 됐다. 1994년 '위안부' 최초 증인 김학순 할머니가 말했다.
"노래하는 사람이 도와준 건 처음이다. 왜 배운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할머니 말은 그를 10년간 길 위에서 노래하게 만들었다. 엄청난 무게의 가르침, 삶을 담은 교훈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평화나 자연처럼 잘 팔리지 않는 주제만 골라 노래했다.
노래 인생 30년. 돈이 되지 않아도 이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때문이다. 어린 시절, 연민의 예수가 홍순관을 붙잡았다. 그가 만난 예수는 대중에게 드러나기보다 조용히 사그라드는 사람이었다. 번뇌와 고민으로 가난한 사람, 여자와 아이를 품는 스승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주의가 더 강력해질수록, 노래 부르는 게 어려워진다. 아무리 불러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분이 내 스승이니까 이렇게 하는 거다. 스승이 아니었으면 벌써 딴 길 갔을 거다.
18~19살 때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장르라는 걸 알았다. 윤동주의 '십자가'를 읽었다. 그게 내 삶의 화두가 되었다. 윤동주가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라'고 했다. 그냥 흘리라도 아니고 조용히 흘리겠다, 다른 사람 모르게 조용히. 감수성 풍부한 그때 십자가를 읽으며 몸에 전율이 흘렀다.
예수의 장르를 알고 나니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었다. 나라고 왜 젊은 날, 박수 받으며 노래하고 싶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 5월부터는 해외 이주민 사회를 방문한다. 찾아가는 콘서트다. 한글 학교나 교회를 중심으로 모국어로 된 동요를 부를 예정이다. ⓒ김선식 |
공연이 필요한 곳이면 간다
5월부터 미국의 뉴욕, 시카고, 워싱턴을 시작으로 해외 투어 공연을 한다. 주제는 '엄마 나라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이 주제로 다문화가정 이야기를 다뤘다. '위안부' 문제를 오래 다뤄 온 홍순관은 일본군이 한국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듯,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들에게 한 짓을 듣게 되었다.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사실을 인정하라, 배상하라" 10년 넘게 외쳐온 그는 한국군 범죄를 알고 나서 마음의 빚을 느꼈다.
'엄마 나라 이야기' 공연을 시작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엄마 나라는 단지 돈 보내는 나라가 아니고 우리처럼 아름다운 문화가 있는 나라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다.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공연에서 평화 노래를 부르고, 베트남 동화 구연을 보여 줬다.
이제는 한국 안 다문화 가정이 아니라,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공연한다. 교회와 한글 학교를 중심으로 이주민 사회를 방문한다. 홍순관은 그간 이주민 사회의 문제점을 많이 목격했다. 엄마보다 현지어를 더 잘하는 아이는 엄마와 말을 섞지 않는다. 엄마 발음이 어눌하다든지, 아이가 빨리 말하면 엄마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거다.
"90년대에 '위안부' 공연을 하면서 해외 동포 사회를 속속들이 봤다. 미국에서 미군이랑 결혼한 한국인 가정에 갔다. 주일이 되면 비극이 생긴다. 남자는 아침에 미국 교회, 여자는 한국 교회에 간다. 애들은 갈라져 부모를 따라간다. 언어나 문화 문제로 아직도 이렇게 산다.
소수민족의 삶 자체가 슬프다. 외국에 한국어 모르는 우리 아이들이 많다. 모국어로 된 동요를 들려주고 싶다. 동요는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다."
▲ 홍순관은 바쁘다. 앨범 발매와 함께 4월 28일(목)에 열리는 '저기 오는 바람' 콘서트, 5월부터 해외에서 시작하는 '엄마 나라 이야기' 동요 콘서트 준비가 한창이다. 홀로 이 모든 걸 준비한다. 힘들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간다. ⓒ김선식 |
힘들더라도 가고 싶다
2016년 홍순관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앨범은 발매됐고, 4월 28일 열리는 '저기 오는 바람' 콘서트 준비도 한창이기 때문이다. 해외 공연도 코앞이다. 아직 일정이 다 짜이지는 않았다. 많은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좋겠지만 갈 곳이 많지는 않다. 스폰서도 없다. 기획이며 섭외며 모든 일정을 혼자 준비한다. 버겁기도 하다. 그렇지만 포기할 순 없다. 힘들더라도 조용히 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앨범 구매 및 콘서트 예매 바로 가기: http://www.hongsoongwan.com
최유리 cker333@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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