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그리고 멋(펌)

자본에 밀려 비어가는 도심... 독서의 향기로 채우죠

moonbeam 2016. 7. 6. 14:05



약속 시간이 좀 이르다. 일요일 오전이라 지나는 사람조차 없다. 청주 무심천변에 차를 놓고 ‘북클럽 체홉’이 있는 남주동 골목을 잠시 걷기로 한다.


일없이 골목마다 내키는 대로 기웃거린다. 어릴 적 자랐던 서울 약수동 골목 같다. 유서 깊은 동네에서는 아무도 절대 길을 잃지 않는다. 바둑판처럼 길이 반듯하고 찍어낸 듯 집 모양이 엇비슷한 새 동네에서나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오래된 동네에 가면 차라리 지도를 버리는 편이 낫다. 발길로 길을 잇고 눈썰미로 구별해야 한다. 눈길 끄는 것들로 골목 이름을 붙이자. 은행나무 길, 연탄재 길, 빨강대문 길, 빨랫줄 길, 동네슈퍼 길, 낙서 길…. 자주 집으로 막히고 얼기설기 얽혀 복잡해 보여도, 이런 골목은 몸을 늘 다른 골목들로 옮겨준다. 주변을 살피면서, 천천히, 슬금슬금, 멀리까지 갔다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북클럽 체홉이 둥지를 튼 청주 남주동의 허름한 건물 외관. 문 앞에 연탄재가 쌓여 있다. 장은수씨 제공

공동화된 도심에 문화를 옮겨 심다

처음엔 깜빡 지나칠 뻔했다. 북클럽 체홉이라 해서 우아한 카페 같은 곳을 연상했다. 결기 있는 선비 소종민씨를 풍문으로 잘 알면서도, 혹여 ‘그새 돈 좀 벌었나?’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응답하라 1988’이다. 추위를 막느라 뽁뽁이를 덧댄 창으로는 사무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문 위로 연통이 삐죽하니 튀어나오고, 한 옆으로 연탄재가 줄줄이 쌓여 있다. 연통을 빼내려고 합판을 덧댄 자리에 녹색 페인트로 ‘BOOK’이라고 휘갈겨 있다. 건물은 낡아 타일이 떨어지고 녹물로 얼룩진 자리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소씨가 말한다.

“2층은 살림집이고 1층은 사무실로 씁니다. 여러 달, 이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전에 있던 사무실은 연극하는 이들과 같이 썼는데, 새로운 모임 자리를 마련하려 할 때 이 건물이 눈에 들어왔어요. 주인에게 연락을 넣어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엔 답이 없더니, 며칠 후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이 저희가 하는 일을 좀 알아보셨나 봐요. 그래서 말도 안 되게 싼 월세로 여기로 옮겼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골목 곳곳에 이가 빠져 있다. 사람의 온기가 돌지 않는다. 본래 여기 근처가 청주의 중심지다. 사람들이 편리를 좇아 새 도시로 빠져나가고 장사하는 가게들도 뒤이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리가 적막하다. 이제는 임대를 놓아도 가게나 사무실이 좀처럼 들어서지 않는다. 정치와 자본이 결탁해 재개발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수시로 내놓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당분간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부심 높은 터줏대감들이 생활에 지쳐 거의 떨어져 나갈 때까지 계획만 발표해 두고 야금야금 시간을 보낼 것이다. 삶의 오랜 터전을 폐허로 만들어 그 가치를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것은 자본의 근본 전략이다. 개발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한 지역 전체를 일단 사람 살기 어려운 곳으로까지 밀어붙이고, 가격이 폭락했을 때 헐값에 사들이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자본의 입장에서, 도심 공동화는 하나의 필연이다.

“서울에서 여기로 내려오면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2000년 가을이니까 벌써 15년이 지났네요. 별다른 연고는 있지 않았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는 영동, 집사람은 보은이 고향이니까 희미한 끈이 있을 정도였죠. 서른여섯 때인데, 안사람과 결혼해서 아기가 막 태어났을 무렵이었습니다. 서울 살림살이가 막막해서죠.”

북클럽 체홉 회원들. 작가와 예비작가를 중심으로 출발한 이 모임에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늘고 있다. 북클럽 체홉 제공

읽기와 쓰기 함께 하며 작가 배출

체홉을 이끄는 소씨는 문학평론가로서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아내인 소설가 윤이주씨와 소설 창작모임에서 만나 연분을 맺었다. 처음 내려왔을 때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은 소설가 김남일씨다. 호구를 위해 청소년 논술 모임을 여는 한편으로 지역에서 소설과 동화를 쓰는 이들과 함께 창작합평모임을 시작했다. 서울과 광주에서도 사람들이 와서 합류했다. 같이 쓰고 같이 읽고, 치열하게 말을 섞으면서 실력을 다지고 포부를 나누었다. 인심 넉넉한 부부는 그때마다 기꺼이 신혼집을 내주었다. 모임의 처음 이름은 ‘책과 글’이었고, ‘멧새통신’이라는 인쇄물도 찍어내 문학적 갈망에 값하는 기염을 토했다. 책읽기와 글쓰기가 같은 비중을 갖는 공동체 체홉이 청주에 뿌리를 내렸다. 윤씨가 말을 거든다.

“모임을 거쳐 많은 이가 등단했어요. ‘시간을 파는 상점’의 김선영씨, ‘사춘기 가족’의 오미경씨, ‘제리’의 김혜나씨 등이 같이 공부했지요. 시인 겸 평론가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민씨도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합평을 주로 했지만, 세계문학의 명작도 함께 읽었습니다. 읽지 않고 쓰는 건 어려우니까요. 2002년에 노벨연구소가 선정한 ‘세계문학 100선’이 발표되었는데, 작품들이 좋아서 한 권씩 같이 읽어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책읽기 비중이 서서히 늘어났죠. 읽기의 매력에 푹 빠졌죠.”

체홉이라는 이름은 2012년부터 달았다. 별다른 계기는 없었다. 부부는 언젠가 작가 이름을 붙인 공간이 갖고 싶었다. 영화 ‘비포 선셋’에 나오는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마음속 모델이었다. 그런 서점을 여는 일은 아직도 부부의 꿈이다. 발목을 잡은 것은 언제나 돈이다. 소씨가 말한다.

“벌써 청주에서 다섯 번째 자리입니다. 가장 살 만한 곳을 찾아서 바퀴벌레처럼 옮겨 다녔죠. 율량동, 수동, 문의, 남주동 등. 고은 선생의 초기 시 ‘문의 마을에 가서’로 유명한 문의에서는 우사를 개조한 서재를 마련해서 모임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쇠똥 냄새가 미처 가시지 않은 곳이었죠. 머무르던 곳에서 옮기게 되는 것은 항상 재개발 탓이었죠.”

자발적 가난 속 작은 사치가 체홉이라는 이름이다. 외래어 표기로는 체호프가 맞지만 일부러 체홉이라고 적었다. 어감이 더 상냥하고 따스하단다. 체호프의 기일에는 사진도 걸고 낭송도 하고 전시도 하고 싶다. 아직은 모두 꿈에 가깝고, 지금은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데 집중하는 중이다. 윤씨 목소리가 낭랑하고 힘 있다.

“카프카의 ‘공동체’라는 글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를 만났죠. 저희는 이 숫자를 좋아합니다. 체홉을 거쳐서 간 사람이 100여 명이 넘습니다. 소모임까지 모두 합치면 지금도 열다섯에서 스무 명 정도 모입니다. 하지만 다섯이면 충분합니다. 이 숫자면 모임을 죽을 때까지 계속할 수 있습니다.”

책 읽기에서 다른 삶을 창조하다

읽기에서 쓰기로 가는 게 보통이다. 쓰기에서 읽기로 들어서는 모임은 흔치 않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 모이지만, 수시로 마실 나오는 이들이 있어서 번개 모임을 뛰는 경우도 잦다. 따로 규칙은 없다. 발제도 하지 않는다. 책을 가장 열심히 읽은 회원이 자연스레 모임을 이끌어간다. 수다나 친목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작품의 세부에 깊게 주목하는 게 유일한 강제다. 홀로 읽을 때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구절들이 끌려나오면서 대화를 ‘촉발’한다. 소씨 어조에 열이 깃든다.

“촉발은 ‘홀로 읽기’보다 ‘같이 읽기’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어떤 책이든 자기 목소리로 들리는 구석이 반드시 있죠. 그 부근에 집중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각자 읽은 것이 연결되면서 대화가 폭발하곤 합니다. 봇물이 둑을 넘듯, 다른 이들의 읽기 속으로, 삶 속으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감각과 사유가 생겨나는 걸 느낍니다.”

촉발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한테서 온 말이다. 마주침을 통해서 하나의 삶 속에 다른 삶을 창조하는 일이다. 닫힌 내부에다 외부를 삽입하고 막힌 안쪽에서 너머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문리(文理)가 탁 트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음이 곧장 시원해지면서 책의 비의(秘意)가 이해되면서 삶에 수용되는 순간이다. 같이 읽는 중에 삶을 새롭게 하는 데 필요한 작은 밑천이 생겨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일요일 오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윤씨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사방에 가득한 책들에 가 닿는다.

“시간 되면 무조건 시작합니다. 책을 가장 잘 읽은 회원이 계속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대개는 각자 할 말이 많으니까 한 사람이 독주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틈을 잘 채지 못하면 한 마디 얹기가 상당히 어려운 편이죠. 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감동도 가장 컸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전체한테 도움이 됩니다. 말하는 이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충분히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고, 듣는 사람은 총명함의 미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총명한 사람입니다.”

북클럽 체홉 회원들이 올해 초여름 청주 무심천의 인도교에서 벌인 헌책 장터. 갖고 나온 책을 완판한 회원도 있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북클럽 체홉 제공

지향은 없지만 자발적인 공동체

작가와 작자가 많아서인지, 신뢰가 서로 대단하다. 빌미를 잡으려고 다투는 모임 풍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작자는 아직 등단을 하지 못한 예비 작가를 말한다. 하지만 합평이 줄어들면서 일반 시민들 참여도 점차 늘고 있다. 채식주의자, 전업 주부, 타로카드 상담가, 영문학 박사, 스페인어 강사, 도시공학도, 협동조합 대표 등 문인 중심에서 책읽기가 절박한 이들로 다양성이 점차 늘고 있다. 소씨가 말한다.

“모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우정의 연대를 경험합니다. 모임에서는 ‘공동체 없는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공동체의 인위적 지향은 갖지 않되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서로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 동네는 사실상 죽어 있습니다. 상권도, 사람도 흩어져 버렸죠. 초여름에 각자 책을 싸들고 나와 무심천 위 인도교에서 헌책 페어도 했습니다. 완판을 한 회원이 있을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죠.”

어찌 보면 부부의 오랜 꿈인 서점을 향한 첫 발을 뗀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공동화라는 자본의 책략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의 이주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빈 건물을 싸게 임대하는 등 공간을 내주면 예술가들은 서서히 주변을 아름답게 바꾸어 간다. 매력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동네에 이식한다. 뉴욕의 브루클린이나 서울의 상수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이 문화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났다. 자본을 좌절시키고 본래 주민에게 터전을 되돌려줄 길은 그 방법밖에는 솔직히 없다. 나중에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없도록 할 필요는 있지만, 북클럽 체홉이 우선 앞길을 열었다. 누가, 어떻게 뒤를 이을 것인가?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