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500년의 최대 실수 중 하나는 설교를 직업화하고 특권화한 것이다. 개신교의 문제들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듯 보이나 사실 그 실체의 근원에는 '성직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성직주의가 튼튼히 성장할 수 있게 한 기본 토양은 극심한 설교권 독점에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나마 침례교회가 평신도 설교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반면 나머지 대다수 다른 교단들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느 유명 목사는 "설교는 전문가인 목사에게 맡겨라"고 주장하면서 평신도 설교는 마치 "왜 의사만 수술하느냐, 나도 한번 째보자"는 식이다는 논조로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허나 이는 다소 웃기는 논리다. 역으로 말하자면 성경에는 가난한 목수도 설교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도 설교하고, 그리고 분야가 전혀 다른 의사도 설교했는데 무슨 전공을 탓한다는 말인가. 고작 신학교 몇 년 공부한 것으로 정말 예배당 강단에 그렇게 높은 담을 쳐야 마땅한 것인가. 이들은 목사가 아니어도 설교에 뛰어난 은사가 있는 성도가 많다는 사실을 왜 굳이 외면할까.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설교는 은사이지 직업이 아니다.
목사만 설교하는 교회
아무튼 개신교는 공교회를 소위 목사만 말하는 이상한 공동체로 만들어 놓았다. 사제만 말하던 중세 교회와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목사만 선포하고, 목사만 가르치고, 그리고 목사만 홀로 주장한다. 반면에 설교에 오류나 변질이 있을 때 이를 시정하고 교정할 만한 제도적 장치는 매우 빈약하고 부실하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예배당 강단은 담임목사의 안방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목사들은 귀중한 공적 설교 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또한 해선 안 될 말까지 다 하고 있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목사님 말씀'을 마치 '하나님 말씀'처럼 포장하는 행위다.
더구나 굳이 일부러 포장하지 않더라도 장기간 한 설교자에게 집중적으로 세뇌된 맹신도들은 그 둘을 제대로 구별 못 한다. 그들 대부분에게 성경은 어렵고 멀지만 설교는 친숙하고 가깝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쩌다 읽고 설교는 매주 듣는다. 아니 설사 매일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맹신으로 눈먼 신앙은 방주와 해적선을 잘 구별 못 한다.
물론 신실한 설교자만 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러나 과연 모든 설교자들이 한결같이 신실할까. 아마 목회자들 자신조차도 그렇다고 쉽게 답하지 못 할 것이다. 개신교의 일시적 흥행과 신학교의 과도한 난립으로 이젠 누구도 개신교 설교자의 자질을 장담하지 못 할 형편이 되었다.
교회의 양극화는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교회의 공신력이 급격히 하락하여 신도는 줄고 있는데 목회자는 오히려 늘었다. 그 바람에 개척 교회는 거의 고사 직전이고 대형 교회만 영적 비만아가 되어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 미자림 교회는 배가 고파 주리고 있건만 대다수 대형 교회는 넘치는 돈으로 자기 배를 섬기고 있다.
그러니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누구에게 줄 수 있겠는가. 가라지 목회로 대박을 쳐서 성공한 일부 삯꾼들은 너도 나도 뒤질세라 팔푼이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넘겨주고 있다. 더욱 한심한 건 이런 교회사적 엽기 행각이 유독 전세계에서 오로지 한국에서만 빈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속의 평신도는 설교했다
이는 목사가 교황이 되고 목사가 교주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일 목사에게 설교권이 독점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이런 배도한 일이 가능했을까. 전혀 아닐 것이다.
교회의 월권과 변질은 교인들이 주도한 게 아니다. 그 주범은 목회자다. 이런 현실을 빤히 알면서도 평신도 설교권을 제한하자는 자들은 누구일까. 바로 개신교의 교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교회 강단을 자신들 권력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요새화했다. 이들은 신학이란 고상한 이름을 이용하여 말이 될듯 말듯한 갖은 명분을 다 짜내며 공교회의 강단을 사유화했다.
하지만 성경의 평신도는 설교했다. 스데반과 빌립은 선지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그리고 목사도 아니었지만 좋은 설교를 했다. 그들의 설교는 결코 사도들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빌립은 세례까지 베풀었다.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성령이 충만한 장로나 집사가 설교하는데 설교권이 있느니 없느니 따지는 것은 매우 유치한 이야기다. 이런 시비는 마치 직업 가수만 노래를 해야 한다는 억지만큼 편파적인 아집과 같다.
루터와 칼뱅의 최대 실수는 목사직을 직업화하고 설교직을 특권화한 것이다. 비록 그 시대적 상황이 그게 어느 정도 필요했다는 걸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설교의 특권화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성경을 직접 기록한 사람들조차 신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많았건만 오직 신학을 전공한 목사만이 그 성경을 설교할 수 있다는 발상과 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굳이 애써서 부연하지 않더라도 이미 스스로 자증하고 선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교란 이미 선포하신 말씀을 나누고 가르치는 행위이지 설교자가 새로운 내용을 창작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너무 멋진 설교하려고 애쓰지 말기 바란다. 그건 자연 식품에 인공조미료를 듬뿍 뿌리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엔 더 맛있게 느끼나 결국엔 몸을 크게 해친다.
요즘은 목회업자들이 생산한 화학 조미료에 쩌든 공해성 설교가 너무 많다. 어떤 설교를 보면 그저 성경 몇 줄 읽어 놓고 나머지는 온갖 잡설로 도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단순히 성경만 읽거나 풀어주면 흥행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갖은 잡설을 다 섞어서 "잘 먹고 잘살자"고 바람을 잔득 넣어주어야 청중이 몰린다. 그러니 목사는 자기 밥값을 하려고 온갖 개인기 다 발휘해서 감동적인 설교를 하려 몸부림친다.
설교권은 공동체의 고유 권한
이게 바로 설교가 직업화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평신도들의 무공해 설교는 감동을 주려 애쓸 필요도 없고 멋지게 장식할 필요도 없다. 단지 성경의 가르침만 충실히 잘 전달하면 된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이란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서 저절로 나오는 거다.
이는 모든 평신도가 꼭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또한 목사는 설교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설교를 지나치게 특권화하거나 독점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공동체가 인정하는 경우 평신도도 설교자로 세우자는 것이다.
악보를 볼 줄 아는 전문가가 작곡하거나 노래하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악보를 볼 줄 몰라도 전문가보다 더 작곡을 잘하고 노래도 가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교회 강단을 담임목사가 홀로 쥐고 있으니 언제나 소통이 부족하고 교인이 맹신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설교자가 강단에 서면 교회가 맹신화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상당수 담임목사들은 심지어 부목사들의 설교도 심하게 제한하고 있다. 어쩌다 부목사가 자기보다 설교를 더 잘하면 격려는 못 해줄 망정 그걸 도저히 못 참는다. 대개는 반드시 내쫓는다. 이러니 교회가 사유화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이다.
사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전도에 자격증이 필요 없는 것처럼 설교도 마찬가지다. 과연 설교가 없는 전도가 얼마나 가능할까. 그러니 설교란 특정 인간이나 단체가 발행한 자격증이 꼭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게 결단코 아니다. 빌립은 자격증을 가지고 설교한 게 아니다. 목수 예수와 어부 제자들도 신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회당에서 설교한 게 아니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평신도에게 성경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교회는 계속 불의와 부패로 고통받고 있다. 중세 악마는 아직도 개신교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제2의 종교 개혁은 평신도에게 설교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설교권의 회복이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교회 회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5-8)."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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