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원로 신학자인 어느 목사님의 쓴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이 신학대학 교수 시절 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한 후 밖으로 나오다가 본의 아니게 뒤에서 걸어오시던 할머니 두 분의 대화를 들었다고 한다. 한 분이 "오늘 목사님 설교 알아듣겠어요?"라고 하니, 다른 분이 "우리같이 무식한 노인이 어떻게 박사이신 목사님의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요." 이런 대화를 듣게 된 그 목사께서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큰 충격을 느끼고, 그 후로는 아주 쉬운 설교 즉 모든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하기로 굳게 맘 먹었다고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전달자'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은 일부 난해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사실 나머지 대부분은 중고등학생 정도의 독해력만 있어도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과거 선교 초기에 중국에서 만든 한글 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이나, 또는 그것을 조선으로 운반하던 사람들 중에는 호기심으로 성경을 읽다가 회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비록 본격적인 설교나 강해의 도움이 없었지만 그저 하나님 말씀에 스치기만 해도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성경이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자증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경우이든 '설교무용론'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바른 설교는 매우 유익하며 공적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초신자에게는 물론 성숙한 신자에게도 설교는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설교에 오류가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건강한 설교는 거의 대부분 성경적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특정인의 설교를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맹신하는 것은 다소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흔히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고 주장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있다.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즉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니, 현시대의 성도들도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는 대단한 착각이 있다. 목사는 '사도'가 아니다. 우리는 목사와 사도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사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특별 계시를 전하던 아주 특수한 사역자들이었다.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은 나중에 정경화하여 신약 성경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들의 증언을 끝으로 유일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완료'되었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사람의 설교를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만일 누구라도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것은 곧 자기가 새로운 사도나 선지자라는 주장과 크게 다름이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의 설교집이 새로운 성경이라는 주장만큼이나 광오한 억지이다.
'사람의 말'도 들어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이고,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정상적인 설교라면 그 내용 대부분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 또한 옳은 표현이다. 그러나 설교에는 사람의 말과 논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설교 자체가 하나님 말씀은 아니다. "설교 속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있다"는 말과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말은 아주 크게 다르다. 더구나 요즘 오로지 하나님 말씀만 풀이하며 전해 주는 설교가 얼마나 있나. 설사 있더라도, 그 전달 과정에서 견해 차이와 잡설과 오류의 가능성이 늘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배달 사고'가 수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설교무오설'은 '목사무오설'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설교를 하나님 말씀처럼 중시하며 듣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바른 설교라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가 아무리 경건하고 탁월하다고 해도 그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은 무오하고 완전하지만 인간의 설교는 그렇지 못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도식에는 궁극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고, 어떤 경우이든 설교는 그 내용을 문장마다 반드시 검증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설교는 시대에 따라 변한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여성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러나 요즘은 여성 목사가 설교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면 과거의 설교는 잘못이고 현재의 설교는 맞는 것인가. 도대체 어느 것이 하나님 말씀인가. 설교자에 따라 하나님 말씀이 바뀐다는 말인가. 잘 살펴보면 이런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노예제도, 사제제도, 유아세례, 성찬의식, 정치참여, 청부론, 동성애, 교회론, 은사론, 방언, 십일조, 주일성수, 성전주의, 성공주의, 성직주의, 그리고 기복신앙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많은 설교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갖고 서로 다른 설교를 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 완전히 무오류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다. 결국 설교를 무조건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말인지 잘 알 수 있다. 최근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세계의 몇몇 유명 여성 정치인들 있잖아요. 대부분은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고 튼튼한 거구를 자랑하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서의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이럴 때 박수를 안 치시는 분들은 좀 사상이 불순하지 않나 싶다."라고 발언한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조잡한 설교까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수는 없다. 아니면 이런 저급한 설교도 성령의 감화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싶나.
설교는 분별해서 들어야 그래서 설교는 분별해서 들어야 한다. 무슨 조건이나 단서를 추가하든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은 지극히 무모하다. 그것은 설교를 우상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믿어야 하나, '목사님 말씀'을 모두 믿어선 곤란하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성경을 풀이하는 인간의 말과 논리와 이해는 온전할 수 없다. 초기 교회의 뛰어난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신학적 오류는 있었다. 사실 후일 중세 교회의 신학적 변질과 타락에 여러 교부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 또한 개혁자 루터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었다. 심지어 사도들의 말과 처신에도 오류가 있었다. 예수님은 사도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8:33)"고 하셨다. 그런데 어찌 목사가 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따라서 마치 성경의 '축자영감설'처럼 오늘날 설교할 때에 목회자들이 모두 무슨 특별한 영감을 받아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처럼 신의 계시를 직접 대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해이다. 보통의 인간은 무오한 존재가 아니며, 제 아무리 객관적 해석을 위한 노력을 해도 결국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과 결코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어떤 설교가 성경적으로 바른지 아닌지를 판정한다는 것은 지극히 복잡한 문제이다. 일반 교인들 중에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울러 지상의 그 어떤 교단이나 신학자가 객관적으로 설교를 무오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을까. 그럼에도 설교의 정의를 일반화하여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고 요구한다면 그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만약에 그런 논리가 옳다면 이단과 사이비의 설교에도 무조건 "아멘"하라는 말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더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설교는 오용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멀쩡한 대형 교회에서조차 정말 같잖은 설교가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과를 배라고 하면 거짓말쟁이가 되지만, 교회에서는 사과를 배라고 하면 믿음이 큰 자가 된다"는 세인들의 조소까지 나오고 있다. 잘못된 설교가 신도들을 얼마나 큰 맹신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시사해주는 말이다. 기복신앙으로 병든 한국 개신교의 실상 또한 설교 남용의 전형적인 예이다.
'설교 우상화'는 종교적 끼워팔기 물론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귀한 사역이다. 따라서 설교를 존중하며 경청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설교 내용 전체가 '통채로' 모두 하나님 말씀과 동격이라는 식의 주장은 정말 터무니 없는 것이다. 설교자는 진리의 '전달자'이지 결코 하나님의 '대리자'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4:24)"고 말씀하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일보후퇴하여 '바른 설교라면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조건적 표현조차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어떤 경우이든, 설사 인간의 판단으로 볼 때 제 아무리 옳고 바른 설교라고 확신해도, 그것이 절대로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설교자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결국 그가 성경을 쓴 사도나 선지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설교자의 위치는 일반 교인과 특별히 다른 자리가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사도나 선지자의 정신과 사역을 물려받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사도나 선지자의 지위에 올라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사역을 승계하는 것이지, 그들의 신분과 지위를 승계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목사나 장로처럼 회중이 세운 자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사도나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선지자는 선출직도 아니고 세습직도 아니다. 따라서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는 요구는 사실상 '설교 우상화'이다. 그것은 '목사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에 끼워파는 상업적 행위이다. 저들은 굳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사님의 해석'을 양념으로 얹어서 이를 모두 신의 뜻으로 함께 받으라고 한다. 설교 속에는 성경의 내용이 많이 들어있으니, 나머지 부분인 인간의 해석과 군더더기도 안심하고 믿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중세 교황적 설교관과 무엇이 다른가. "성경 해석의 최종 권한을 교황이 갖고 있다"는 중세교회 논리와 바로 직결된다. 단지 교황 대신에 목사가 그 자리를 대체했을 뿐이다. 그러니 순진한 신도들을 홀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상술이 없다. 설교를 우상화하려는 그 속셈은 결국 '목사 우상화'에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통채로 하나님 말씀과 동격으로 인정되는 그 순간 목사는 자연히 하나님의 대언자나 대리자로 승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마땅히 그리스도 교회의 종이어야 할 목사가 상전이 되고, 거꾸로 주의 자녀인 신도들이 앵벌이 종노릇하고 있는 작금의 일부 교회 현실 역시 이 설교 우상화 작업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특별 계시인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았다. 거기에는 더할 것도 없고, 감할 것도 없다. 헌데 성경 외에 무엇을 또 추가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니면 요즘 설교자들은 주일마다 무슨 새로운 계시라도 더 알려주고 있다는 말인가. 성도에게 신구약 성경 외에 더 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란 결단코 단 한 줄도 없다. "현대 교역자가 의식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사도나 선지자의 위치에 서는 과오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 목사 자신이 일반 신자들과 다른 위치에 있는 듯이 자처하게 되면 그는 그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는 평교인과 함께 일반 제사장의 신분일 뿐(벧전2:9) 전혀 차별이 없다. 그는 평교인과 마찬가지로 은사대로 봉사하는 자이다. 교회에는 봉사자가 있을 뿐이고 지배자는 없다." - 박윤선, 개혁주의 교리학, 영음사 2003, p.374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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