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17년의 투쟁’ 성폭력 코치 죗값 묻는 전 테니스 선수의 #미투

moonbeam 2018. 2. 25. 17:30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의 ‘17년 투쟁’
지난 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무실에서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무실에서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성폭력은 강간, 성추행, 언어적 희롱, 성기 노출, 몰래 촬영 등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해치는 폭력입니다. 피해를 겪는 이들은 여성이 95%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많지만 남성 피해자도 늘고 있는 추세죠. 피해자 10명 중 1~2명만이 수사기관에 피해를 알린다고 합니다. 성폭력을 별일 아닌 것으로 묵인하고 방관한 사회구조가 빚어낸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고통스러웠다’ 말하는 #미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용기로 드러난 추악한 현실을 바꿔나가지 않으면, 미래 세대도 현재와 다르지 않은 고통을 겪겠지요. 17년 전 성폭력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며 ‘고단한 사투’를 이어가는 김은희의 이야기를 주목한 까닭입니다.

1991년생 김은희는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다. 20년 동안 테니스 선수로 살았고, 훌륭한 스포츠 지도자가 되길 바랐다. 진로 이야기를 꺼내자, 미소는 옅어지고 그늘이 드리워졌다. 힘들었던 일이 ‘내 탓’이 아닌 ‘당신의 잘못’임을 증명해 줄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17년 전, 김은희를 가르치던 테니스 코치는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너랑 나만 아는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종용된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그는 오랜 시간 홀로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2016년 5월, 절대로 잊을 수 없던 그 얼굴을 마주쳤다.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신세 지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김은희가 짜낸 용기였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피해로 삶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를 살피는 것보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상처를 회복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을 하나의 모습으로 단정 짓는 시선 역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무실에서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문가들은 성폭력 피해로 삶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를 살피는 것보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상처를 회복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을 하나의 모습으로 단정 짓는 시선 역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무실에서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유독 이름이 불리는 게 싫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담임 선생님의 부름이었다. 빈 교실, 교탁 앞 의자에 앉아 말을 이어가던 중년 남자는 제자의 몸에 손을 댔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었다. 이사를 가게 된 덕분에 1만여명이 사는 시골 읍내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이후, 오랫동안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교실에 남은 친구들은 괜찮았을까.

어느 취재원의 사연이 아닌, 나의 이야기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겪은 성폭력은 기억 저 너머로 뿌옇게 흐려졌다가도 부지불식간에 선명해진다. 2월4일 밤 방영된 ‘에스비에스 스페셜: 미투(Me Too) 나는 말한다’를 보면서도 그랬다. 스튜디오 조명이 ‘탁’ 켜졌다. 김은희라는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드러났다. 17년 전, 힘들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여러 언론은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초등학생 제자를 4차례 성폭행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 한 혐의(강간치상)로 기소된 테니스 코치가 1심에서 징역 10년에 120시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피해 여성은 김아무개. 화면 속 김은희다. 어떤 지난한 과정을 거쳐 17년 전 그 코치를 법정에 세우게 됐을까. 얼굴과 이름까지 공개한 까닭은 무엇일까 직접 만나 묻고 싶었다. 김은희의 연락처를 수소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1심 선고 뒤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기 위해 열어 놓은 블로그에, 카카오톡 아이디와 전자우편 주소가 있었다.

춘천지방법원 103호 법정 앞

방송 사흘 뒤인 2월7일,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오던 김은희를 처음 만난 곳은 춘천지방법원 103호 법정 앞이었다. 2016년 피해 신고 이후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연을 맺게 된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주종미 교수와 함께였다. 주 교수는 ‘먼 곳까지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시간이 날 때마다 운전기사를 자처한다고 했다. 1심 선고 뒤, 피고인은 ‘15년이 지나 갑자기 사건이 제기됐고 피해자 진술에 일관성이 떨어지며 참고인들 증언도 간접 정황’이라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에서 2심이 진행 중이다.

이른 아침, 경기도 집을 나서 춘천까지 온 김은희는 법정에 들어가지 않는다. 1심 때도 그랬다.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2017년 1월부터 그해 10월 선고에 이르기까지 9차례 공판이 이어졌다. 거의 모든 공판일마다 원주에 갔다. 법정에 들어간 건 딱 한번. 증언을 위해서였다. 피고인은 옆 방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공포에 떨었다. 오후 2시10분,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인은 그저, 평범한 시민의 모습이었다. 애초 이날은 선고를 하기로 한 날이다. 재판장은 범죄 사실에 대해 피해자·피고인 쌍방이 자료를 제출해,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변론을 재개한다고 설명했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김은희는 피고인 쪽이 낸 자료를 확인할 방법을 찾았다. 다음날, 그 자료를 보기 위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2월9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와 마주앉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그 질문부터 했다.

김은희의 휴대전화엔 ‘예쁜 이름’ 목록이 저장돼 있다. 재판이 끝나면 이름부터 바꿔야지 했다.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었다. “은희씨 힘내세요” 응원을 듣게 되면서, 싫었던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은희의 휴대전화엔 ‘예쁜 이름’ 목록이 저장돼 있다. 재판이 끝나면 이름부터 바꿔야지 했다.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었다. “은희씨 힘내세요” 응원을 듣게 되면서, 싫었던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피해를 말 못한 11살의 나
17년간 자책하고 책망했다
언젠가 그 일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열심히 더 부지런히 살았다

어른 될 무렵 ‘조두순 사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2012년 처음 경찰서를 찾았다
고소할 수는 있다 했지만…
증인도 증거도 찾을 수 없어

―어제 춘천에 혼자 다녀오셨잖아요. 법률 전문가들이 있는데 은희씨가 그 일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싶었어요.

“저는 그 사람 죄가 낱낱이 밝혀지길 원해요.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데, 그게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오기가 생기니까 자꾸만 뭐라도 찾게 돼요. 어떻게 보면 검사나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다른 사람이 자료를 찾는다 해도 제가 확인해야 하니깐, 제가 하는 게 나아요. 한편으로는 자잘한 일은 제가 하고 변호사·검사한텐 큼직큼직한 것만 맡기면 그분들이 제 사건에 더 많은 신경을 써줄 거라 생각했어요. 제 사건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피고인 처벌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7일 춘천에 정말 가기 싫었다는 걸, 블로그 글을 통해 뒤늦게 알았어요. 전날, 선고가 미뤄졌다는 연락을 받고 많이 힘들었나요?

“2016년 7월 고소장을 제출하고, 2017년 10월 선고가 나오기까지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제 기억과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피고인 쪽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할 자료를 찾아 헤맸어요. 피해 날짜가 맞지 않는다고 하면, 제 말이 맞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옛날 기사를 찾고, 여기저기 공공기관이나 병원에 전화하고, 아직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고…. 또다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리 힘들었나 봐요.”

―1심에서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됐을 때 마음이 어땠을지, 저는 짐작조차 못하겠어요. 이번 재판이 은희씨에겐 어떤 의미인가요?

“재판에서 졌으면 속상하고 슬펐을 텐데, 이겼을 땐 그저 ‘할 일 했다’ 그런 느낌밖에 없었어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고소를 한 건, 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처음엔 이기고 지는 게 상관이 없었죠.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만으로도 내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될 것 같으니, 고소하게 해달라. 이 사람 잘못을 어디에라도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다 재판이 시작되니까, 이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였죠. 1심 선고 하나로 17년 동안 힘들었던 걸 보상받는 느낌이 있어요. 70% 정도는 치유가 되는 느낌. 그동안 저는 피해를 알리지 못한 제 스스로를 자책하고 책망해왔거든요. 재판을 통해 ‘내 잘못이 아니고 그 사람이 잘못한 게 맞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준 거잖아요. 지금이라도 문제를 제기한 제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간을 통해 치유가 많이 된 것 같아요.”

내 말보다 그의 말을 믿을 것 같았다

김은희는 초등학생 때부터 2015년 6월까지 테니스 선수였다. 갓난아기를 유난히 좋아해 신생아실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어린 김은희는 큰 키 덕분에 운동선수의 길로 접어든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코치에게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있었다. 어느 날 코치는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죽을 때까지 너랑 나만 아는 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합숙훈련이 잦았던데다, 기합이나 훈련을 빌미로 그를 때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강요된 침묵을 깨기 힘들었다. 학부모나 다른 교사와 사이가 좋았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잘못했다가는, 어른들로부터 더 크게 혼날 것만 같았다.

―오래전 일을 왜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느냐, 이런 질문 정말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그땐, 심각한 피해를 피해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초등학생한테 ‘손 들고 횡단보도 건너’, ‘줄서서 가’ 같은 지켜야 할 도덕이나 질서만 알려주지, 무엇이 범죄인지 죄악인지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으니까요.”

―1심 판결문을 보니 ‘2002년 피고인이 성폭행했다는 소문이 돌아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대목이 나와요. 학교에서는 은희씨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어느 날 ‘김은희 학생은 교장실로 오세요’ 교내 방송이 나왔어요. 교장실에 가니까 선생님이 ‘코치가 무릎에 앉혔는지. 너를 만졌는지’ 그런 걸 물어봤어요.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일 없다고 둘러댔죠. 그러다 ‘나만 알고 있을 테니 이야기해보라’는 말에 딱 한 글자로만 답했어요. ‘예’. 그날 집에 갔는데 부모님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묻더라고요. 내일 교감, 교장 선생님이 집에 온다면서…. 선생님들하고 마주칠까봐 그날 집에 늦게 간 기억이 나요. 다음날 학교에 가니까 코치가 사라졌더라고요.”

신생아실 간호사를 꿈꾸던 시절. 4~6살 무렵인 거 같다. 김은희 제공
신생아실 간호사를 꿈꾸던 시절. 4~6살 무렵인 거 같다. 김은희 제공

2012년 전국체전 시합 준비를 하던 때. 김은희 제공
2012년 전국체전 시합 준비를 하던 때. 김은희 제공

당시 ㅇ초등학교 교장은 1심 법정에서 “‘코치가 무릎에 앉으라 그러고, 아이는 울고 뿌리쳤다는데, 학교에선 알고 있느냐’는 이야기를 교감이 교육청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 뒤 코치에게 사직서를 받아 그만두게 했고 부모님께 알렸다”고 증언했다. 교육청에 누가 신고를 했는지는 모른다. 누군가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기에, 피해가 끝났다. 김은희는 더 이상 코치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통에서 해방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다시 만날까봐 늘 두려웠다.

―초등학교 때 조사가 좀 더 정교했다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 두 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요.

“전문상담사가 있었다면…. 교장·교감 선생님이 남자 선생님이기도 했고요. 지금은 학교에서 성폭력 사안이 발생하면 의무적으로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해요.”

―어릴 땐 성폭력 피해를 겪어도, 그게 심각한 일인지 잘 모르잖아요. 은희씨의 경우엔 어땠나요?

“성장하면서 그 일이 범죄라는 걸 알게 됐는데 성적인 단어나 신체 접촉에 굉장히 민감했어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이 고통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성적인 단어나 표현 하나하나에 제가 반응을 하는 거예요. 그런 걸 티낼 수도 없으니까 힘들었죠.”

―실업팀 선수까지 한 걸 보니, 테니스를 좋아했나 봐요.

“아니요. 고등학교 때까지 정말 운동하는 게 싫었어요. 맨날 그만둔다고 부모님이랑 싸웠죠. ‘운동 그만두면 공부할 거냐, 뭐 할 거냐’ 말리시고. 저희는 수업시간에도 운동만 했으니까요. 운동이 싫었던 건 초등학교 때 영향이 커요. 그 코치가 운동을 되게 힘들게 시켰거든요. 대학 가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만큼 운동을 할 수 있더라고요. 공부도 병행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졌어요. 실업팀엔 가지 않아도 됐는데, 지도자를 하려면 그런 경험이 있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한번의 쉼 없이 달려온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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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는 2010년 원광대에 체육특기자로 입학한 뒤 학부를 3년 만에 마치고, 실업팀 입단과 동시에 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 과정에 진학한다. 대학원을 마친 뒤인 2016년 3월엔 호남대 물리치료학과에 편입학했다. 정현처럼 외국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었는데, 물리치료를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싶었다.

―은희씨는 정말 부지런히 살았군요.

“항상 그 코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더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어른들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볼까봐, 말을 못했거든요. 내가 말했는데 그 사람이 ‘저 안 그랬어요’라고 하면, 제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내 말을 믿게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어요. 최대한 정직하게 살려 했고요. 그러면서도 정말 유명한 지도자가 됐을 때 그 코치가 갑자기 이상한 폭로를 하면 어쩌지. 내가 피해를 당했다고 세상에 알렸을 때, 칼 들고 쫓아오면 어쩌지. 이런 생각도 많이 했고요. 그런 게 좀 힘들었던 거 같아요.”

―‘내 마음에 문제가 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2012년 처음 상담을 받은 건가요? 그해 경찰서에도 찾아가 고소를 준비하셨더라고요.

“당시 ‘조두순 사건’으로 법이 개정됐다는 뉴스를 보면서 고소를 결심했어요. 여러 성폭력 상담기관에 연락을 했는데, 어떤 곳은 오래된 일이라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염숙희 소장님(현 전북가족복지문화원 원장)과 연결이 돼 상담을 받았어요.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염 소장님과 함께 익산경찰서에 갔더니 강간치상죄로 고소가 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증거가 문제였어요. 그땐 증언을 확보할 수 없었거든요.”

2009년 9월 조두순 사건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다. 8살 아이를 성폭행해 상해를 입힌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아동 성범죄에 얼마나 안일하게 대처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2010년 4월, 만 19살 미만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성인(당시 만 20살)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중지하는 법이 시행된다. 앞서 벌어진 사건 가운데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경우, 새로운 법을 적용받게 됐다. 피해가 있었던 2001~2002년 당시, 강간치상과 강간죄 공소시효는 각각 10년과 7년. 새 법이 시행된 날을 기준으로, 강간죄 공소시효가 끝났지만 강간치상죄는 아니었다. 이러한 까닭에 김은희가 만 20살이 된 날부터 10년 동안 강간치상죄 공소시효가 유지됐다. 강간치상죄에서 말하는 ‘상해’란, 신체적 상처뿐 아니라 정신적 상처까지 포함한다. 2012년 증인들을 구하지 못한 탓에 고소를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김은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2016년 5월, 그날 이후로 더 이상은 혼자 고통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2016년 2월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사진. 김은희 제공
2016년 2월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사진. 김은희 제공

―2016년 5월, 테니스 대회에서 우연히 그 코치를 보게 된 이후 다시 고소를 결심했다고 들었어요.

“그날, 저도 모르는 저를 발견했어요. 감정조절을 잘하는 편인데, 그 순간엔 조절하고 싶지도 조절되지도 않더라고요. 눈물이 터졌어요.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까, 말하다 또 눈물이 터지고…. 사흘 동안 울다 자다를 반복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페이스북 검색이었어요. 2002년 전학을 가면서 연락이 끊긴 테니스부 선후배들을 찾으려고요. 4년 전엔 증언을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도움을 구해보자, 다짐을 한 거죠. 또 제가 신고를 안 해서 다른 피해자가 나온다면 제 책임일 거 같은 거예요. 신고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17년 전 피해자는 나만이 아니었다

17년 전 성폭력을 ‘입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테니스부 선배 1명과 후배 3명, 그리고 후배 어머니가 증언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알고 보니, 그 시절 성폭력 피해자는 김은희 한 명이 아니었다.

“테니스 부원들은 종종 피고인의 관사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피고인은 침대에 누워 피해자를 비롯한 테니스 부원들을 한 명씩 불러 뒤에서 안았다. 부원들을 침대 위에 드러눕히거나 이불 안으로 불러들여 자기 위로 포개 올린 후 더듬은 적도 많았다는 취지로 공통되게 진술하고 있어 피해자의 진술을 뒷받침한다.”(1심 판결문)

이들뿐 아니라 ㅇ초등학교 교장, 중학교 체육교사, 의사와 임상심리사 등이 강원도 원주 법정까지 와 증언을 해주었다.

―피해를 숨기는 것보단 누구에게라도 알리는 게 재판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숨기는데….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데도 용기가 필요해요. 당장 신고를 못하더라도 힘든 심경이나마 친한 사람들한테 알리면 좋을 것 같아요.”

―가족들에게도 피해를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거예요. 은희씨 경우엔 어땠어요?

“지금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데, 재판 이야기는 잘 안 해요. 부모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세요. 제가 아는 피해자도, 가족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말을 못하고 있어요. 저도 부모님 몰래 고소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화를 내더라고요. 나중에 부모님이 알게 됐을 때,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늦게 알면 알수록 부모님 죄책감이 커진다고요. 그래서 말씀을 드렸죠.”

간접적인 정황을 증언해줄 사람들을 찾은 김은희는 비용을 들여 법률 조언을 받고 고소장을 작성했다. 경찰서에도 혼자 갈 생각이었다. 여성가족부 누리집을 보면, 성폭력 피해자 지원 기관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여성긴급전화 1366, 전국 38개 해바라기센터(심리치료·의료·수사·법률 등 통합지원), 전국 169개 성폭력피해상담소 등이 있다. 이러한 기관에서 적절한 도움을 얻는 피해자들도 있지만, 부실하거나 소극적인 상담으로 마음을 다치는 경우도 있다. 김은희가 그랬다. 그를 돕겠다고 나선 여성인권단체 광주여성의전화는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설득했다. 광주해바라기센터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국선 변호사와 함께 피해 조사를 받았다. 이후 횡성경찰서가 수사에 나섰고 그해 말 코치가 기소됐다. 염숙희 전북가족복지문화원 원장은 “피해자들에겐 지속적으로 끝까지 정보를 제공하는 조력자가 필요한데, 실적 유지나 인력난 등을 이유로 그러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한다. “피해를 당했다는 걸 드러낼 때, 어딘가에 신고해야 치유와 회복이 빠르다. 한두 곳에 상담을 받다 포기하지 말고, 내게 호의적인 상담사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 사람 얼굴을 목격한 뒤 일상은 뿌리째 흔들렸다
운동부 선후배·선생님…내 말을 믿게 해준 사람들

위급시 심폐소생술 배워도 옆 사람 쓰러지면 허둥지둥 성폭력 피해 막상 닥쳤을 땐
어른도 아이도 서투를 수밖에 “미흡했다고 합리화 말아달라”


침묵을 종용하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경찰에 고소장을 낸 김은희는,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비리신고센터와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인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도 피해를 신고했다. ㅇ초등학교를 그만둔 코치는 기소 전까지 여러 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해왔다. 스포츠비리신고센터는 문체부가 2015년 스포츠 비리·불공정 사안에 대한 제보를 받고, 조사를 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다. 2008년 여성 선수들이 겪고 있는 성폭력 실태가 드러나면서 2009년 대한체육회는 스포츠인권센터(옛 스포츠인권익센터)를 마련했다.

- 두 기관에 신고한 내용은 어떻게 처리됐나요?

“문체부나 대한체육회에서 조사해 징계 결과가 나오면 법정에 내려고 했어요. 저는 대한체육회에 신고를 하면 거기서 조사와 징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대한테니스협회같이 종목별 산하기관(1차 징계의결기관)에 이첩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신고 15일 뒤에 대한테니스협회에 사건이 넘어갔는데, 그 사실도 며칠 뒤 체육회에 전화를 걸어서 알게 됐고요. ‘코치가 연락이 안 된다’며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고 1심 선고 이후 지난해 말 ‘영구제명’ 징계를 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문체부에선 재판 결과를 보고 징계하겠다고 했는데, 1심 선고 이후에도 감감무소식이었고요.”

문체부 체육정책과 관계자는 “훈령인 ‘스포츠비리신고센터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정’에 ‘수사나 감사 중인 사안은 처리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에 따라 사건 조사를 진행하지 않은 것 같다”고 밝혔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너무 오래된 사건인데다, 스포츠공정위원회 조사 권한이 협소하다. 증거가 명확해야 징계를 할 수 있어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고 설명했다. 김은희 사건과 관련해, 여성 스포츠인과 체육학자들이 모인 ‘100인의 여성체육인’은 19일 성명을 내어 “체육계에 만연한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관련 행정기관의 진정성 있는 조사와 관심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23일이 대학 졸업식인데, 지도자가 될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2016년 5월 이후, 학교도 그만두려 했어요. 왜 내가 같은 직종에 있어야 하지? 그런 생각이었는데, 교수님이 잡으셨어요. 네 삶을 계속 가야지, 다른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건 안 된다. 고민이 길어지면서 졸업까지 오긴 했어요. 고소를 할 무렵 이민도 준비했어요. 미국에 외가 친척분들이 계시거든요. 도피처가 있으니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 되면, 뜨자. 물리치료 하면서 살면 되지 뭐, 그렇게. 그런데 오랫동안 품어온 꿈과 목표가 사라지니까 그것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테니스계로 돌아가면 사람들 시선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또 그렇게까지 해서 돌아가야 하나 싶기도 하고…. 지금 가장 큰 고민은 진로인 것 같아요.”

김은희는 언론에도 피해를 알렸다. 최근 성폭력 피해 고발자를 찾는다는 어느 프로그램에도, 지난해 이미 제보를 했다. 그동안 언론은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킬 만한 ‘충격적’인 사건에만 취재에 열을 올리고 ‘피해가 얼마나 처참한지’, ‘피해자가 얼마나 불행해졌는지’ 중계하기에 바빴다. 여론에 따라 법과 처벌이 강화돼 왔지만 피해자들이 꽁꽁 숨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언론도 일조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일지 모른다.

성폭력 피해자는 경험자가 아니다

―법정 싸움에 그치지 않고 얼굴과 이름까지 공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나 같은 사람도 한 거니까 당신도 할 수 있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제 이야기를 통해, 신고나 재판을 저렇게 준비하면 되는구나, 도움을 주는 기관들이 있구나, 이렇게 치료받을 수 있구나, 이런 것도 증거가 되는구나…. 그런 정보를 나누는 게 힘이 되는 것 같았거든요. 저도 다른 사건들을 통해 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또 숨어 있는 피해자들을 대신해 ‘과거의 죗값 받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더 이상 죄짓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기도 했어요.”

―‘성폭력 피해 고백을 강요한 걸 반성한다’는 내용의 블로그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렵게 용기를 내 제게 피해를 털어놓은 지인이 있어요. 그 사람은 피해가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데 저는 적극적으로 재판에 나서야 한다 강요했어요. 그랬더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더라고요. 피해 사실만으로도 힘들 텐데 내가 또 상처를 주는 거구나. 사람마다 피해자마다 성향이 다른 거니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반응이 무엇인지 알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피해 당시 나이가 어렸으니까 대처가 미숙했다고 비난을 받진 않지만, 성인들은 피해를 겪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카카오톡을 했다’고 욕을 먹어요. 성인이든 어린이든, 성폭력 피해자는 경험자가 아니에요.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아도, 내 옆에서 사람이 쓰러지면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게 사람이잖아요. 성폭력에 대한 대처가 습관이 되도록 훈련받은 것도 아닌 이상, 아무리 교육을 받고 정보를 듣는다고 한들 피해가 닥쳤을 땐 대응이 미흡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부분을 문제 삼아, 범죄를 합리화시키는 말들이 힘들어요. 책임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글을 볼 때면 제가 2차·3차 피해를 받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남자는 여자랑 말도 섞으면 안 되고 접촉조차 하면 안 되냐, 걸고 넘어지면 다 성희롱·성추행이냐’ 이런 반응도 보기 싫어요. 남녀가 함께 있는다고 성폭력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또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김은희 휴대전화엔 ‘예쁜 이름’ 목록이 저장돼 있다. 재판이 끝나면 이름부터 바꿔야지 했다.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었다. “은희씨 힘내세요” 응원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2월9일 인터뷰를 마친 그는 상대방 주장을 반박해줄지도 모를 자료를 찾기 위해 인근 주민센터로 향했다. 오는 28일에는 또다시 춘천지방법원에 향할 것이다. 그렇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