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지휘자 구자범

moonbeam 2014. 6. 22. 16: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어야겠지


지난 4월24일 부산 해운대의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구자범과 마주 앉았다. 그는 지난해 5월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사표를 내자마자 부산에 내려와 1년째 머물고 있다. 오랜만에 언론 인터뷰에 응한 그는 그간 언론에 의해 ‘명예살인’을 당했다며 참담한 심경을 드러냈다. 부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지휘자 구자범

누구도 무고하지 않다. 마지막까지 맨손으로 창문을 긁으며 바닷물이 삼켜버린 비명을 토해냈을 아이들 말고는. 뒤집어진 선체가 드러낸 우리의 밑바닥, 얄팍한 눈속임으로 가려두었던 우리의 치부를 목도하는 일은 날마다 형벌이다.

“이런 뻔뻔한 놈들….”

세월호 뉴스를 들으며 택시기사는 혀를 끌끌 찬다. 나도 깊은 한숨으로 동의를 표한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는 돈벌이를 앞세우는 아수라장이 되었을까 개탄하고,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사육해 온 우리 교육이 문제라고, 함께 격분하여 성토한다. 그 와중에도 택시기사는 단속카메라를 피해 과속을 하고, 나는 아이가 제시간에 학원에 갔을까 궁금해 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 아, 일상이 죄악이다. 자본이 뿌려놓은 탐욕과 위선의 포자는 내 안에도 독버섯처럼 자란다. 편법과 변칙을 묵인하고 겉치레 성과물에 미혹되어 온 우리는, 이 거대악의 비루한 공범들이다. 자기 성찰이 없는 분노가 무슨 소용일까. 아무 문제도 해결 못한 채, 내 치부를 은폐하고 진실을 도식화할 뿐이다.

구자범(44)은 아직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듯했다. 지난달 24일, 부산 해운대 바다가 마주 보이는 노천주점에서 그를 만났다.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슈트, 검정 선글라스를 걸친 그는 혼자 바다를 보며 앉아 있었다. 1970년 서울에서 나고 자라 89년 연세대에 철학과에 입학했고 스물다섯 늦은 나이에 전공을 바꿔 독일 만하임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 뒤 독일 하겐 시립오페라, 다름슈타트 국립오페라를 거쳐 2006년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 수석지휘자까지 승승장구 도약한 그를, 언론에선 “절대음감의 천재 음악가”, “정명훈의 대를 이을 세계적 지휘자”라고 칭송했다. 2009년 구자범은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이유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답했다. 광주시향의 상임지휘자가 된 구자범은 2010년 <광주항쟁 3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518명의 시민합창단과 함께 공연했다.

“나 높이 날아오르리라, 사랑날개 타고/ 살기 위해 죽으리라/ 일어나! 자, 일어나! 내 사랑아!”

탁월한 곡 해석과 자유분방한 기획력, 악보 없이 전곡을 외워서 지휘하는 구자범의 연주는 “유료관객 매진”을 연속 기록했고 그에게 매료된 청중들은 구자범 팬 카페를 만들었다. 2011년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자리를 옮기며 그는 “음악을 통해 화합하고 소통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구자범은 패기만만하고 자유분방하며 열정 가득한 마에스트로였다. 모든 것이 순탄해 보였다. 지난해 5월 그가 돌연 사표를 제출할 때까지는. 언론은 그가 여성 단원을 성희롱하고 단원들의 항의가 일자 사직했다고 전했다. 윤창중 성희롱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이후 구자범을 공연장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부산에 혼자 내려와 있다.

독일에서 승승장구 도약하던 그
한국에 돌아와 광주시향 거쳐
경기필서 행복한 순간을 보내다
갑자기 성희롱범으로 몰려 곤욕
도대체 1년 전 무슨 일이 있었나

“얼마 전부터 노무현을 다시 본다
효율을 떠나서 미련하게 가치를
지키고 사는 바보를 알아보고
그 바보를 밀어주었던 기적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았나 말이다”

피아노학원 네 군데서 다 안 받아주더라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없다. 인생을 계획 세우고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이제는 뭐 아무것도…전혀 계획 없이 하루하루….”

-어제는 뭐하셨나?

“최근엔 계속 세월호에 빠져 있었다.”

-본가가 서울인데,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으시나?

“그래서 내가 연락을 안 한다. 얼마 전에도 내려오시고 싶어 하셔서… 오시지 말라고 했다.”

-춘천시향 백정현 지휘자가 최근 언론에 기고한 글을 보니, 요즘 당신이 동네 피아노학원 선생 자리를 알아보러 다닌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그렇다. 네 군데 가봤는데 다 안 시켜주더라.”

-당신이 누군지 모르나 보다.

“보자마자 ‘남자 선생 안 뽑습니다’ 하는 데가 있다. 왜냐고 물으니 ‘세상이 흉흉해서 학부모들이 싫어한다’고. 이쯤 되면 더 얘기할 수가 없다. 인터넷에 ‘구자범’ 치면 몽땅 ‘성희롱’이 (연관검색어로) 나오는 상황에서… 어떤 데서는 솔직히 다 이야기했다. 내 이력은 뭐… 검색해 보면 아실 테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게 사실이면 내가 이 자리 안 왔을 거라고. 그럼 그분들이 난처해한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춘천시향 백정현 외에도 작곡가 류재준, 클래식 애호가 장원섭, 전남대 김상봉 교수 등 음악계, 학계 인사 몇몇이 언론 기고를 통해 구자범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나간 일의 진실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왜 하필 피아노학원 선생님인가?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다른… 어떤 일?”

-수험생 레슨을 한다든지, 오케스트라 단원을 가르친다든지….

“나는 한국 와서 레슨이나 대학 강의를 해 본 적이 없다. 누가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독일에 있을 때는 (레슨 요청이) 많이 왔었다. 오페라하우스 들어가고 싶은 성악가들, 오케스트라 하고 싶은 사람들 와서 레슨 받고… 서양에서는 공연을 하고, 그 서포트를 학계가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계를 돕기 위해서 공연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내가 학교의 교수나 강사가 아니면 나한테 레슨 받을 일이 없다.”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 요청을 해도 거절했다던데 이유가 뭔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은 내가 경기필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내가… 아,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사람들하고 같이 장애인 학교 가서 연주하고, 교도소 가서 연주하고, 우리끼리 <만우절 음악회>라고 단원들이랑 머리 짜내서 즐겁게 하고… 정말 만우절 음악회는 기가 막힌 거였다. 서로 일어나서 춤추고, 정말 전세계 어디에서도 못하는… 음악을 통해서 한껏 어우러질 수 있었던 좋은 시간들이었다. 우리나라에 그런 오케스트라가 또 있을까. 이건 굉장히 특별한 거였고, 난 우리 단원들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왜 지휘를 안 하시냐고?

“근데 거기서 실패를 본 다음에… 내가 배신감을 느낀 다음에는… 기성 오케스트라와 음악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이제는… 음악보다 삶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

-복귀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던데.

“그거는… 생각 안 하고 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내가 (성희롱 사건으로) 언론에 나오고 난 다음에 사표를 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나를 두고 단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다툰다는 얘길 듣고 차라리 내가 그만두는 게 낫겠다 하고 사표를 냈더니, 다음날 언론에서 ‘사표를 냈어? 아, 그럼 쟤는 꿀리는 게 있나 보지’ 하고 함부로 막 실어버린 거다. 나한테 한마디도 안 물어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 확인도 없이. 심지어 <한겨레>까지도….”

이제는 그의 가장 아픈 곳에 내가 비수를 던질 차례다. 더 이상 비켜 갈 수 없는 질문이었다.

구자범을 만든 시간들 (※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 되었다

-성희롱 시비가 일었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외부로 나가 연주하는 데가 두 군데 있는데 교도소와 장애인 학교였다. 장애인 아이들은 소리를 꽉 질러대니까 평생 음악회에 못 간다. 학교를 떠나면 더 이상 들을 기회도 없다. 그 친구들이 (졸업하기 전) 학교에 있을 때 들려줘야 한다. 이때가 장애인 아이들한텐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그래서 장애인 학교 연주가 네 번 연속으로 기획되었는데 그 둘째 날 아침 연주 때였다. 솔로를 맡은 여성 단원이 나를 안 보고 있다가 솔로 들어가는 파트에서 소리가 끊겼다.”

-연습 때가 아니고 실제 공연 때 그랬다고?

“공연 때다. 그래서 내가 끝나자마자 불렀다. ‘여기가 예술의 전당이었으면, 카메라 있었으면 이렇게 했겠느냐, 장애인 학교라고 우습게 본 거냐?’ 하고 끓어올라서…. 근데 이 사람 아무 말도 안 하더라. 사과도 안 했다. 그럼 내일 연주도 이렇게 할 거냐? 그럼 ‘연주정지’다….”

-연주정지라는 게 오케스트라에 흔히 있는 징계인가?

“공식 징계는 아니고 그저 운영상 조치라고 보면 된다. 그 전에는 임신한 만삭의 단원이 연습 중 쓰러진 경우가 있어서 정상적 연주가 안 되니 출산 때까지 연주하지 말라고 정지를 내린 적도 있었다. 감봉도 아니고 기록에 남는 징계도 아니다.”

진지한 사과만 있으면 따끔히 경고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이후 약속된 면담자리에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시간, 몇몇 단원들은 이 여성 단원의 이름으로 지휘자의 성희롱 의혹을 제기하는 진정서를 도청 감사관실에 제출했다. 구자범이 공연 사고 이틀 전, 단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지난 연주회에서 니 팬티 하얀 거 봤다”면서 그 여성 단원에게 성희롱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식사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여성 단원은 사실무근이라면서 펄쩍 뛰었다. 여성 단원들이 연주회에선 바지를 입는데 속옷 색깔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한 단원은 구자범을 옹호하며 감사실에 탄원 메일을 보냈다. 그는 메일에서 “현재 겉으로 드러난 상황들은 진실과 너무 많이 다른 모습”인데 고참급 단원들이 구자범 반대에 앞장서고 있어서 “오케스트라 안에서 그에게 유리한 발언을 하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했다.

소용없었다. 성희롱을 제기했던 여성 단원 스스로 며칠 뒤 진정을 취하했지만, 구자범 성희롱 시비를 주도해온 단원들로부터 거친 비난을 샀을 뿐이었다. 때마침 청와대 윤창중 대변인 성희롱사건이 터지고 남양유업의 갑을관계 문제가 제기되면서 구자범은 꼼짝없이 “갑의 지위를 이용해 성희롱을 일삼은 파렴치범”이 되었다. 구자범은 사표를 냈고, 언론은 일제히 그의 성희롱 시비를 당사자 확인 없이 쏟아냈다. 구자범은 당시 언론들을 상대로 현재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이후 사건을 심층취재한 <이상호의 고발뉴스>는 한 단원의 증언을 통해, 구자범이 일부 단원들의 ‘밥그릇싸움’의 희생자였다고 밝혔다.

“구자범씨는 지휘자로 부임해 온 이후, 경기필의 레퍼토리를 기존의 가요나 팝송 위주에서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교향곡 등으로 교체했으며, 이 때문에 고강도 연습이 이어지자 일부 단원들이 ‘외부에 레슨 나갈 시간이 줄어든다’며 크게 반발했었다.”(고발뉴스, 2013년 12월17일자, 단원 C씨의 증언)

-그 상황에서 사표를 낸 게 잘못 아닌가?

“사실과 상관없이 나는 가장 나쁜 놈이 되었다. 평소 성희롱을 해오다가 어떤 여자가 더 이상 못 견디고 항의하니까, 괘씸하다고 연주정지를 내리고, 거기에 다른 단원들이 반발하니 꼬리 내리고 사과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사표 내고 잠적했다고? 아, 내가 이렇게 나쁜 놈이 되는구나.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그때는 ‘우리 단원들이 그런다면, 난 이런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내 명예 지키고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내 전처가 그 얼마 전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도 있는데 뭐 그렇게 연연해하나, 인생 뭐 있다고, 이런 느낌이 강해서…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정말… 인생 최악의….(울먹임)”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난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비운 자리, 나직한 파도가 조용히 밀려왔다 미끄러져 갔다.

팽목항엔 파고가 높다는데 해운대 앞바다는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르고 그가 돌아왔다. 맥주 한잔을 따라줬다. 그는 목이 탄다며 벌컥벌컥 잔을 비웠다.

검색어 조작으로 벌금형 받은 단원들은 왜?

-당신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던 일부 단원들이 네이버의 연관검색어를 조작했다가 걸렸다. 이후 사법 처리는 어떻게 됐나?

“검색창에 내 이름을 넣으면 ‘구자범 성희롱’, ‘구자범 변태’ 같은 연관검색어가 뜨는 게 이상했다. 실제 내용은 안 나오는데 검색어만 그렇게 나오니까. 작년 4월께인데, 그땐 단원들 사이에 성희롱 얘기가 도는 줄도 내가 몰랐을 때다. 네이버에 지워달라고 요청하니 경찰 협조 없인 못한다 하더라. 할 수 없이 신고했는데 작년 12월에야 검색어를 조작한 단원들을 찾아냈다. 이번 4월15일 그들에게 벌금형이 부과되었다는 통고를, 바로 어제 받았다.”

-그 단원들은 왜 그렇게 당신을 몰아내고 싶었을까?

“나도 나중에 다른 단원들한테 들었다. 첫째는, 내게 여기 음대 선후배나 선생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진 안 갔을 거라는 얘기. 둘째는, 단원들이 레슨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고 힘들어서 그랬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레슨비 덜 받는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근데 나중에 이해를 하게 된 게, 내가 온 다음에 우리가 (연주자를) 25명 늘렸다. 그걸 따내면 단원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이상했다. 나중에 보니까, ‘당신 가버리고 예산 없어지면 그 사람들부터 자르겠나, 우리부터 자르지’라는 이야기가 기존단원들 사이에서 나왔다는 거다. 내가 가장 충격 받은 건, 검색어 조작으로 뜨는 게 ‘구자범 변태, 성희롱’만이 아니라 ‘구자범 오전오후’란 말도 있었단 점이다. 이걸 욕이라고 쓴 거다. 오전 오후 연습시킨다고.”

-다른 데선 오전 오후 연습 안 하나?

“단장 재량인데 그렇게 안 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나도 매일 그러는 게 아니고 연주 전 2주를 잡아서 오전 오후 시키는데 사람들은 그게 불만이었나 보다. 단원 얘기가 ‘우리는 말러, 슈트라우스 이런 거 해서 즐겁고 행복했다. 관객이 기립박수하고 환호하고 너무 좋은데, 그건 딱 하루다. 그다음 우린 똑같이 죽어라 연습하는데, 그러자니 레슨할 시간도 없었다’고. 그런 얘기 왜 진작 안 했냐고 물으니 ‘그럼 내가 실력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냐’고 하더라.”

-그렇게 해서 자기들도 기량이 늘면 고맙고 보람찬 일 아닌가?

“그 사람들 생각은, ‘구자범, 당신은 음악이 좋고 무대에 서는 게 행복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는 거다. 한국 사회에서 무대에 서는 건 항상 점수 매김을 받는 거였고 그걸로 평가를 받고 돈이 책정되는 사회였다고, 자기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겠다. 지난 일 년 동안.

“자기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엔 엉엉대는 사람들이,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여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를 보면, 아! 사람을 믿는다는 게 맞나. 내가 살아온 삶이 맞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일 년을 보냈다. 밥그릇 때문에 남을 죽인다는 게 가능할까? 나랑 원수진 것도 아닌데, 내 밥그릇이 좀 불안해 쟬 죽이자,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까…. 근데 지난 일 년 동안, 그럴 수도 있겠다. 자기 양심, 명예를 팔아서라도 자기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거는 그만큼 자본주의가 어마어마하게 세다는 얘기고 자본주의적 가치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살 작정인가?

“얼마 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다시 보기를 하고 있다. 온갖 유튜브 영상 보면서…지금 내가 극복해야 하는 건 ‘사람을 못 믿겠다’는 건데. (선택지는) 두 가지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직하게) 살지 말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자.’ 이 중에 뭘 택할지…. 결국 내 선택은 후자가 될 것 같다. 효율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미련하게 가치를 지키고 사는 바보를 알아보고 그 바보를 밀어줬던, 기적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있었지 않나.”

-만약에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당신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게 있나?

“전혀… 없다.”

그가 잘라 말했다. 그가 옳다. 우리가 사랑하고 산 것들이 그렇게 부질없어져선 안 된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