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중얼

내가 성가대만 고집하는 이유

moonbeam 2014. 11. 5. 10:16

 

 

 서정주 시인은 자기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굳이 그 표현을 인용한다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아니 구할 그 이상일 거다...
북아현동에서 자라고 북아현교회를 다닌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축복이었다.
훌륭한 목자들을 너무 많이 만났고 좋은 친구 선후배들을 교회에서 사귀었고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세상사의 지식까지도 교회에서 얻었다....
자연스럽게 유치부를 출발해서 고등부 때는 서울 서노회 중고등부 연합회를 발기하여 창립했고,
이어 서노회 청년 연합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아...70년대 전국 청년연합회 활동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교회활동이 내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교회 생활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었다...
나쁜 면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그런 것만 계속 보였다.
그런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
어떤 교회, 어느 직분을 막론하고 경건을 위장하고 사랑으로 포장된, 많은 좋지 않은 일들이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좌절과 절망이 휩싸이게 되었다..
약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반사회보다 더 못한 곳이 교회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찾은 길이 바로 성가대였다.
음악을 좋아했고 대학 때도 음대에 가서 노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성악을 전공하던 선배가 갑자기 군대에 끌려 가는 바람에 얼떨결에 중고등부 성가대를 맡게 되었다..
음악하는 선배, 친구, 후배들을 따라 다니며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하면서 학생회 선배라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뭔지도 모르면서 좌우지간 열심히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로 청년 성가대를 맡았고...그 때의 성가는 매우 고전적이었고,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레파토리엔 대단한 것이 많았다.

그러다가 집이 이사를 갔고 기자촌 교회의 아는 장로님이 오라고 하셔서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기자촌에서의 10여 년은 정말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주 작은 규모에서 출발한 성가대는 엄청나게 발전을 해서 음악적 수준도 높아지고 전공자도 많이 배출했다.
그러던 중 망원교회(시온성교회)에서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성가대가 너무 미약하니 부흥을 원한다고.

그럴 능력은 부족했지만 아는 장로님의 간곡한 권유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게 2004년이니까 벌써 올해로 만 20년이 되네...생각지도 않고 지내온 시간이 벌써 20년이라니......
기자촌에서 1부를 하고는 곧장 망원동으로 가서 2부를 하고...1년 동안을 그렇게 하니 몹시도 피곤했다.

물론 피곤한 가운데에 얻는 은혜는 말로 할 수 없었지만 몸이 버텨 내기가 힘들었다.

끝내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당시 열정적이던 목사님이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끈질기게 상황을 설명하고 마침내 음악선교사로 파송한다는 명분으로 교회를 옮겼다.

그래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해온 덕분에 이제 안정된 자리를 잡아 마음이 뿌듯하다.

 

성가대 활동을 하는 시간과 공간만큼은 항상 기쁨과 감사와 은혜만 있었다.
온갖 꼴볼견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
다른 이가 보기엔 성가대만 고집하는 나도 꼴볼견이었겠지만 어쨌든 이 약한 믿음이라도 오롯이 지키며 교회생활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교회 내의 다른 파트에서 일하기를 꺼린다...
거기에 묻히면 또 다른, 보고싶지 않은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휘봉을 놓으려 한다.

처음 내 뜻을 밝혔을 때 교회와 성가대원들은 난리가 났지만 결국 나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그동안 교회 일로 알았던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예배드리고 싶었다. 사실 한 교회에 매이면 친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다.

사랑하는 친구 선후배들과, 알고 지내던 목사들의 목회 현장과, 아는 이들이 지휘하는 곳을 순례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겁고 가슴 벅찬 일이다.

완전한 자유인으로, 순례자로 예배를 드린다는 일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순례를 마치고는 조용히 드러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교회의 여러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인 찬양만 하며 다닐 것이다. 

 

 (작년 말 쯤 망원교회 페북홈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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