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헌금과 십일조 어떻게 해야 하나? --- 이진오목사

moonbeam 2015. 5. 7. 15:20

헌금과 십일조 어떻게 해야하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눅12:42,44)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1. 청지기 정신

 

‘청지기'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청지기'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oikonomia, 눅12:42, 고전4:2의 “맡은 자")란 말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와 “다스린다"는 의미의 “노모스"가 합친 말이다. 즉, 청지기는 집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입니다.

 

성경은 구/신약을 막라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청지기'라는 정신과 자세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청지기 정신'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이며, 우리는 만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맡아서 관리하는 자 임으로, 관리자로서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재물, 시간, 건강, 관계 등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개인 및 공동체에 맡기신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소유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청지기"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재정 소유와 사용, 헌금 생활 또한 교회의 헌금 관리와 사용도 이 '청지기' 정신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2. 제물의 의미

 

구약에서 제사 때 드린 제물, 헌물, 십일조 등은 2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행위의 표현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신앙공동체 유지라는 측면입니다.

 

종교적 제의에서 신에게 드리는 제물에 대한 기원과 목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여섯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신에게 복을 받기 위해 조건적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제물의 출처 등의 도덕적 측면은 무시되었습니다.

둘째, 신이 준 복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셋째, 신이 먹을 양식으로 드렸다는 견해입니다. 이때 신은 음식도 먹고 즐긴다고 보았습니다.

넷째, 바쳐진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을 통해 신과 인간과의 공동체 의식,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동체 의식 강화를 위한 수단이라는 견해입니다.

다섯째, 제물 드리는 것 자체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인격적 변화를 추구했다는 주장입니다.

여섯째, 인간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한 목적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사의 제물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제물은 단순히 물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전체를 헌신하는 의미였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개인의 삶 속에 온전히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제물은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드려진 제물을 서로 나누어먹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행동의 변화를 결심하는 것 등을 통해 공동체의 공평, 정의, 평화, 자유 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 선지자들의 비판은 제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 특히 제물이 드려지고 사용되는 것이 왜곡 된 것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암5:21~23, 사1:11~14, 미6:6~9) 즉, 선지자들은 권력자, 부자, 지도자들이 공평과 정의,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나라 정신을 외면한 채 풍부한 제물을 드림으로 구원을 보장 받으려는 행위를 비판합니다. 제사장들은 이를 묵인하고, 조장하고 이용하여 불의한 제물을 드리는 악한 지도자들이 종교적 허용을 통해 더욱 악행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어린 양"(요1:29)으로 진정한 제물이며, 만인을 위한 "대속제물"(막10: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주심으로 단절되어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공동체를 회복시킴으로 구원을 주시는 진정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3. 온전한 십일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온전한 십일조"는 개인 믿음을 평가하는 프리즘이고, 직분 맡은 자의 신실함을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즉 십일조의 내용과 방식 그 의미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며 시행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십일조가 언급된 성경본문은 구약 13개, 신약4개입니다.

구약의 십일조 관련 본문은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율법이전 시대" 2개(창14:18~20, 창28:20~22) "광야시대" 5개(레27:30~33, 민18:21~32, 신12:6~19, 신14:22~29, 신26:12~15), "광야 이후 시대" 6개(삼상8:15~17, 대하31:2~19, 암4:4, 느10:37~39, 느13:5~14, 말3:7~12)입니다.

신약은 복음서에 3개(마23:33, 눅11:42, 눅18:12), 히브리서에 1개(히7:1~10)입니다.

 

 

* 구약의 십일조

 

창14:18~20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입니다. 이 십일조의 특징은 자원해서 드렸다는 것과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의 헌물이라는 것입니다. 창28:20~22의 십일조는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하며 바치겠다는 약속으로 이후 시행여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27:30~33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이고, 민18:21~32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소유로 선택되어 생산수단이 없는 레위인에게 주고, 이 십일조의 십일조는 아론에게 주라고 합니다. 신명기12:6~19의 십일조는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과 함께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신14:22~27에서와 같이 가족과 레위인과 함께 먹는 공동식사의미의 십일조입니다. 또 3년째에 드리는 십일조가 등장하는데 이는 신14:28,29, 26:12~15에도 언급되어 레위인과 고아, 과부에게 나누어주어 먹게 하는 즉, 가난한 자, 약자들을 위한 십일조입니다.

 

삼상8:15~17에 언급된 십일조는 왕정 국가가 되면 왕이 십일조를 가져갈 것이라는 것으로, 이로볼 때 주변 왕정 국가에 나라에서 걷는 십일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하31:5~19은 히스기야 왕이 신앙개혁을 단행하면서 십일조를 거두어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십일조와 제물을 보관하는 창고(방)을 만들었습니다.

 

암4:4은 당지 권력자들이 율법의 정신인 공평과 정의를 등한시 하면서 종교의식을 통해 복만 구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형식적인 십일조 드림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느10:37~39는 포로기 이후 성벽재건 및 신앙회복을 진행하면서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과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주어 신앙적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느13:5~14에서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의 부름을 받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사장들이 십일조와 헌물 등을 횡령하며 타락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말3:7~12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고 있다고 질타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의 생계 수단이었고, 나아가 공동체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구제물인데 지도자들은 이를 횡령(도적질)하고, 백성들도 그런 지도자들을 핑계로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니, 결국 신앙은 형식화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 구약에서 언급된 십일조 관련 본문들을 통해서 볼 때 십일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바칠 때의 기본 정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주신 것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청지기 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열의 하나"를 드리는 것은 첫 열매를 드리는 것과 같이 하나를 드림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대표 원리"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린 방식은 매년 드리는 십일조와 3년에 1번 드리는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3가지로 레위인 등 성전종사자의 생활비, 가족과 공동체원을 위한 공동식사,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한 구제비이다. 왕에게 바친 십일조는 실제 시행되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 신약의 십일조

 

신약에서는 먼저 복음서의 말씀 마23:23과 눅11:42은 같은 의미와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책망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아모스와 같이 권력자/부자들의 형식적인 십일조 생활과 이를 통한 종교적 만족 추구에 대해 경계하신 것입니다. 눅18:12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살고 십일조를 드린 것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세리의 기도에 대해 세리가 의로운 자라 평하십니다.

 

히7:1~10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은 아론의 계보가 아닌 멜기세덱의 계보를 따른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다는 것은 정의와 평화의 왕이라는 의미로서 예수님이 공평과 정의의 진정한 제사장이란 의미입니다.

 

신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히브리서의 말씀을 해석할 때 중요한 문제는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입니다. 바울 서신들,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고(마5:17~20),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행해야 산다고 하셨으며(눅10:28) 부자 청년이 율법 행함을 책망치 않으셨습니다.(눅18:18~22)

 

바울도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강조하면서도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 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이라고 합니다. 또 성령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롬8:4)고 선언하며, 율법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3) 말합니다. 새언약을 말하는 렘33:33도 율법을 그들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즉, 문자적 율법이 아닌 율법의 정신의 계승, 율법의 내면화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 행함이 구원을 위한 조건이었다면 신약에서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를 섬기는 행위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행위 기준은 문자적 율법 조문이 아니라 그 정신과 원리이며,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성취가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에 의한 순종의 결과이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성화라 합니다.

 

 

마23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교만과 외식을 직설적으로 책망하시면서, "성전"(23:16), "예물"(23:17), "제단"(23:19) 등을 언급하시며 그 자체를 폐기되었다 거나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십일조"(23:23)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루시기 전까지 예수님은 안식일 지켜 성전제사도 행하셨고, 예물과 성전세도 드리셨으며, 할례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하고.. 이런 것은..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히9:9,10) 말씀하셨고,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히10:8) 따라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8)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사 휘장이 찢어져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신 이후, 우리에게는 안식일도, 성전도, 제사도, 예물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구원의 방편이 아닌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정신으로 계승되어 완전케 되었는데, 안식일은 주일로, 성전은 예배당(교회당)으로, 제사는 예배로, 예물도 헌금으로 대체되어 그 정신과 뜻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도 문자적으로 지킬 것이냐 폐기할 것이냐가 아니라 십일조에 담긴 정신과 뜻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가 일관성이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 십일조의 정신의 계승

 

말3:10에서 "온전한 십일조"에서 "온전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콜"은 "전체, 모두,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분량을 채우는 "완전한, 풍성한" 등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모든 십일조"라는 뜻입니다. 이때 "모든 십일조"를 드린 다는 것은 '구약의 십일조'에서 살펴본 것 같이 드리는 형식 "매년과 3년에 1번 드리기"와 내용 "레위인 등 성전종사자를 위한 사용, 가족 및 공동체를 위한 공동식사,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구제"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온전한 십일조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고, 행하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말3:9,10) 했는데 현대교회에서 위에서 밝힌 2가지 십일조를 행하지도, 3가지 내용에 부합하게 사용하지도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현대교회에서는 이를 문자적으로 지킬 수도 없습니다. 농/축산 사회 일 때는 1년에 1번 소득이 생기고 이에 대한 십일조도 정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입은 종류나 월급, 수당, 보너스, 주식, 펀드, 저축, 사이버머니, 각종 상품권, 선물 등 다양하고, 시기도 일정치 않아 그 누구도 문자적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하고 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는 문자적이 아니라 그 정신에 따라 행해져야 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위에 언급한 대로 첫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맡겨진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청지기 정신"이며 둘째는 하나를 드림으로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을 표하는 "대표 원리"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십일조를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됨을 확인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십일조를 사용함에 있어 3가지 내용을 계승해야 합니다. 첫째는 레위인과 성전종사자들의 생활비에 사용한 것인데, 이는 교회 전임자에 대한 생활비를 부담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가족과 공동체를 위한 공동식사인데 이는 교회 운영을 위한 비용을 공동부담하고, 교회 가족들의 형편을 돌아보는 일을 위해 사용한다는 의미가 포함될 것입니다. 셋째 가난한 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한 구제비는 교회의 구제, 협력 등 대외적 사역을 위해 사용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십일조를 드림에 있어 문자적으로 1/10이 정확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가능하지도 의미도 없습니다. 십일조 드림도 신약이 가르치는 "헌금(연보)"의 정신과 원리에 따라 행하면 될 것입니다.

 

 

4. 헌금(연보)의 정신과 원리

 

'헌금'이란 단어는 구약은 제사를 지냈기에 제물, 헌물 등으로 사용되어 없고, 신약에서는 복음서에서만 몇 곳 나옵니다. 그러나 이 용어도 복음서가 제사 제도가 폐지되기 전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구약에서 사용한 제물, 헌물이란 용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바울 이후에는 '연보'(복, 관대, 풍성, 모금 등)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신약에서의 '연보'는 위 '2. 제물의 의미'에서 설명한 것같이 복을 받기 위한 도구나 신을 위한 양식 등의 개념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십자가 제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수단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올바른 관계 유지와 공동체 내/외부의 공평, 정의, 평화, 자유 등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헌금(연보)에 대한 정신과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감사함으로 있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절 서기관들은 신앙적으로 외식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 이렇게 경제적, 신앙적으로 착취하여 부자가 된 자들은 비록 그 액수는 많았으나 감사함이 없는 형식적인 돈을 헌금(연보)함에 넣었지만, 이렇게 저렇게 빼앗겨 궁핍했던 한 과부는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가장 작은 화폐 단위)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가난한 중에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고후8:11,12도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준비하는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첫 열매나, 십일조를 따로 떼어 준비해서 드렸다. 고전16:2에서 바울은 어려움 중에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준비할 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하라고 말합니다. 매주 첫날은 주일을 말합니다. 주일마다 예배로 모였을 때 각자 수입에 따라 연보를 미리 준비해 모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고후9: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1년 전부터 연보를 준비해서 했다는 것을 칭찬합니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5) 헌금은 준비해서 하는 것입니다.

 

셋째 마음에 정한대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고후9:7), 구약에서도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필요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내었을 때(출25:2, 35:5,21,29) 차고도 넘쳤습니다. 마음에 정한대로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가 연보를 할 때 좋은 상황에서 한 것이 아니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으로 했고, "극심한 가난"이 오히려 더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다(고후8:2)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힘대로 만이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했다고 합니다.

 

넷째 헌금(연보)은 서로의 부족을 채우는 것입니다. 고후8:13,14은 헌금이 다른 사람만 위하고 내는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균등하게 하려함이니, 서로 부족할 때 보충해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헌금을 통해 교회를 운영할 뿐 아니라, 내외부적 구제를 위해 사용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이로써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한 것(고후8: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연보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난의 의미를 깨닫고, 가난함을 부요케 채우심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헌금(연보)에는 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연보가 은혜라 말하며 이 은혜에 풍성하기 원한다(고후8:7) 말합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9:7)고 하시는데, 그런 자들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며,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고 했다. 예수님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고 하셨습니다. 말3:10이 말하는 십일조를 할 때 주시는 복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섯째 헌금(연보)은 모두를 감사하게 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고후9:11)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가 넘쳤고"(고후9:12),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9:13) "하나님께 감사"(고후9:15)한다고 합니다. 자발적이고, 준비된 마음을 다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린 헌금과 올바르게 사용된 헌금은 드린 자나 받는 자, 이를 지켜보는 자들 모두에게 감사를 하게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진오 목사/더함공동체교회 great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