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보면 "성경만 있으면 되지 복잡한 신학이 왜 필요한가?"라고 하시며 신학무용론을 펼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에 대해 심정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것은 그다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성경을 보다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신학이 있어도 성경을 들고 이상한 주장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하물며 체계적인 신학 연구마저 없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이는 마치 자연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과 실험적 검증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와 신학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단을 운영하는 교회법 자체가 신학과는 결코 분리할 수 없슴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이 잘못되면 교회를 오류로 이끌 수 있고, 반대로 교회가 변질되어도 신학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신학의 시녀화
중세 교회가 바로 그런 실제적인 경우입니다. 사도들의 신학을 물려받은 신약 초기 교회와는 달리 본격적인 교황적 교권의 부패와 함께 신학의 변질도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마리아 숭배, 성인과 성당과 성지 중시 사상, 제사장적 사제직, 직분 계급화, 미사의 화석화, 그리고 신도 우민화 등이 모두 그런 것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한 교권은 마침내 교조적인 신학 논리를 동원하여 '종교재판소'를 운영하며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무분별한 '마녀사냥'과 '종교살인까지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건전한 신학을 지녔던 정통 교단이라도 일단 교회가 변절하기 시작하면 결국 신학도 동반하여 타락하게 됩니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을 전반적으로 볼 때 '성경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역사신학' 등은 비교적 정통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실천신학'에 문제가 많습니다. 심지어 주일에 본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불륜에 비유하는 대단한 목사도 있습니다. 신론과 구원론은 그런대로 잘 가르치는데, 교회론이나 목회론에 엉터리가 많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조금 심하게 극평을 하자면 상당수의 교회들은 일단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지극히 성경적인 구원론으로 신도들에게 건전한 교회라는 좋은 인상을 주고 깊은 신뢰를 얻은 후, 그 다음엔 비성경적인 교회론이나 은사론으로 교인들을 유도하여 그들의 주머니를 알뜰하게 털어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보면 멀쩡한 정통 교단의 교회들조차 엉뚱한 사역을 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서는 아주 멋진 설교를 은혜롭게 잘 하십니다. 그것만 보면 틀림없이 훌륭한 개혁 교회의 경건한 목회자답습니다. 신학적으로 큰 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매우 개혁적인 교단들조차도 목회 독재나 교회 세습에 대해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곳이 많습니다. 진정 성경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행위이지요. 특히 세습을 자행한 파렴치 목사들의 그 허접한 세습 논리를 따르자면, 차라리 베드로의 아들이나 후손을 대대로 교황이나 교단 총회장으로 추대해야 옳을 것입니다.
개신교의 변절
그나마 세습은 약과입니다. 이제는 헌금 남용, 공금 횡령, 성추행, 성직 매매, 표절, 거짓말, 장부 은익, 황제식사, 사치골프, 이벤트예배, 그리고 무분별한 은사 집회 등 감히 상식을 넘는 목회자들의 비행에 대해 구경만 하고 있는 교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항상 치리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 비리 목사가 제대로 치리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가재는 게 편이니까요.
이들 부패 세력은 언제나 어설프게 변조된 신학을 방패로 들고 나와 자신들의 변태적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합니다. 어떤 목사는 '목사에게 특별한 성직권이 있다'는 중세적 궤변을 늘어놓는가 하면, 다른 목사는 '목사는 하나님께서 직접 치리하시니 교인들은 간섭하지 말라'고 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교인은 의무적으로 헌금만 하면 되지 담임목사가 이를 제대로 사용하는지 볼 권리가 없다'는 뻔뻔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신학의 '시녀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신학이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패거리로 공조하고 급조한 '개똥신학'입니다. 분명히 신학교에서는 멀쩡한 개혁신학을 배웠건만, 막상 목회 현장에 와서는 터무니 없는 잡술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비하하는 개똥은 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개혁신학이라고 해서 천하무적은 아닙니다. 천사가 타락하면 사탄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한 신학도 일단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하면 불과 몇 세대를 못 버티고 순식간에 개똥신학으로 변질합니다.
필자는 작금의 '한국형 십일조신학'이 그 대표적인 실례 중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도 유독 한국교회 강단에서만 개나 소나 모두 나서서 '현대 십일조가 교인의 의무'라고 겁 없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진리와 진실에 눈을 감고 무식이 철철 흐르는 상업적 '어용 신학'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러운 일은 부패한 귀족 목사들이 그동안 자기 교인들을 꾸준히 맹신화하고 사병화한 덕분에 많은 교회에서 그들의 억지가 그냥 그대로 무마되고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유창하게 하고 교인들의 존경도 받는 어떤 목사들이 실상은 교회 돈을 열심히 뒤로 챙기는 고도의 직업적 종교사기꾼인 이유입니다.
주일에 형님 목사의 교회에 가서 고작 설교 4번 하고 400만 원을 받아 가는 것이 과연 양심적인 목회자가 할 짓인가요. 그것도 수 년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목사 일당이 무려 400만 원이나 되는 고수익 직업이 되었습니까?
더구나 그들의 신학교는 더욱 가관입니다. 교단 내의 교권을 장악한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로부터 교수들이 자유롭지 못 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교수 임면권을 교권주의자들이 쥐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보십시요. 소수의 양심적인 신학자들 외에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교회 부패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비록 답답해서 속이 터지더라도 입만 잘 다물고 있으면 그래도 연봉은 제 때에 나오니까요. 이게 요즘 바른 말을 하는 신학자들은 자꾸 뒤로 밀리고 껍데기 신학자들이 득세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슬픈 대세는 누구도 막기 힘든 상황입니다.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잃었다"는 말이 나온지도 이미 오래이니까요. 따라서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매우 험난한 미래가 한국교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른 신학이 교회를 정도로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부패한 교회가 신학을 오염시키고 있는 안타까운 형국이지요. 어떤 목회자들은 신학을 사욕에 따라 자의로 해석하며 교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저 종교적 제도에만 익숙한 무속적 신도로 우민화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신학의 결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현재의 비관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마냥 구경만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결국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최후의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니까요. 필자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어두운 여건 속에서라도 성도들은 결코 '신앙의 본질'을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는 신앙 생활을 마치 구약의 율법처럼 지나치게 매뉴얼화하고 형식화하여 교회당과 예배 속에 가두고, 신학을 너무 난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히 반성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세기의 신학자라 불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시카고신학대학에서 은퇴 강연을 마쳤습니다. 비록 그의 신학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찬반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가 통찰력을 지닌 매우 뛰어난 신학자임은 분명합니다.
당시 그 대학의 학장은 학생들에게 "박사님은 매우 피곤하셔서 학생들의 질문을 다 받을 수가 없으니 내가 대신하여 딱 한 가지만 물어 보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졌습니다. "박사님, 바르트 신학의 요점을 한 마디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물음은 수만 페이지의 복잡한 내용이 담긴 신학책들을 저술한 바르트에게 결코 간단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학생들은 20세기 최고의 신학자가 들려주는 자기 신학의 핵심을 듣기 위해 바짝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 바르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배우고 아는 모든 신학, 아니 성경의 교훈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
바로 그것은 우리말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이었습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이 찬송가를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샬롬!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