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대통령의 국어 실력

moonbeam 2015. 7. 1. 11:21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저도 당대표로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무수히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기까지 어려운 고비를 넘겨서(넘기며) 당을 구해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그러나 신뢰를 보내준 국민들에게(에 대한) 그 정치적 신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저도 결국 그렇게 당선의 기회를 달라고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①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만이 남았습니다.
→ 부사어 ‘그렇게’는 구체적이지 않아 헷갈리기 쉽다. ‘돌아온 것은~ 남았습니다’는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는다.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만이 남았습니다’ 혹은 ‘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뿐이었습니다’가 바른 문장이다.

개인적인 보신주의와 당리당략과 끊임없는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뒤흔들어 놓고 부정부패의 원인제공을 해왔습니다
→ 주어 생략/ ‘정치인들은’ 혹은 ‘여당과 야당은’이라는 주어를 넣어야.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여당에서조차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국회법 개정안으로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 불필요한 지시대명사 ‘그것’, 관형사 ‘이런’을 씀으로써 오히려 구체성이 떨어짐.

25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라는 격한 단어를 사용했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반감, 나아가 ‘역행하는 정치’애 대한 혐오감이 읽히는 대목이었다.
대통령의 연설을 자주 봐왔거나, 그 연설문을 꼼꼼하게 읽어온 사람들은 “특히 이날 발언은 대통령이 한 자(字), 한 자 내용을 적어갔을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 대통령 특유의 문장 특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소 긴 복문과 비문(非文)도 그 특성 중의 하나다.

대통령이 국어 교사나 신문사 교열 전문 기자만큼 국어 능력을 가질 필요는 없다. ‘비문의 왕자’로 통하는 부시 대통령 얘기는 외신 뉴스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문장도 조롱감이 된 적이 있다.
2008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고 박경리 선생의 빈소를 찾아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나라 강산을 사랑하시는 문학의 큰 별께서 고히 잠드소서.’ ‘이 나라 강산을 사랑하시던 문학의 큰 별이시여, 고이 잠드소서’가 적절한 문장이다. 2007년에도 이 전 대통령은 국립 현충원을 찾아 ‘당신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읍(습)니다. 번영된 조국,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모든 것을 받치겠읍(습)니다’라고 적어 논란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수가 ‘국어 시간에 졸아서’ 같은 단순한 이유로 보이는 반면, 박 대통령의 비문에는 다른 사연이 있는 듯 하다.
‘돌아온 것은 공허함만이 남았습니다’ 문장에서는 정치와 정치 행태에 대한 환멸이 강하게 읽힌다. 강조를 하고 싶어, 화가 북받쳐 실수가 나온 것은 아닐까.

대통령의 문장은 정치, 국회를 비판할 때 특히 꼬인다. 지난해 세월호 사태와 관련, 9월 16일 열린 40회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 내용도 문장이 어색하고 복잡하다

국민 안전을 위한 국가혁신과 안전처 신설을 담은 정부조직법도 언제 통과될지 알 수가 없어 현재 비상체제로 운영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해경도 제자리를 못 잡고 있고 다른 부처도 제기능을 못 하는 상태를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를 유발시킨다? 대통령 문장을 조롱하는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장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 연설문에는 ‘그런’ ‘그러한’ ‘이런’ 같은 관형사도 자주 나오는데, 앞 문장과 충돌하면서 전체적으로 뒤죽박죽 문장 같은 느낌을 준다. 지난 6월 9일 국무회의에서 메르스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은 이렇다.

지금 우리는 다변화되고 개방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떤 질병과 마주치고 또 한순간에 외부로부터 유입된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그런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 ‘~ 언제 어떤 질병과 마주칠지 모르고, 또 한순간에 유입된 질병에 걸릴 수도 있는 위험에 부닥쳐 있습니다’가 문장 전문가들이 권하는 명확한 문장이다.

현재 민간 전문가 중심의 메르스 즉각 대응팀에 감염 관리의 전권을 부여했습니다. ①그것은 전문가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 메르스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권한을 받은 것입니다.
→ ①문장에서 ‘그것은’은 불필요.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 메르스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전문가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가 읽기에 편하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박근혜 번역기’ ‘박근혜 문학상’ 같은 ‘놀이’가 유행이다. 대통령 화법을 놀이감으로 삼는 것이다. 대통령 측근들은 꽤나 심기에 거슬릴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저 아이들 유희로 내버려 둘 일이다.
정작 대통령을 보좌하는 이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대통령 ‘언어’의 품격을 유지하는 일이다. 25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발견된 비문이나 어색한 문장은 대통령이 ‘감정 조절’에 실패한 흔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대통령의 ‘격앙’은 아주 가끔만 드러나는 것이 품위 있다. 특히나 ‘품위’는 이전 다른 대통령이 갖지 못했던 박 대통령 만의 미덕이었다.

	박은주
박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