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의 한 떡볶이집 출입문에 폐업안내문이 붙어 있다.
폐업안내문 쓸 때의 심정은...
"그 동안 감사했다고 적었어요. 24시간 운영하던 가게라 새벽에 오시는 손님이 많았는데, 헛걸음 하실까 봐 걱정도 되고… 정이 많이 든 가게라 많이 착잡했죠. 가게 운영하면서 결혼도 했고 집도 샀거든요." /김문우(37ㆍ남) 연대 앞 식당 4년 운영
"한참 방황하던 29살에 알바로 시작해 30대의 전부를 바쳤는데... 망한 것도 망한 거지만 여기 쏟은 청춘을 정리한다고 생각하니 속 상하죠. 단골들한테도 많이 미안해요." /정은애(37ㆍ여) 이대 앞 의류매장 9년 운영
"회사 다닐 때 받던 연봉보다 더 많이 벌고 싶었는데 이 골목에선 힘든 것 같아서 다른 동네로 옮길 생각이에요." /김나영(41ㆍ여) 이대 앞 의류매장 2년 운영
"장사가 안돼. 복덕방에 내 놓은 지 1년 반이 지났는데 들어온다는 사람이 없잖아. 내달 10일이 계약 만기라 그 때 문 닫는 거야. 정리하고 나면 작품활동 하러 다녀야지." /박종익(67ㆍ남) 홍대 앞 사진관 37년 운영
"한 때 체인점을 낼 만큼 장사가 잘됐는데 본점 문을 이렇게 닫게 되어 많이 아쉽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이름으로라도 꼭 다시 일어설 거다." /민모씨 홍대 앞 식당 10년 운영
서울 이대 앞의 한 의류매장에 붙어 있는 정리 세일 안내문. 벌써 3~4년 째 문을 닫은 상태라고 주변 상인들은 전했다.
서울 홍대 앞의 한 레스토랑에 한글과 영문으로 쓴 폐업안내문이 붙었다.
서울 홍대 앞 한 라면 전문점의 폐업안내문
전국 자영업자 수 1년 전보다
5만 7,000명이나 줄어
거리에 눈물 젖은 폐업안내문이 늘고 있다. 텅 빈 점포엔'임대문의'가 나붙고 큼지막하게 '점포 정리 세일'이라 써 붙인 옷 가게는 어느 동네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문 닫는 점포가 늘면서 폐업을 체계적으로 도와준다는 '폐업 컨설턴트'까지 등장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월 기준 전국의 자영업자 수는 566만 9,000명으로 1년 전보다 5만7,000명이나 줄었다.
폐업안내문은 고객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이별 편지이자 재기를 다짐하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아쉽고 분하지만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 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 드리며 앞으로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기원합니다." 서울 홍대 앞에서 1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해 온 민모씨는 지난 5월 눈물을 머금고 폐업안내문을 써 붙였다. "몇 년 새 상권은 커졌지만 손님 수는 안 늘고, 경쟁은 갈수록 심해졌어요. 요새 홍대 앞에서 장사하기 힘들어요." 민씨 말을 듣고 보니 번화한 지역인데도 빈 점포가 적잖게 눈에 띄었다.
서울 홍대 앞 비교적 번화한 상가 곳곳이 비어 있다.
홍대 앞 치솟는 임대료 감당 못해
37년 된 사진관 내달 문 닫아
가게 문을 닫고 떠나는 이들 상당수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 때 자진해서 월세를 깎아준 건물주의 사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런 건물주를 만나는 행운은 웬만해선 찾아오질 않는다. 홍대 앞처럼 돈 맛을 본 상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임대 계약 2년이 되면 무조건 다 내쫓아요. 점포 사장이 한국말이나 문화에 서툰 교포2세라 건물주가 나가란다고 그냥 나간 것 같아요. 월세 올려주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테고, 한참 장사가 잘 됐었는데…" 개업 2년 만에 문을 닫은 식당을 바라보며 옆 점포 주인은 혀를 찼다.
홍대 앞에서만 37년째 사진관을 운영한 박종익(67ㆍ남)씨도 다음 달 사진관 문을 닫는다. 가장 번화한 곳에서 지금의 상가로 옮긴 지 3년 만이다. "5년 전 아름다운 거리 추진위원장을 맡아 거리 간판을 다 정리했어. 환경이 좋아지니까 찾는 사람이 늘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 때문에 쫓겨났어. 월세 올려준다는 사람들이 치고 들어오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밀려난 거지. 집주인들은 세를 한 번 올리면 내리는 법이 없잖아."
점포 정리 세일 안내문이 붙은 서울 홍대 앞의 한 의류매장.
서울 홍대 앞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 폐업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 이대 앞의 의류매장.
이대 앞도 대형 의류매장 생긴 후
골목길 소규모 점포들 타격
상권이 발달하고 대형 자본이 들어오면서 소규모 점포가 타격을 입는 일은 홍대 앞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화여대 앞에서 의류매장을 운영하는 김나영(41ㆍ여)씨 역시 9월 말 가게를 정리할 계획이다. 김씨는 "예전의 이대 앞 상권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몇 년 전 신촌역사에 대형 의류매장이 들어 오면서 이 골목이 죽기 시작했어요. 인터넷 쇼핑몰이 워낙 싸게 파니까 이젠 이 대형매장도 텅텅 비었어요. 이대 앞은 그냥 중국 관광객들 상대하는 화장품 거리가 돼 버렸다니까요." 김씨 바로 옆 점포 유리창엔 하트를 정성스럽게 그려 넣은 '정리 SALE'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상인들은"이 가게 문 닫은 지가 적어도 3~4년은 됐다"고 전했다.
진입이 비교적 쉬운 업종의 경우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경쟁이 한층 치열하다. 못 견디면 폐업이고 견뎌내더라도 내상은 심각하다. 연대 앞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김문우(37ㆍ남)씨는 올해 2월 사업을 접었다. 직장을 다니며 모은 돈으로 개업한 지 4년 만이었다. "비슷한 업종이 너무 많고 손님 수는 한정되다 보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임대료에 식자재비까지 많이 올라 힘들었죠. 그렇다고 음식가격을 올릴 수는 없고…" 김씨는 폐업 후 예전 직장을 다시 다니며 새로운 창업 아이템과 장소를 물색 중이다.
서울 영등포의 한 청과물 매장에 붙은 폐업안내문
가게 정리 후 공황장애 겪거나
가정불화로 이어지기도
성신여대 앞에서 만난 공인중개사 박모씨는 "주변에 가게를 정리하고 나서 공황장애를 겪거나 이혼 같은 가정불화로 이어지는 자영업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이 동네에서 살아남은 가게는 죄다 본인 인건비 깎아먹으면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적당히 했다가는 바로 망해요. 지금은 뭘 하든 레드오션(Red Ocean)에 뛰어드는 격인 만큼 남다른 실력을 갖추고 진짜 열심히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한달 전 이대 앞에서 운영하던 옷 가게에 '점포정리'안내문을 써 붙인 정은애(37ㆍ여)씨는 9년간의 사업을 통해 얻은 교훈을 이렇게 전했다.
서울 종로구 돈의문 뉴타운 개발지역 내 한 식당 출입문에 밀린 수도요금 청구서가 걸려 있다.
서울 대림역 내 한 점포의 폐업 정리 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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