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굽비오 현악기 제작학교 한국인 유학생 1호, 꼴찌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유럽의 스카우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귀국했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형태의 악기, 새로운 소리를 찾느라 미쳐 있는 그를 한국은 알아보지 못했다.
현악기장 박경호의 어린 시절
박경호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인 아버지는 짚공예, 나무공예 재주꾼이었다. 낮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면서 창을 했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의 손재주를 지켜보고 아버지의 창을 귀로 들으며 자랐다.
대학 갈 생각은 못해봤다. 고등학교는 김제로 유학을 갔으나 공부는 관심 밖이었고, 걸핏하면 결석을 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산과 바다를 찾아서 돌아다녔다. 바람소리, 파도소리를 듣고 싶었고, 나무 냄새에 취하면 마냥 행복했다. 장래희망 같은 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인생이 막막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여성복 디자인을 배워보고 싶어서 양장학원을 다니고, 의류회사 영업사원으로 26살까지 일했는데, 우연히 여성 결혼예복을 만드는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이 됐어요. 고급 여성복을 많이 만들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사업에 도전했죠. 결혼도 하고요. 그런데 타고나길 장사 수완이 없어요. 3년 만에 서울에서 모은 돈을 다 잃었어요. 그때 무작정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어요.”
소리에 인생을 건 현악기장 박경호.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찾는 그의 작업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 사진작가 장현우
냄새와 소리에 홀린 사람
1999년, 스물아홉에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가진 건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 한 장이 전부였다. 돈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고 싶었다. 피렌체 패션학교에 찾아가 볼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연히 패루지아 굽비오를 여행하던 중에 현악기 제작학교가 그 지역에 있다는 걸 알고 구경을 갔다. 유럽연합에서 지원하는 국립 현악기 제작학교(Maestri Liutai Scuola di Gubbio Italia) 내부에 들어선 순간, 햇볕에 잘 마른 나무 향기와 처음 듣는 달콤한 현악기 연주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나무 향기에 취해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현악기 제작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제가 나무 냄새와 아름다운 소리에 홀린 사람이라는 걸 그때서야 깨달은 거죠. 마침 신입생을 뽑는 기간이었어요. 원서를 쓰고 면접시험장에 찾아갔습니다.”
이탈리아 굽비오 악기 제작학교 한국인 1호 학생이 되다
영어도 이탈리아어도 못하는 동양인이 통역을 대동하고 현악기 제작(Maestri Liutai Scuola)과 활 제작(Maestri Archeta Scuola) 두 가지 전공에 응시를 하고 면접관과 마주앉았다. 면접관은 웃으면서 물었다. “현악기를 다루어본 적이 있습니까? 왜 현악기 제작자가 되려고 합니까?” 박경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현악기를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 순간, 나무 냄새와 현악기의 달콤한 소리에 취해버렸습니다. 입학을 허가해준다면 나는 좋은 악기를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교수는 나무판을 주면서 마음대로 깎아보라고 했다. 마음이 편안했다. 부안 시골집 헛간, 아버지 곁에 앉아서 이것저것 나무를 깎던 그날이 떠올랐다. 연장을 잡고 마음대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시험을 봤지만 합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아내에겐 3년제 패션학교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착한 아내는 자기가 돈 벌어서 유학비를 보낼 테니 열심히 배워 오라고 했어요.(웃음)”
굽비오 현악기 제작학교 한국인 1호 유학생이 되었다. 꼴등 입학생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언어공부를 하고, 하루 8~9시간 동안 악기 공부를 했다. 오전에는 실기를, 오후엔 이론과 연주를 배웠다. 강행군이었다. 학생들은 3년 동안 바이올린 2대를 겨우 만들고 졸업한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자 동기생들이 하나둘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무를 깎고, 모델 디자인을 하고, 두께 조절하면서 악기를 만들고, 칠하고, 말리고…. 현악기 한 대를 만드는 데 꼬박 2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한국에서 백화점 의류 판매원으로 일하는 아내가 보내오는 유학비로 시작한 공부였다. 바이올린 2대만 만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활, 클래식 기타 네 가지에 도전하겠다고 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각 한 대씩을 만들고 활 4대를 만든 후에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집에 작업대를 만들고 나무를 사와서 작업을 했다. 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안 되면 교장 집에 무조건 찾아가서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다.
별, 돌탑, 달 등 박경호가 만든 독특한 모양의 바이올린.
마에스트로 스파다피와 박찬일
굽비오 악기 제작학교 교장인 마에스트로 스파다피(Maestro Spattapi)는 한국에서 온 꼴등 입학생 박경호를 무척 예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해대는 그를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봤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집까지 찾아와서 1대 1 지도를 해주었다. 스파다피에게 기타(Chitarra) 제작 마스트 과정을 사사한 유일한 학생이 되었다. ‘우리 집에 언제든지 찾아와서 현악기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라’는 특혜까지 주었다.
“2000년에 완성한 바이올린 <지중해의 햇살>은 잊을 수 없는 작품이에요. 91세의 마에스트로 스파다피 집을 방문했는데 허름한 창고로 나를 데려갔어요. 솔솔 흘러나오는 송진 냄새에 정신이 아득했어요. 창고 안에는 잘 마른 나무가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온몸으로 흡입하고 있었어요. ‘포소 토카레?’(만져봐도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체르토’(그러시게) 하더군요. 손으로 나무 표면을 이리저리 쓰다듬어 보았어요. 나무의 점맥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밑동 부분이어서 매우 단단했어요. 입에서 군침이 돌았어요. 내 기색을 살핀 마에스트로가 ‘마음에 들면 가져가서 깎아라’고 했어요. 젊었을 적의 뜨거운 제작 열정으로 모아둔 나무들은 족히 30년은 햇살을 머금은 것들이었어요. 나이가 들어 손이 떨려서 더 이상은 악기를 깎지 못하고 있던 스승이 내가 점찍은 나무 한 판을 선뜻 내주었어요. 그 귀한 나무를 얻어와 바이올린을 깎았죠. 귀국하고 2년 뒤에 스파다피 선생이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혼자 며칠 동안 악기 칠을 하며 오래오래 애도했어요.”
박경호의 악기는 저마다 사연을 담고 있고, 그 사연을 닮은 소리를 낸다. 타국에서 만난 우정이 소중한 악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2002년에 굽비오에서 만든 클래식 기타 <찬일 TESTA> 또한 그의 분신과 같은 작품이다.
“박찬일 형은 시칠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마치고 페루자에서 와인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유학생들 형편은 다 고만고만했어요. 우리는 틈만 나면 만났어요. 그 무렵 졸업작품으로 클래식 기타를 만들고 있었는데, 나무 살 돈이 부족해서 몸통만 겨우 만들어놓은 채 손을 놓고 있었죠. 어느날 우리 집에 온 형이 헤드는 왜 없냐고 묻기에 다음달에 한국에서 아내가 유학비 보내오면 나무 사러 갈 거라고 답했죠. 형이 페루자로 돌아간 다음날 책 속에 든 지폐 몇 장을 발견했어요. ‘이 돈으로 헤드 만들어라. 큰 도움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모를 읽고 울어버렸죠. 덕분에 아프리카 산 마호가니로 헤드를 완성할 수 있었어요.”
<찬일 TESTA>는 박찬일의 뜨거운 우정과 박경호의 감사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깊은 소리를 낸다.
흙집의 작업대. | 사진작가 장현우
꼴등으로 입학하여 만점으로 졸업하다
2002년 9월, 졸업 실기시험에서 시험관 7명 전원은 박경호에게 실기점수 만점을 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입학시험 성적은 꼴찌였다. 유럽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박경호는 유럽의 스카우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귀국을 결정했다. 스승은 강하게 반대했다. 한국은 아직 악기 제작자가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니 자신의 추천서를 들고 나폴리나 일본으로 가라고 했다. 안정적인 수입과 대우가 보장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굽비오 수석졸업! 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003년, 서울 방배동에 ‘경호 park 현악연구소’를 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악기 제작에 전념하는 일은 무척 배고픈 일이었다. 대부분의 악기 제작자들은 악기 수리가 주업이 되었고, 그들의 연장은 녹슬고 있었다. 밥을 굶어도 악기 수리공이 되긴 싫었다. 악기 제작만 고집했다. 악기를 사겠다는 사람은 없고, 배우겠다는 사람만 줄을 섰다. ‘나도 아직 배우는 입장이다. 좋은 소리를 찾고 있는 실험기간인데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찾아온 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들은 악기 제작 학원으로 갔고, 단기간 수련을 거친 뒤 제작자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고자 고뇌할 시간도, 장인정신도 없이 정형화된 악기를 찍어내는 사람들만 많아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가난한 박경호를 더 안타깝게 바라봤다.
작업실 임대료는 매달 밀렸고, 나무 살 돈은 부족했다. 일용 노동자로 공사현장에 나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쉬지 않고 악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모양, 새로운 소리를 찾느라 미쳐 있었다. 하지만 한국 어느 곳에서도 박경호를 찾는 이는 없었다.
맹글면 팔리기는 허냐?
2007년, 낙향을 결심했다. 홀어머니가 계신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 2년 동안 황토집을 지었다. 낮에는 콩농사, 고추농사를 짓고 밤에는 악기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흙집을 짓느라 2년 가까이 조각도를 잡지 못했어요. 흙집은 악기를 제작하는 데 꼭 필요했어요. 집을 완성한 날, 연장걸대를 걸었어요. 악기인생 2막이 시작된 거죠. 어머니는 밤마다 아들이 무엇을 만들어대는지 빼꼼히 바라보며 심심함을 달래셨어요. ‘맹글면 팔리기는 허냐?’ 하며 걱정스레 말씀하셨죠. 그럴 때면 나는 껄껄웃음을 던지며 ‘내 아들놈이 좋겄지, 애비가 막걸리값이라도 남겨주고 가니 말이야’ 하며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을 웃음으로 덮었죠. 그 집에 잠시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며칠 전이 어머니 기일이었죠. 지금도 밤에 혼자 악기를 만들고 있으면 어머니가 어디선가 빼꼼히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요.”
황토로 짓고 너와 껍데기로 지붕을 덮은 흙집은 거대한 악기다. 그는 악기 안에서 악기를 만든다. 흙의 몸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음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박경호는 안다. 흙집 안에서 악기를 연주하면 소리의 공명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흙집을 떠나서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흙을 구워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만들고 싶었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도예과 교수들을 찾아가서 6개월만 함께 작업하자고 애원했지만 ‘부안 목수 박경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촌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학연·지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멸시를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주변 사람들이 말했지만, 그런 건 애초에 관심이 없는 삶이었다. 내년엔 어떻게든 도예를 배울 생각이다. 그리고 흙으로 구운 현악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부안 목수 박경호의 삶
“저는 부안 목수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촌놈입니다. 하지만 작품 철학은 확고한 사람이에요. 악기는 제작자의 철학을 담는 그릇입니다. 악기의 아름다움 속엔 소리의 풍성함도 공존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뒤틀림이 없고 소리값의 변화가 없어야 돼요. 죽어서도 그 제작자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니 몇 백 년 후를 생각하며 만들어야죠. 300년 가까운 세월을 지탱하며 지금도 연주되는 바이올린이 있잖아요? 수백 년을 내다보며 악기를 만드는 일은 경건하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배고픈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작품으로 승부하고픈 마음이 늙을까봐 두려워요.”
흙집에서 악기를 만드는 과정은 악기 장인의 경건한 수행과정과 같았다.
“흙집에서 칠하고 건조한 악기는 자연을 닮아서 자연을 닮은 소리를 내요. 유럽 중세에는 칠을 하기 전 몸을 깔끔히 한 후 칠을 했대요. 낮에는 농사짓고, 고요한 밤이 되면 어둠과 고요 속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칠을 시작합니다. 겨울철엔 난로를 피워 온도를 맞춘 후 칠하고 여름철엔 에어컨과 습도기를 가동하며 칠하는데, 흙집은 저절로 습도와 온도가 조절되는 신비한 곳이에요.”
별, 달, 돌탑, 한반도, 노동자의 노래
세상에 없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좌우대칭이 딱 맞는, 정형화된 악기만이 좋은 악기일까. 별, 달, 돌탑, 한반도 모양의 현악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새로운 악기통은 새로운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있을 것이고, 그 소리를 찾아내는 데 일생을 보내고 싶다.
“좋은 소리가 뭔가요? 우리 귀에 익숙한 소리가 좋은 소리인가요? 저는 익숙한 소리를 벗어나 새로운 소리를 찾고 싶어요. 왜 죽은 유명 제작자들의 악기를 모방·재현하며 기본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나요? 나는 밤하늘의 별, 달, 한반도, 돌탑 모양의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주변 지인들은 기존 모형도 팔기 힘든 판에 저런 변형 악기를 만든다며 조롱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존 악기의 곡선을 과감히 버리고 직선만으로 모양틀을 만들기도 했어요. 소리란 곡선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요. 고민과 실수 속에서 별, 달, 돌탑 모양의 악기들이 탄생했어요. 저는 오늘도 새로운 형태의 악기를 구상해요. 하나 된 한반도를 꿈꾸면서 한반도 모형의 바이올린을 최근에 만들었어요. 화합의 소리를 담고 싶었어요. 좌우대칭을 탈피한 모형이지만 공명을 튕겨보니 소리가 맘에 들어요. 지금은 ‘노동자의 눈물’이라는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어요. 철탑 위의 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 모형을 만들었죠. 돈이 없는 제가 연주자를 찾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마음을 함께하는 연주자가 나서 준다면 노동자들을 초대해서 무료 연주회를 열고 싶어요.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안을 줄 수 있는 소리를 찾으려고 작업 중입니다.”
그의 작업과정은 경건하다. 새로운 모형과 새로운 소리를 찾겠다는 그의 장인정신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이젠 돈 버는 현악기장이 되어 세상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사람들은 저에게 비주류라 말해요.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촌 목수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아직도 좋은 소리를 찾아서 실험하고 만드느라 시간이 부족해요. 더 좋은 소리가 또 있을 것 같아서 궁금해 죽겠어요. 소리에 인생을 건 악기 제작자 박경호는 비주류가 아닙니다.”
사람 부자 박경호
“저는 사람 부자예요. 며칠 전 아침엔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기에 바라지문을 열어보니, 마을 친구가 제 들깨를 마당에 널고 있는 거예요. ‘야, 나를 깨우지’ 했더니 농사일은 자기가 도와줄 터이니 악기 작업에만 신경 쓰라며 웃는 거예요. 그날 하루 종일 배가 불렀어요.”
그의 오랜 친구들은 말한다.
“현악기를 만드는 것이 천직이어서 세상살이에는 어두워 보이지만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사진작가 장현우)
“박경호에게 종종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들은 맞춤법이 엉망인데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지난여름에 나에게 나무 다루는 법을 어설프게 가르쳐주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나무만 보면 깎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거금을 들여 목공장비까지 구입하게 됐다. 그 싸가지 없는 인간 때문에 글쓰기에도 지장을 받고 있다. 제 속을 통째로 내보여주는 그에게 나 또한 뭐든 통째로 내줄 수밖에 없다.”(박남일 작가)
“우리 가을 나들이 나가자, 첼로야”
오늘 그의 페이스북에서 발견한 문구다.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데리고 콩밭에 가서 연주회를 열고 싶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낼은 콩을 베야 해요. 올해 고추농사는 망해서 적자봤어요” 하며 웃던 그을린 얼굴도 떠올랐다. 전국에 있는 박경호의 친구들이 기획한 <현악기장 박경호 작품 체험전>이 10월 22일부터 28일까지 <서울숲>에서 열린다는 연락이 왔다. 작은 음악회도 연다고 한다. 부안 목수 박경호의 분신들, 흙집을 벗어난 현악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저마다의 아름다운 소리로 마음껏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맹글면 팔리기는 허냐?' 걱정하며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격려와 응원으로 지원해주는 아내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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