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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화 지지 유언비어는 빵점

moonbeam 2015. 10. 29. 12:01

정용일 기자

심용환(38)씨는 학원 강사다. 10년째 중·고등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 그는 지난 10월15일부터 23일까지 4차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지지’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썼다. 페이스북에서 화제가 됐고 언론도 그의 글을 다수 인용했다.

그는 첫 번째 글 ‘국정화 관련 카톡 유언비어, 100퍼센트 거짓말입니다’에서 현 교과서가 북한에 우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이후 글에선 보수 대학생 단체(한국대학생포럼)의 주장, ‘(교과서에) 유관순이 없다’는 교육부 광고, 탈북자 출신 보수 인터넷 신문(<뉴데일리>) 논설위원의 칼럼 등을 차례로 반박했다.

지난 10월23일 오전 10시 서울 강동구에 있는 한 카페에서 심용환(사진 오른쪽)씨와 그의 학원 제자인 방창훈(22·연세대 문화인류학 14학번)씨를 만났다. 방씨는 북한 문체로 정부의 국정화 방침을 비꼬아 화제가 된 ‘국정교과서에 찬성하는 우리의 립장’(관련 기사▶“아버지 제사에 전 국민 강제로 절하라는 꼴”)이란 연세대 대자보 제작에 참여한 이들 중 한 명이다. 이들은 역사 교과서가 국정화되기 전부터 이미 대입 수학능력시험 한국사 문제가 교묘히 바뀌고 있다며 ‘국정화 이후’를 더욱 우려했다.

 

“역사는 정치적 합의 문제가 아니다”

10월14일 자정께 처음 ‘국정화 지지 유언비어’ 반박글을 올렸는데.

심용환(이하 심) 그날 저녁 대학생들과 역사 세미나를 했다. 세미나 도중에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는 내용의 새누리당 현수막 사진을 처음 봤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잠시 세미나를 중단했다. ‘역사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빨갱이나 간첩으로 규정될 수 있구나’라는 자괴감과 무기력감이 들었다. (내가 속한) 교회 문화가 비정치적이고 화목한 분위기여서 교인인 나도 정치·사회적 발언을 삼가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사 전공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느꼈다. 마침 밤에 카카오톡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유언비어가 교인들 사이에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밤 12시부터 시작해 10~15분 만에 ‘유언비어’ 주장 하나하나에 반박글을 달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렸다.

 

가장 인상 깊은 반응은.


오히려 제대로 된 반격이 없어서 인상적이었다. 누구는 이런 글이 국정원 공작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나는 기독교와 대학 내 보수 그룹 등 특정 세력이 만들어낸 글을 많은 이들이 내면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들 각자가 확신범이 되어 자발적으로 그런 글을 생산하고 있다고 본다. ‘(교과서에) 유관순은 없었다’는 교육부 광고에 대한 내 반박글을 소개하는 기사를 한 보수 언론이 썼는데 그 기사 댓글에 욕이 엄청 많았다. 그런데 논리적인 욕은 하나도 없어서 기뻤다. 생각보다 댓글들의 논리가 허약했다.

 

카톡 ‘유언비어’ 역사 점수는 몇 점?

빵점이다.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고 북한의 핵무기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기술되었습니다’라는 내용 등) 교과서에 아예 없는 내용을 이념적 틀에 끼워맞춘 것이거나 교과서 내용을 일부 가져다 악의적으로 편집한 내용이었다. (뉴라이트 교과서로 불리는) 2013년 교학서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거의 채택되지 않자 인터넷에선 다른 교과서들도 문제가 많다는 내용의 포스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포스팅들을 짜깁기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방창훈(이하 방) 교과서를 두고 친일 독재냐 좌편향이냐 이렇게 논쟁하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 역사는 학자들이 충분한 합의를 통해 통설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정치인들이 교과서에 ‘올바른’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규정짓고 이런 게 이해가 안 된다. 이건 정치적 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교과서 귀퉁이 단어까지 외우는 입시 현장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 학생들 입장에서 입시 준비가 수월해진다’ 또는 ‘어차피 현실에선 교과서를 안 봐서 국정화 논쟁은 공허하다’는 말은 입시 현장에서 설득력이 있나.

노무현 정부 초기 2003년부터 고등학교 국사는 국정교과서로, 한국근현대사는 검정교과서로 분리됐다. 학생들은 국사 교과서가 한 종류니까 교재 참고자료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다 외우는 식으로 입시 대비를 해야 했다. 책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이가 꽤 됐다. 교재 구석에 있는 단어 하나로 문제가 나오곤 했다. 한 권을 가지고 굉장한 암기 경쟁을 하는 폐해가 발생했다.

‘구석에 있는 단어’를 가지고 문제를 내지 않으면 등급이 나눠지지 않을까봐 그랬던 것 같다. 학생들끼리 ‘몇 쪽에 뭐 있는지 알아?’라고 서로 물어보며 책을 다 외워버리는 식으로 공부해야 했다.

국정화돼도 어차피 학생들은 교과서를 안 보고 EBS 보고 공부하니까 현실적으론 문제가 없다는 얘기도 한다. 하지만 EBS 수능 특강은 교과서 요약 방송이다. 교과서가 바뀌면 문제가 바뀐다.

 

국정화되면 실제 역사 수업 내용 중 달라질 만한 것이 있나.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검인정 제도가 강화된 이후 이미 바뀌고 있다. 수능에서 2004년부터 줄곧 한국근현대사나 한국사 과목 문항에 출제되던 통일 또는 북한 관련 문제가 지난해 처음으로 나오지 않았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교과서에선 ‘소득 증대의 효과가 있었지만 외형적 근대화의 한계가 있었다’는 취지로 공과 과를 모두 서술하고 있지만, 2011학년도 수능에 처음 출제된 새마을운동 관련 문제는 “정부가 행정력을 동원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를 옳은 보기로 고르도록 했다. 2~3년 전부턴 EBS 교재에서 보수우익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 밀고 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관련 지문과 문제가 많이 출제됐다. 교과서 전체로 보면 일부분이지만 국정화나 검인정 제도 강화로 수업 내용과 포인트가 달라질 수 있다.

학원 선생님들 중엔 ‘정부 성격이 이러니 통일 문제는 안 나온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친일·독재’ 국정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보나.

‘친일·독재’를 옹호하는 내용을 전면에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은폐하는 방향으로 서술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새마을운동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2011년도 수능 새마을운동 설명처럼) 당시 정부가 얼마나 노력했느냐를 중심으로, 통일 문제는 북한 인권 참상 비판을 중심으로 문제와 지문이 나올 수 있다.

 

논쟁이 한국근현대사에 집중돼 있다. 고대사 내용이 변할 가능성은.

역사학계에서 집필 거부 선언을 하고 있어서 역사학계가 사실상 배제되고 소수설을 지지하는 일부 학자가 무분별하게 집필진으로 들어오는 창구가 열릴 수 있다. 현대사뿐 아니라 고대사 서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한국 상고사에 관한 계연수의 저서) <환단고기>류의 사관이 반영되는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다(<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이 석기시대부터 동북아 지역 범위를 넘은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함).

 

“다양성 보장 위한 대안은 자유발행제”

야당은 검인정 제도 강화를 국정화의 대안으로 언급한다.

이명박 정부가 (2011년부터) 전면 검인정 제도로 바꾸면서 집필 기준을 엄격히 바꿨다. 검인정 제도 강화도 역사 수업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대안은 자유발행제다. 학교별로 진보든 보수든 참고자료를 자유화하고 역사 수업에 토론 시간을 배정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재수할 때 한국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했지만 지적 만족감은 얻을 수 없었다. 이번 국정화 논쟁에서 어이가 없었던 대목은 학교에서 북한 사상을 가르친다는 주장이었다. 수능을 세 번 봤지만 학교나 학원에서 북한에 대해선 거의 안 배운다고 보면 된다. 왜? 수능에 안 나오니까. 몇몇 선생님이 ‘혹시 모르니까 잠깐 설명하고 넘어갈게’라고 하는 수준이다.

이번 국정화 논쟁에서 느낀 점은 한국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무관심이다. 우리 역사를 외우고 시험 보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토론하고 대중교양의 수준으로 올리는 게 중요하다. 그런 장을 만드는 데 동참하겠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