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카카오 의장의 해외 도박 의혹 기사가 유력 일간지에 튀어나오기 하루 전, 나는, ‘카카오는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는 칼럼을 쓰고 있었다. 정부에 밉보인 기업이 한국서 사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모든 논란의 진실 여하를 떠나 무조건 고개 숙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비꼬아 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칼럼이 정부나 카카오 모두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출고를 하지는 않았다.
칼럼을 쓰려던 의도는 두 가지였다. 기업에 대한 사심 없는 애정을 정부에 촉구하는 게 첫번째고 너무 순진한 카카오 경영진에게 그 어떤 경각심을 주고 싶은 게 두번째다. 카카오 경영진은 한국적인 마인드보다 미국 실리콘밸리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로비라는 건 해본 적도 없고 할 마음도 없는 회사처럼 보였다. 기술과 비즈니스를 혁신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
다음날 문제의 기사가 튀어나왔고 나는 후회했다. 칼럼을 썼다한들 뭐가 얼마나 바뀌었을까 마는 그래도 해야 할 일을 외면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카오에 대한 정부의 적의(敵意)는 내 판단보다 훨씬 더 깊고 카카오는 진짜로 진즉에 무릎 꿇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카카오의 주역 중 한 명인 이석우 전(前) 대표가 회사를 떠난다는 기사를 데스킹하였다.
이석우 다음카카오 전 대표
나는 이 전 대표의 퇴사를 카카오의 항복 선언으로 읽는다. 논란이 됐던 감청이든 포털 다음의 좌편향 문제든 앞으로 정부 뜻을 잘 살필 터이니 이제 용서해달라는 게 이 전 대표의 사퇴 카드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미 감청은 받아들이기로 했고 좌편향 문제야 애초부터 그게 실재가 없는 허구이니 받아들이고 말 것도 없다. 카카오에 대한 정부 압박은 그래서 이제 줄어들 것이다.
이 전 대표는 그러므로 희생양이다. 모르긴 하되, 그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그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전 대표가 먼저 김 의장한테 그 뜻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죽여 전체를 살리는.
나는 그런 이 전 대표를 ‘구태(舊態)의 바위’에 날아가 깨진 ‘혁신의 계란’이라 생각한다. 퇴사 후 그가 무엇을 할지 아는 바 없지만 남몰래 흘렸을 그의 눈물과 밤마다 설쳤을 그의 고뇌를 짐작한다. 위로하고 싶다. 뛰어났지만, 결과적으로 외풍에 꺾인 한 벤처 CEO의 쓰린 가슴을 위무해 도전 의지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지는 것만은 막고 싶다. 그는 어찌됐건 한국 IT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 전 대표의 비운은 그가 구글의 수장이 아니라 카카오의 대표였다는 점에서 어쩌면 운명적이다. CEO인 그를 시험대에 올린 것은 경쟁 업체와 싸워야 하는 기술과 서비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이슈였다. 감청. 사용자의 신뢰를 기반으로 살아야 하는 서비스 업체로서 정부의 감청을 거부키로 한 그의 판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여기는 미국이 아니었고 카카오는 구글이 아니었다.
카카오는 또 정부와 여당엔 밉상이기 그지없는 포털 다음을 인수했다. 다음은 네티즌이 뛰어놀 수 있는 큰 마당을 제공한 게 전부인데 어느 날 보니 속된 말로 ‘좌빨’을 옹호하는 회사로 찍혀 있었다. 아무래도 젊은 층이 인터넷을 더 많이 썼을 터이고 정부에 대한 그들의 거친 발언이 여과 없이 개진됐을 터다. 그게 문제가 되는 세상이니 그걸 책임져야 하는 회사의 수장의 숙명이 뻔하지 않겠는가.
창조와 혁신은 사실 어디에서나 ‘문제적’이다. 구각(舊殼)을 깨는 게 창조와 혁신의 본질이고 그 파괴 과정은 요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의 포털이나 카카오의 공짜 메시징 서비스도 그 점에서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는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그 ‘문제적’인 현상을 예측하고 대처하는 힘이 너무 부족하다는 데 있다. 혁신을 되레 문제로 삼을 만큼.
이 전 대표의 퇴사는 그 점에서 우리 사회 수준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