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 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예산안 시정연설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중고교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잘못된 교과서로 잘못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 잡으려는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국가가 교과서를 1종으로 발행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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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대통령의 인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뒷받침하는 여당 새누리당을 이끄는 지도부는 대표 김무성, 최고위원 서청원, 최고위원 이인제 등이다. 특히 이들은 아예 공개적으로 박정희 이승만의 독재와 일제강점기의 폐해를 기술한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지칭한다. 더구나 김무성 대표는 이런 교과서를 만들고 가르치는 역사학자 90%가 좌편향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여 년 전 '역사 바로세우기'를 한 김영삼 대통령의 방식은 잘못된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이 글을 쓴다.
1. 김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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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총선으로 제1야당이 된 신한민주당 돌풍이 있었던 1985년, 서른다섯의 부잣집 아들 김무성은 <민족문제연구소>이사직을 맡으면서 야권에 몸을 담는다.(민족문제연구소는 지금도 친일파 문제에 가장 핵심적인 연구를 하는 단체다)
1986년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면서 김영삼계로 정치권에 발을 디딘 뒤 1987년 통일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987년 13대 대선 당시 통일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김영삼 후보 선대위 재정국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당 기획조정실 차장을 거쳐 1989년 국회 행정실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 당원이 되었다. 이어 민주자유당의 의사국장과 의원국장 등을 지냈으며, 1992년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대선 후보 추대대책위원회의 총괄국장을 맡았다. 이윽고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무성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을 거쳐 김영삼 정권 초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다음 1994년 내무부 차관을 지낸 뒤 1996년 민자당이 당명을 바꾼 신한국당 공천으로 제15대 총선 부산 남구 을에서 당선되었다.
2. 서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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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조선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들어 1980년까지 현역 기자로 정치현장을 취재했다. 중앙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그는 박정희의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반대한 6.3사태의 주역 중 1인이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은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하여 ‘굴욕회담’ ‘매국노’ '친일파' 등의 용어를 써가며 일본과 수교하려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판했다.
조선일보 중견기자이던 1980년 조선일보의 광주현장 파견기자로서 현장취재를 한 후 '당시 광주 참상을 보고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 그리고 1981년 민한당에 참여했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기록하고 있다.
이후 서청원은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므로 ‘야당 정치인’이 된다. 그러나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한당 서울 동작구 후보로 출마, 당시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 박실 후보와 여당인 민정당 허청일 후보에 이어 3위 득표를 하므로 낙선한다.
그러자 곧바로 김영삼-김대중이 만든 민추협에 가담 상임운영위원이 되면서 김영삼 측근으로 말을 갈아탄다. 이어 민추협 기관지인 민주통신 뉴스와이어 편집주간으로 활동했으며, 민추협 언론자유특별위원회 위원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87년 민중항쟁에 동참했다.
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은 모두 낙선하고 1988년 총선은 소선거구제로 바뀐 상태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동작갑에 출마 당선된 서청원은 이후 통일민주당 대변인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으로 중용된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에 동참, 보스 김영삼이 민자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 당선되면서 김영삼 정부 초대 정무장관으로 입각한다. 그가 정무장관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선언, 문민정부의 토대가 '광주 민중항쟁'임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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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인제
서울법대 재학 시절 '사회법학회' 회원으로 사회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태일 분신사건과 3선 개헌 반대운동 등 각종 시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유신 반대 운동 핵심 학생으로 지목되어 강제 징집당했다.
만기 전역 후 1979년 32세라는 늦은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 1981년에 대전지법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며 1983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러나 판사재직 3년 만에 옷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산업재해와 해고사건 등을 담당하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따라서 자연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변호사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이때 김영삼 눈에 들어 통일민주당 연구소에 픽업되었다. 그리고 1988년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제13대 총선 경기도 안양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당시 전국을 ‘청문회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5공청문회, 광주청문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김동주 전 의원등과 통일민주당 청문회 저격수란 별칭을 얻었다. 이인제가 유명해진 계기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재선의원이 되었다. 김영삼은 젊은 재선의원 이인제를 초대 노동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하여 1993년 입각했으며 1995년 6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첫 민선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4.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
박정희 전두환 정권 당시 투사형 야당 지도자 김영삼의 신념은 ‘독재타도’였으며,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김영삼의 대선구호는 '군정종식'과 '문민통치'였다. 그런 김영삼을 서청원도 김무성도 이인제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따랐다. 그들 입에서도 박정희는 독재자요. 독재는 타도해야 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김영삼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자후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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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저 자신의 열정과 고난이 배어 있는 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오늘 저는 벅찬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또한 험난했던 민주화의 도정에서 오늘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먼저 가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국민과 더불어 머리를 숙입니다”
김영삼이 이 연설을 할 때, 서청원은 정무장관, 이인제는 노동장관, 김무성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함께했다. 지금 그들이 ‘위대한 대한민국 역사’라고 칭송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대를 끝냈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김영삼에게 당시 그들은 열열한 박수를 보냈다.
그들의 보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독재와 강압으로 얼룩진 군부정권에서 호가호위한 기득권층들에게 숨을 쉴 수 없도록 집권 초기부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집권 첫해인 1993년 5월 13일 ‘역사 바로세우기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김영삼은 ‘문민정부’는 광주 5.18 정신의 바탕 위에 세워진 정부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제거했다. 5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는 이러하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우선 광주 시민과 온 국민이 그 날을 기념할 수 있도록 광주시에서 기념일을 먼저 제정하기를 희망합니다.
망월동 묘역은 민주성지로 가꾸어나갈 수 있도록 묘역의 확장 등 필요한 지원을 다할 것입니다.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의 의사에 따라 현재 광주시내에 있는 전남도청을 관내로 이전하고 당시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었던 현 도청 위치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세우는 방안을 적극 검토 지원할 것입니다. 현재 상무대 부지의 일부를 광주시에 추가로 무상 사용케 함으로써 시민공원을 조성하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및 부상자 중에서 아직까지 법률에 의하여 보상을 받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추가 신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당시 연행 구금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아 사면 복권된 분들에 대하여 전과 기록을 완전히 말소하고 지원 방안을 강구하는 등 그 분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에 헌신한 만큼 떳떳하게 그 명예가 회복되도록 할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재명수배를 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이를 해제하고 해직된 분들에 대한 복직 역시 적극 검토할 것입니다.
저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1993년 5월 13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
이어서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했다. 그 밖에 공직자윤리법도 도입하여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로 인해 그동안 군부독재에 협력하며 정치지도자연 했던 김재순 박준규 등은 부패정치인으로 몰려 정계 일선에서 사라졌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정치 자영업자들을 퇴출시켰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우대했다. 그리고 5.18을 공식 기념일로 했다. 이때도 서청원 김무성 이인제는 김영삼 정권 핵심이었다.
이윽고 김영삼 정권은 제5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 수감시켰다.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칼"을 들어 정치·경제·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일시에 쇄신하고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김영삼식 역사바꾸기다. 그리고 국민은 이를 호응 김영삼의 인기는 한 때 지지율 90%에 육박하기도 했다.
당시 MBC뉴스데스크 앵커는 “5.18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김영삼 대통령은 그동안 말을 바꿔온 것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의 맥락 속에 고민해온 것이라고 청와대 당국자들은 설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박광온 당시 MBC기자는 관련뉴스를 이렇게 리포팅 했다. 아래는 당시 리포팅 전문이다.
기자 : 김영삼 대통령의 과거사 바로잡기는 군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부터 시작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육성 : (49기 육사 졸업식, 93년 3월 5일) 다수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명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한다고 믿습니다.
이경재 육성 : (당시 청와대 대변인, 93년 5월13일) 12.12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인 사건입니다.
기자 : 4.19의 목표와 정신을 새 정부가 계승 완성시키겠다고 다짐한 김영삼 대통령은 5.16이 잘못된 역사의 출발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육성 : (취임 100일 기자회견, 93년 6월3일): 5.16은 분명히 쿠데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후퇴시킨 하나의 큰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기자 :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사를 복원하는 것은 역사바로세우기의 또 다른 한 축 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육성 : (48주년 광복절 기념일, 93년 8월 15일) 새 문민정부는 이 같은 임시정부의 빛나는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는 바로 서야 합니다.
기자 : 해외에 있던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과 청와대 본관으로 썼던 총독관저의 철거, 그리고 옛 총독부 건물의 철거로 이어졌습니다. 여전히 남은 것이 광주문제였습니다. 난폭한 시대를 거치면서 불의와 비리가 횡횡했고, 역사는 침묵했습니다. 광주는 이 시대의 전진을 가로막는 벽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육성 :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담화, 93년 5월 13일):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입니다.
강삼재 육성 : (민자당 사무총장, 95년 11월 24일) 당사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5.18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자 : 쿠데타의 싹을 자른 군 개혁은 쿠데타를 단죄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의 출발이 됐습니다. 때문에 특별법 제정은 더 큰 개혁의 디딤돌이 될 것이란 관측이 많습니다. MBC뉴스 박광온입니다.
이런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드라이브에 고무된 피해자들이 전두환, 노태우 前 대통령과 5공 실세 인사들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1996년 4월 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에게 반란죄, 내란죄, 수뢰죄가 적용되었고 전두환 前 대통령은 사형, 노태우 前 대통령은 징역 12년형에 처해지게 된다. 관련자들도 물론 단죄되었다. 이때 서청원 김무성 이인제는 국회의원으로서 김영삼 정권의 버팀목이었다.
지금 그들은 '박근혜식 역사 바로세우기가 진짜'라며 김무성은 쿠데타를 쿠데타라고 쓴 교과서를 바로잡지 못하면 나라가 절단날 것 같은 말을 하고 다닌다. 이인제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칭, “대한민국을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 산업화를 성공시킨 위대한 전략가와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중국은 모택동이 6천만 명 홍위병 죽였는데 격하하지 않는다”며 박정희와 이승만의 영웅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 서청원은 교육부의 의심스런 행정행위를 밝히려는 야당 의원들에게 ‘화적때’라고 호칭하기에 이른다.
그래서다. 그들에게 묻는다. 김영삼식 역사 바로세우기가 정당한가 박근혜식 역사 바로세우기가 정당한가? 다시 말해 ‘5.16은 분명한 쿠데타, 12.12는 군사반란적 쿠데타, 일제잔재 청산 민족사 바로세우기’가 정당한가 5.16은 불가피한 혁명, 일제강점기 근대화 유익‘이 정당한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식이 옳다면 당신들은 지금이라도 김영삼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종북적 성향‘이었다고 말하라. 그래야 당신들의 지금 정치적 스텐스가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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