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다 --- 5가지 이유

moonbeam 2015. 11. 19. 10:50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단순 간결’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권력욕의 화신

1945년 해방의 해는 이념을 초월한 혹은 이념을 포괄한 ‘단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1947년 이전까지 냉전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루즈벨티즘을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통합적 세계상에 공산사회까지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국무부는 미·소공동 위원회를 통한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미군정의 반발을 지속해서 누르며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 등을 후원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세계 정책이었습니다.

이승만 (1956)

이승만(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위해 적극적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최초의 남한 정치인입니다. 1946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과로 수립된 미·소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었을 당시, 국내는커녕 세계적으로도 ‘분단’은 생각지도 않았던, 바로 그 시점에 이승만 스스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이야기하며 ‘반공(反共)’이라는 주제를 정치 논쟁에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에 잠시 미국으로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북한의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적극적으로 ‘단정 정부 수립’을 실천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일성이 조소앙을 제거하고 이후 지속해서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를 제거했던 것처럼 이승만 역시 매우 적극적인 정치 행보로 자신의 이득을 관철해 나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차라리 ‘냉혈한 정권 쟁탈자’라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둘. 친일파의 친구 이승만

비단 헌법을 뜯어고치고, 독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었습니다.

친일파를 용납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친일파를 처리했다 안 했다는 얘기는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만을 고민할 뿐입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어떻게 전후 처리를 했는지에 비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정무위원의 상당수, 군의 주요 사령관, 경찰의 거의 전부 그리고 한민당으로 대표되었던 각종 친일 경력의 사회 세력이 모두 이승만 정권과 함께했습니다. 물론 이승만 본인이 능동적으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것은 상식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이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9년)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우선순위로 삼고 권력을 운영합니다. 독립운동 시절 하와이에서는 의형제 사이였던 박용만을 무력으로 쫓아냈고, 좌우합작운동을 권유해놓고 이를 통해 김규식을 몰락시켰고, 안두희를 통해 김구를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증거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후 안두희의 행적을 보십시오. 이승만 정권 내내 비호받고 출세를 누리던 그 특혜는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승만이 아니라 그 집단이 문제다? 이승만은 그 집단을 창출한 대표입니다. 대표와 집단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심지어 민족청년단이나 한민당과 같이 자신의 동지세력까지 무차별적으로 짓밟았습니다.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이범석이 몰락했고, 한민당은 철저하게 권력을 잃은 채 민주당이 돼버리고 맙니다. 모든 것은 ‘일민주의’, 이승만 유일 체제로 운영되던 것이 당시 아닌가요? 학급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붙어있고, 이승만 숭배 노래를 불러야 했던 시대. 대체 왜 이 시대를 향수하는 거죠?

셋. 45년 광복 아니라 48년 건국?

‘건국’은 왜곡되고, 한편으로는 미화된 표현입니다. ‘결과’를 바탕으로 한 ‘배제’의 또 다른 전형입니다. 1948년은 어떤 상상을 가져다 붙여도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나고, 조선이 광복하면서 새로운 현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방과 광복의 의미 이전에 세계사적, 한국사적 분기점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기준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겁니다. 삼국통일, 고려건국, 조선시대, 임진왜란, 강화도 조약. 이렇게 역사의 변화가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바로 그 시기를 역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1948년? 로마제국이 언제 건국되었는지를 배우나요? 프랑스 건국일은 며칠인가요? 미국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독립혁명이지 워싱턴 대통령 취임식이 아니지 않나요?

평양의 우익 민족주의자 조만식, 남한의 우익 민족주의자 안재홍, 김규식, 초기 이승만과 꼭 같은 궤적을 걸었던 우파 김구, 그리고 여운형, 백남운을 비롯한 수많은 중도파 혹은 타협적 좌파. 그 모두가 ‘당시’에 소망했던 것은 ‘남북한 단일 정부’ 즉, ‘통일 정부’에 대한 이상이었습니다. 즉, 당대 거의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소망은 냉전 이후를 사는 우리가 ‘건국’이라 부르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김구

냉정히 되묻고 싶습니다. 자꾸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어찌 됐든’식으로 말을 돌리지 마십시오. 누가 결과를 알고 있고, 누가 미래를 알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증오입니까, 평화입니까? 적개심입니까, 대안입니까? 미워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경계할 것을 경계하되 대범하고 담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승만과 달랐던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의 가치 있는 분투였고 그로 인해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넷. 이승만 띄우기의 진짜 목적은?

금일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하는 소위 ‘이승만 띄우기’는 매우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학문은 ‘입장과 주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일일이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의 학문적 저급함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수많은 연구 업적을 ‘종북, 좌빨’ 식으로 멋대로 짓밟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수준을 가지고 어떻게 ‘건국의 아버지’라는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몽구 김무성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가 다양한 이념을 흡수하면서 지극히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을 벌여왔습니다. 안창호는 철저한 기독교 반공주의자였으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좌우합작’을 주도하다 해방 전에 죽었습니다. 김원봉은 무정부주의 테러리즘 활동을 하다 중국 관내에서 무장 부대를 만들었고 결국 필생의 라이벌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해방을 맞았습니다.

신채호는 언론인으로 출발해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고대사 연구의 영역을 개척했고 무정부주의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의 울타리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그들의 국가가 만들어졌고 수많은 사람이 그 나라를 선택했습니다. 이 민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주워담을 역사가 어떻게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따위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다섯. 양민학살 책임자가 건국의 아버지?

한국 전쟁 중에 보여주었던 그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리더십과 거창 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제주4.3사건, 여순반란사건에서 엄청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그를! 어떻게 단순히 ‘상황을 내다보는 기민하고 노련하며 리더십 있는 정치가’라 쉽게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1951년 2월)

좋으냐, 나쁘냐가 아닌 좀 더 진지하며 보다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는 여건이 하루속히 마련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