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황교안·황우여 장로님께

moonbeam 2015. 12. 3. 10:34

공적인 지면이지만 개인적인 종교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황교안 장로님, 황우여 장로님. 저는 모태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교회에서 자랐고 지금도 그 소속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남에게 상처와 불쾌감을 주는 막말과 욕도 잘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성질을 부리는 일도 잦은, 허물 많은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두 분 장로님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제가 그저 신앙의 선배에게 드리는 질문과 하소연으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서 자라면서 가져온 믿음이 하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낸다면 정의롭고 훨씬 나은 세상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나 기업인들 중에서 크리스천이 많아진다면, 제가 속해 있는 사회가 복음화된다면 아마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초대교회의 모습과 같은 이상적인 사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꿈도 꿨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기독교 혹은 교회라는 단어는 배타성과 분열, 이기적인 탐욕의 상징이 됐고 크리스천에겐 ‘개독’이라는 오명이 붙었습니다. 장로님이 대통령을 지냈고, 또 다른 장로님들이 총리와 장관이 되어 활약을 펼치고 계신데도 왜 이 사회는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을까요. 두 장로님께선 오랫동안 법조계의 복음화를 위해 힘써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시대 법조계는 아모스와 시편의 말씀처럼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데 앞장서는 대신 요한복음 11장의 후반부를 재현하고 있는 걸까요. 로마정권에 결탁한 유대인 대제사장 가야바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치적 부담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던 모습 말입니다. 저는 최근 두 분의 모습을 보면서 총독 빌라도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에게 어떤 죄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총독의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갈등과 고민의 결과물이겠지요. 두 분 역시 고민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헌법과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일인 데다 다수 국민들이 반대하고,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권고가 이어졌으니까요. 설마 두 분께선 예전에 자신에게 맞서는 노동조합을 사탄으로 비유했던 한 장로님처럼 뜻이 다른 수많은 국민들을 사탄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아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이 곡의 가사를 쓴 존 뉴턴의 삶을 그린 영화 <프리덤>이 얼마 전 개봉됐습니다. 존 뉴턴을 이야기할 때 윌리엄 윌버포스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가졌던 엘리트 정치가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이 당연시되고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던 18세기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기득권과 보장된 미래를 따르는 대신 신앙과 인류를 선택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죠. 적대국이던 프랑스의 스파이, 매국노라는 비난에 시달렸고 암살 위협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세상을 바꿨습니다. 쉽지 않은 20년간의 길고 외로운 싸움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두게 될 것’이라는 말씀 아니었을까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독재정권을 극복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것도 이 말씀을 붙잡고 혹독한 시간을 견뎌 온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님. 상상도 못했던 퇴행적인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요즘을 보면서 저는 기도하는 대신 세상을 원망했고 현실을 도피할 방법을 강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제가 얼마 전 깨달았습니다. 저 말씀은 윌버포스뿐 아니라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주셨다는 것을요. 하나님이 이끄실 선한 결과를 위해 기도할 겁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낙심하거나 지쳐 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거두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박경은 | 대중문화부 차장 ki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