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머리 굴리기(펌)

욕설이 근친상간을 좋아하는 까닭

moonbeam 2015. 12. 16. 10:26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욕설은 일종의 비평(criticism)이다. 비평 중에서도 그 효과나 파문이 강력하다. 욕설을 하는 방법은 욕설로 굳어진 말들을 골라 쓰는 방법이 있고, 상대방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인신공격이나 어떤 맥락 속에서 격렬한 비웃음과 원색적 비판을 섞는 방식이 있다. 전자도 강력하지만 후자도 강력하다. 가끔 두 가지 방식을 섞어서 효력을 더 키우기도 한다. 가끔 국회에서 발생하는 멱살잡이는 앞의 욕설과 뒤의 욕설이 오간 다음의 일인 경우가 많다. 국회의원이란 잘 훈련된 공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그들의 욕설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욕설은 사실, 배운 사람이 덜 하란 법은 없다. 욕설은 본능이다. 다만 그것을 억제하는 내면적 기술이 발달될 수는 있으며, 그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터득할 수는 있다.

욕설이 기본적으로 비평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대방이나 상대방 무리의 문제에 대한 비평을 핵심적인 업(業)으로 삼는 국회의원들에게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해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때로 직업상 전략을 넘어선 ‘흥분’과 ‘적개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마저도 계산된 비평이며 효과를 고려한 언어행위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욕설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욕설이 과열된 비평이라면, 그들에게 이런 과열된 비평은 적절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열된 비평을 억제하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타협을 얻어내는 역량이다. 욕설은 비평이긴 하지만 비평의 핵심적인 함의인 ‘이성과 논리’가 빠져있다. 게다가 문제의 본질에 다가선 비평도 아니다. 그것들은 피상적인 외양에 꼬투리를 잡는 것이거나 근거없는 흠잡기이거나 무리하게 비약된 과장법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욕설이라는 비평은, 품격있는 삶의 울타리 밖으로 추방 당했다. 그 욕설들이 가끔 담을 넘어와 기승을 부리는 때는 흥분과 분노와 무절제의 공기가 뒤섞여 흐르는 자리에서이다. 가끔 집단적 광기도 이 수다스런 손님을 부른다. 한 욕설이 오시기 시작하면 이곳저곳 담을 넘어 여러 욕설이 미친 듯 몰려온다. 그들이 우리의 억제정책에 힘을 못쓰고 추방되긴 하였지만 아주 멀리 도망가서 사는 건 아닌 모양이다. 늘 우리의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공기만 이상해지면 달려온다.

욕설 중에서, 맥락의 욕설은 워낙 광범위하고 다양해서 다루기 어렵다. 내가 대상을 나름대로 붙잡아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굳어진 관용의 욕설’이겠다. 우선 왜 욕설을 하는가를 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왜 욕설을 하는가. 내가 생각해낸 답은 ‘알 수 없다’이다. 욕설이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비평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공격적 언어’가 굳어진 형태라고 설명할 수 있겠으나 반드시 그것 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욕설은 남을 공격하기 위한 말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어떤 영향을 미친다. 욕설을 발음하는 일에는 수치와 쾌감이 이상하게 맞물려 있다. 이 엇갈린 두 감정은, 억압된 금지어를 깨는 것에 대한 내면의 반응인 듯 하다. 욕설은 바로 ‘학습된 금기’가 우리 혀를 굳게 해온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 의식과 무의식에 숨어있거나, 언어의 변방에 억눌린 채 흩어져 있다. 욕설을 하는 일은, 체제의 가치관과 반복학습된 '교과서언어'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우리의 의식을 옥죄어온 ‘똑바른 삶’의 갑갑함은 욕설이라는 ‘자해(自害)’에 의해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이 점이 쾌감을 부르는 것인지 모른다. 이 즐거움 때문에 인간은 그토록 경멸하는 욕설을 아주 버리지 않고 가끔씩 꺼내서 사용하는 것일까.

고전극의 풍자마당, 혹은 현대적인 코미디나 사회비판 연극 속에서 우리는 자주 욕쟁이들을 만난다. 그 욕설들을 들으면서 즐거워 한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칼국수나 만두를 파는 음식점의 주인할머니가 욕을 잘한다고 해서 ‘욕쟁이 할머니’라 부르는 걸 봤다. 손님들은 그곳의 음식이 맛있어서도 가지만 욕설을 듣는 것이 재미있어서 가기도 한다. 욕설에 자주 붙는 긍정적인 형용사로 ‘걸쭉한’이란 말이 있다. 걸쭉하다는 것은 묽지 않고 진하고 싱겁지 않고 건더기도 좀 있고 그래서 목구멍에 쉽게 넘어가지 않고 목젖 쯤에서 가슴을 콱 친 뒤 넘어간다는 말이다. 이 형용사는 욕설의 매력을 잘 포착하고 있다. 욕설은 평소엔 잘 안먹는 것이며 가끔 별식처럼 먹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음식이 갖춰야할 미덕이 아니라 다른 미덕을 갖춘다. 그것은 톡 쏘는 맛일 수도 있고, 목젖을 확 젖히며 꿀꺽 삼키는 맛일 수도 있고 속까지 꽉 밀어붙이는 묵직한 맛일 수도 있다. 그것은 평소엔 금지된 음식이기에, 호기심과 금기 깨는 파격의 쾌락이 뒤섞인 특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이제 욕설 각론에 들어가자. 굳어진 욕설은 그 의미로 파악할 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상대방의 신체적 행동적 정신적 열등(劣等)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보, 병신, 등신, 축구(畜狗), 쪼다, 머저리 등의 욕설이다. 둘째는 질병의 욕설이 있다. 옘병(염병)할, 미친 놈년, 또라이 등이 그것이다. 이 욕설의 변종에, 신이나 자연의 징벌을 담는 경우도 있다. 벼락맞을, 천벌을 받을, 뒈질 등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형벌의 욕설이 있다. 넨장맞을(亂杖맞을, ‘젠장맞을’은 ‘저 난장맞을’, ‘난장’은 몽둥이로 마구 패는 형벌), 오라질(오랏줄로 묶일), 찢어죽일, 제기랄(제기를 할, ‘찢어죽일’의 뜻), 육시랄(戮屍를 할, ‘시신을 다시 찢어죽일’의 뜻), 쳐죽일 등의 욕설이다. 이런 욕설의 변종으로, 형벌에 가까운 저주를 담는 경우가 있다. ‘빌어먹을’이 그것이다. 네 번째는 가장 흥미로운 사례인데, 근친상간에 관한 욕설이다. 인간에게 가장 질기게 붙어다니는 욕이기도 하고 가장 흔한 욕이기도 하다. ‘개’가 들어가는 욕은 대부분 이 계열로 보면 틀림없다. 개새끼, 개자식, 개같은 놈, 개판, 개지랄 등에서 개는 바로 ‘어미와 공공연히 붙어먹는’ 근친상간의 짐승이란 의미이다. ‘씨팔’이라는 흔한 욕은 바로 ‘네미씹할’(‘네 어미와 섹스를 할’이란 뜻이다)이란 말이 압축되면서 변형을 이룬 것이다. 욕설은 그것이 지닌 수치감을 숨기려 자주 기묘한 형태로 변화한다. 저 ‘씨팔’만 해도 ‘씨발’ ‘씨뿔’ ‘씨부랄’ ‘씨불’ ‘씨삘’ ‘씹탱’ ‘씨’ ‘샤오팔’ ‘18’ 등의 다양한 변종을 거느린다. ‘네미랄’이란 말은 ‘네 어미를 할’이란 말이 줄어들었고, 위의 ‘개’ 계열의 욕설에서 ‘개’대신 ‘씹’으로 바꾸는 계열도 생겨나는데 이 또한 정상적인 성적 결합이 아닌, 근친상간의 암시가 배어들었다. 단순히 성기만을 거론하며 ‘* 같다’ ‘* 만하다’ 라는 말을 쓰는 변종욕설도 있는데, 이는 성기의 변덕스런 특질을 부각시킨 것이거나, 작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내가 관심있게 생각하는 것은 왜 욕설에 근친상간이 저토록 흔하게 들어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나는 욕설을 원시적 두려움을 숨기고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원시부족, 그리고 고대 인간에게 경쟁적 열위와 질병과 형벌은 끔찍한 공포였다. 그 공포를 남에게 내던짐으로써 가학적인 쾌감과 자기 방어적인 위안을 삼으려고 고안해낸 ‘거친 말’들이 욕설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근친상간의 두려움은 그것들보다 더 오래된 원형(原型)의 공포를 이룬다. 인간들이 모여 무리생활을 시작할 무렵, 그 구성원의 숫자는 적었을 것이다. 근친상간은 이 무렵의 피할 수 없는 성적 환경이었을 것이다. 이후 인지가 발달하면서 다른 부족과 교류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성적인 질서가 생겨난다. 많은 고대국가의 왕족들은 누이나 사촌과 결혼하고, 심지어 어머니와 결혼하는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원시적인 성적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근친과의 성적 결합에 대한 사회적 금기가 생겨나면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식과 무의식에, 그 행위에 대한 수치감과 공포를 함께 심어왔을 것이다. 욕설은 그 과정에서 그 금칙을 뒤집어 상대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어 왔던 것 같다.



기원전 700년 무렵,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테오고니아(神들의 역사)’라는 작품을 썼다. 그 속에는 기이한 신들의 족보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 주목할 만한 신은 대지의 신 가이아다. 가이아는 혼자서 어떻게 했는지,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를 낳는다. 그리고 우라노스의 동생인 폰토스(산과 바다의 신)를 낳는다. 그런데 가이아는 자신의 아들인 우라노스와 성관계를 갖고, 티탄 12남매(남자 여섯, 여자 여섯)를 낳는다. 그리고 또 외눈거인 퀴크로투스와 괴물 헤카톤 케일(50개의 머리와 1백개의 팔을 지녔다)을 낳는다. 아버지인 우라노스는 나중에 낳은 저 괴물자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가이아의 태 속으로 아이들을 집어넣어버린다. 이 행동에 화가 난 가이아는 티탄들 중에서 가장 젊고 용감했던 크로노스에게 무기를 만들어주고, 아버지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가 가이아와 섹스를 하고 있는 현장을 덮쳐, 아버지의 발기된 남근을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진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갈라선 뒤, 다시 아들인 폰토스와 관계를 갖는다. 한편, 가이아의 아들 크로노스는 그 누이인 제이아와 결혼을 하는데, 아이를 낳는 족족 다 먹어버린다. 왜냐하면 그 아이 중에서 하나가 자신의 왕권을 빼앗을 것이라는 귀띔을 가이아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헤시오도스가 기록한 저 신들의 근친상간은 놀랍다. 신들에게는 물론 인간의 수치(羞恥)가 없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런데 저 상상력에는, 성적 환경의 문제가 개입되었을 것이다. 즉 성관계를 가질 대상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근친상간 뿐이라는 점 말이다. 가이아가 낳은 괴물들은 어떻게 보는 게 좋을까. 근친상간이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과학적 담론들을 신화에 끌어다가 경탄을 하는 일은 옳은 것일까. 그건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어쨌거나 그런 부적절한 결합이 기형을 낳을 수 있다는 공포심 만은 확인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저 원시적 가족 관계에서 ‘신’으로 표현된 인간은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여준다. 즉 아직도 가족이라는 개념이 서 있지 않으며 가족애와 가족윤리가 생겨난 것은 상당히 역사가 진행된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헤시오도스가 표현한 근친상간의 공포는, 우리의 욕설 속에서도 뚜렷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우리의 고대사 또한 저 금칙이 생겨날 무렵의 사회적 각인(刻印) 작업이 만만치 않은 강도로 진행되었음을 짐작한다. 씨팔. 그 말 한 마디에는, 최소한 단군 이래 5천년 역사의 길고긴 악몽과 공포가 담겨있다는 얘기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