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제목만 읽는 대통령 --- 서민

moonbeam 2016. 1. 8. 07:20

입력 : 2016.01.05 14:16:16 수정 : 2016.01.05 21:42:38

작년 4월1일, 만우절을 기념해서 ‘서민 교수, 고래회충 감염 입원, 충격!’이란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을까봐 본문에는 이게 거짓임을 알 수 있는 장치를 몇 개 넣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내연녀와 천안의 수산시장에서 우럭 2마리와 광어 3마리를 나누어 먹은 뒤 귀가했”다든지, “현재 서씨는 D병원 일반병동에 입원 중이며, 안정을 위해 면회객을 자유롭게 받고 있다”는 대목을 읽으면 ‘아, 만우절 거짓말이구나’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화를 걸어 왔으니 말이다. “많이 편찮으세요? 제가 지금 문병 가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프셔서 어떡해요 흑흑.”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내 글에 무더기로 속아 넘어간 건 제목과 사진만 봤을 뿐 본문은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스마트폰 시대가 개막된 뒤 부쩍 심해졌는데, 언론사들이 독자를 낚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싸이월드를 즐겨하실 정도로 인터넷에 강했던 박근혜 대통령도 본문을 진지하게 읽기보다는 제목만 보는 스타일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세월호가 침몰한 날, 오후 5시가 넘어 대책본부에 나타난 박 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이 말씀이 뜬금없었던 건 그때는 학생들 대부분이 배 안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는데, 대통령의 발언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떠 있는 상황을 전제한 것이어서다.

청와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행적이 베일에 가려졌던 7시간 동안 무려 21차례에 걸쳐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당시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이유가 뭘까?

좌파들은 대통령이 보고를 아예 받지 않은 게 아닌지 의심하지만, 국가적 재난이 벌어졌는데 대통령이 그 사건을 나 몰라라 하고 다른 일을 봤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또한 좌파들은 대통령이 보고를 받았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한다. 아니 명색이 OECD 국가의 대통령이 보고서 따위를 이해 못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은 대통령이 스마트폰 시대에 걸맞게 보고서의 제목만 읽었고,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리라.

요즘 박 대통령이 국회한테 통과시켜 달라고 사정을 하는 법안이 있다. 소위 노동개혁법으로, 작년 말에는 “만약 국회의 비협조로 노동개혁이 좌초된다면 역사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저렇게까지 나서는 걸 보면 법안이 아주 훌륭하리라 짐작하겠지만, 내용을 훑어보니 별로 그렇지가 않다.

이 법안에서 도입하려는 조항 중 하나가 비정규직을 4년으로 늘리는 것. 지금은 비정규직을 2년 쓰면 해고하든지 정규직으로 고용하든지 택일해야 하는데, 이걸 4년으로 늘리겠단다. 이렇게 되면 청년들이 매우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게 이 법안의 취지라는데, 여기엔 맹점이 있다. 비정규직의 처우가 열악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 기간을 늘리는 게 청년들에게 좋은지도 의문스럽지만, 그렇게 됐을 때 기업들이 웬만해선 정규직을 뽑지 않으려 할 것 같다는 게 더 우려스럽다. 생각해 보라. 4년간 싸게 부려 먹을 수 있는데 뭐하러 정규직을 채용하겠는가?

휴일노동에 대한 가산수당을 삭감하는 것도 노동자 입장에선 손해고, 노동자 파견이 가능한 업종을 확대한 것은 이 법안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게 해준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사람을 쓰면 마음에 안들 때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경영자들의 모임인 경총을 비롯한 경제 5단체가 노동개혁법안의 빠른 처리를 국회에 촉구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국회가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것은 “일자리를 갈망하는 청년들의 요구를 저버리”는 일이 된다고 말한다. 설마 대통령이 내용을 다 알고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대통령이 재벌의 앞잡이이자 청년층을 평생 저소득 비정규직의 굴레로 몰아넣으려는 음모를 가진 분이란 말인데, 내가 지금까지 봐온 대통령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셨다. 유신이 종식된 1979년부터 정치판에 입문한 1998년까지 거의 20년가량을 별다른 직업 없이 사셨던 만큼,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청년층의 열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는 분이 바로 박 대통령이 아닌가? 그럼에도 대통령이 이러시는 건 법안을 읽고도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면, ‘노동개혁법’이라는 제목만 봤을 뿐 그 내용을 제대로 훑어보지 않았던 탓이리라.

 

아무 권한이 없는 젊은이들이 제목만 보고 오해하는 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말 한마디에 여당 원내대표와 검찰총장을 날릴 수 있는 대통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너무 바쁘셔서 수없이 올라오는 보고서나 법안을 제대로 살피기 힘든 점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시간을 내주시면 좋겠다.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