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교회가 죽지 않으려면 --- 강만원

moonbeam 2016. 1. 21. 08:29

이 글은 목사에 관한 이야기지만 장로들의 문제도 크다.

목사 옆에 붙어서 간사한 꾀로 좌지우지 하는 아집에 사로잡힌 장로와 권사들...

교회가 죽지 않으려면...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부정과 불의를 지켜보면서 분명히 느낀 점은,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다르고 늙은 목사와 젊은 목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목사 같은 목사와 목사 아닌 목사가 다를 뿐이다.

갓 개척한 교회의 30대 목사도 대형교회의 60대 당회장 목사와 전혀 다름없이 <권위적>이다. 목사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양처럼 어리석은 교인들을 제대로 보살피기 위해서 당연히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목사의 개인적인 생각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30-40대 목사가 60-70대 아버지뻘 되는 교인들에게 <교만하다>고 나무란다. 잘못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교회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며, 악한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주의 사자인 목사에게 감히 <반론>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개혁 운운하며 많은 교인들이 교회의 변화를 갈망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목사들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차라리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미 목사들이 교권을 장악해서 <목사교회>로 변질된 한국교회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며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말 타면 종 부리고 싶고>, 몸이 따뜻하면 멋진 옷이 입고 싶어진다. 제도적으로 목사에게 권력을 몽땅 주고 나서 <겸손한 목사>, <성경적인 직분의 목사> 운운하는 것은 어설픈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목사들 가운데 윤리적으로 남달리 모범적인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데 한 눈 팔지 않고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목회에 열심인 목사들도 있다.

목사들의 자질에 대해서 말들이 많지만, <오직 성경>을 부르짖으며 말씀에 전념하는 목사들을 보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일단 내용은 차치하고, 목사연하는 사람치고 <말씀>에 대해서 나름 깊이 있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실한 주의 종으로서 허튼 권위의식을 버리고 교인들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목사들을 보는 것은 마치 가뭄에 콩을 보거나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

왜 그럴까?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들치고 처음부터 <섬기는 종>의 자세를 마음에 담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텐데, 정작 섬기는 종으로서 교인들을 <존중>하는 목사들을 보기가 이토록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목사라는 자신들의 직분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부터 잘못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직분의 정통성에 상관없이 목사들은 자신들이 목자이며, 교인들은 주께서 자기에게 주신 양이라는 <왜곡된 주인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즉, 자신들이 돌보지 않으면 교인들은 (영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목자와 양>, 따라서 목사는 목자로서 자신들의 양을 돌보는 소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일까? 그것이 과연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한 것일까? 이는 성경 해석에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터무니없는 소리다. 우선, 베드로에게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께서 네 양을 먹이고 네 양을 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내 양>,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양, 하나님의 양>을 돌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주인으로서 양에 관한 모든 권한을 지닌 목자가 아니라, 다만 <주인의 양을 섬기는 종의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종인 목사들의 양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의 양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주인의 소유를 함부로 대하는 종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을 뿐이며, 종에게는 양을 제멋대로 다룰 어떤 권한도 없다. 종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오직 자기 생명을 바쳐 양을 지킬 책임과 의무가 있을 뿐이다.

주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을 정녕 잊었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종은 자기가 할 일을 했다고 상을 받거나 보수를 요구할 수 없다>고...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교인들이 늘었다고, 교회가 자립했다고 자기 몫을 챙기는 요즘 저 잘난(?) 목사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께서 <내 양을 치라, 먹이라>고 하신 것은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가 마치 사람과 어리석은 짐승처럼 우열과 주종의 관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양은 열등한 짐승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하나님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양>이라고 부르시지 않는가. 성경은 마지막 심판을 기록하면서, 저주받은 염소와 구별해 구원받은 백성을 양으로 상징하지 않는가.

성경적인 의미에서 양은 목사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이며, 베드로에게 양을 치고 먹이라는 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를 종은 생명을 바쳐 섬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입으로는 종이라고 말하면서 목사가 감히 교인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내 양을 치라, 먹이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바로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이 네게 띠 띠우며,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신 구절에 주목하라. 그것은, <네 생명을 바치라>는 무서운 말씀이다. 목사가 되면 고급차에 고급 아파트, 고급 의상에 고급 호텔이나 드나드는 요즘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 구절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까?

양으로 상징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종보다 우월한 신분이라는 것을 목사들은 반드시 명심하라. 당신들이 교인들을 자기보다 우월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지닐 때 목사는 진정한 주의 종으로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다.

이런 말을 아무리 해도 사실인즉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외치는 이유는, 목사들이 지금처럼 <외식하는 자>의 자리에 있다면 한국교회는 한 세대를 넘기기 전에 텅 빈 유럽 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을 떨칠 수 없으며, 그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행동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정녕 처참하게 망하지 않으려면 서둘러 취해야 하는 <처방>이 있다. 그것은 목사가 목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며, 목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말씀과 교육에 전념하고 교회의 행정에 관한 모든 권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즉, 돈에 눈 돌리지 말고, 인사에 신경 쓰지 말고, 기획이나 운영에 한눈 팔지 말라는 말이다. 목사가 말씀에만, 오직 성경에 입각해서 말씀에 전념할 때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때 비로소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에 따라 서로 섬기는 사랑의 신앙공동체로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교회의 권력자로 교인들을 지배하는 순간, 교회는 권력의 속성에 따라 탐욕과 교만, 이기심과 거짓, 질투와 배척이라는 부패의 영성에 휘말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죽은 교회>는 다름 아닌, 교회에 목사가 있지만 예수가 없고, 설교가 있지만 성경이 없고, 신앙이 있지만 구원이 없는 외식하는 교회가 아니던가.

진정한 영적 권위를 지니기 위해서 목사는 주저 없이 육적인 권력을 버려라. 재정, 인사, 행정에 즉각 손을 떼고 오직 말씀에 전념하라는 말이다. 교회에 갈등이 생기자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재정출납에서 손을 떼고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옛날에 거기서> 했던 흘러간 옛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Here & Now) 당신들에게 전하는 <현재진행명령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