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헌금없는 주일

moonbeam 2016. 1. 15. 09:19

최근 '높은뜻정의교회'가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시작하여 교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매달 세 번째 주일에 헌금을 교회에 내지 않고, 교인들이 선교나 구제에 직접 사용하도록 하는 운동이다.

 

 

찬반이 뜨겁게 표출

오대식 담임목사는 이 운동을 미국 캘리포니아 '코스테스힐교회'에서 실시한 '하늘나라 프로젝트'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그 프로젝트는 100명의 지원자에게 100달러씩 나누어주고서 이 돈이 하나님의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오직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만 사용하도록 했다. 나중에 NBC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그 결과 보고 자리에서는 눈물의 간증이 이어졌고 구체적인 결실이 많이 맺힌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온라인에서는 초반부터 찬반이 뜨겁게 표출되고 있다. 찬성하는 측의 의견을 보면 "훌륭한 생각이다.", "한발 앞서는 것이 감동입니다.",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 것을 목사님이 마음대로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지도 묻고 싶다. 목사님을 위한 것 최우선으로 지불하고, 남는 몇 안되는 밥풀 가지고 교회 운영하고 그리고 무슨 구제를 한다는 것인지.", "속이 시원해지는 좋은 운동이다.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심지어 "반대로 한 달에 한 번만 헌금을 받으신다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는 분도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어이가 없네 이게 과연 개혁이냐?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예배때 내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지", "예배도 인본주의고 인기주의고 복지군요!", "많은 교회들이 선교와 구제에도 헌금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세상 앞에서의 교회의 명망을 위해 이런 날을 굳이 만들어서 헌금의 본질을 흐리고 교회를 흔드는 모습이 우려스럽다", 그리고 "헌금의 본질적 용도와 부차적 용도를 혼동하는 지극히 영적으로 둔한 가치관에서 나오는 주장이네요"라는 다양한 반론이 있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자주 느끼는 사실이지만, 특정 사안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상반된 다양한 생각들이 가능한지 늘 놀랍기만 하다. 아무튼 필자는 여기서 "왜 그리 하면 안 되나?"를 역으로 자문해보았다.

 

▲ 높은뜻정의교회는 매월 셋째 주일을 헌금없는 주일로 지킨다고 한다. 대신 정의헌금을 드리는데 이 헌금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전하기 위해 교인들이 직접 이웃과 나누는 헌금이라고 교회는 설명한다. 사진은 오대식 목사 설교영상 갈무리와 교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정의헌금 이미지의 합성이다.

 

 

왜 안 되나?

우선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예배때 내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약교회의 예배는 구약의 무슨 희생제사가 아니다. 즉 예배마다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런 바침은 이방 종교들이나 하는 행위이다.

본래 신약 교회의 연보란 구약의 제물처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는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제사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고후9:11)"라며 연보의 목적이 '사람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같은 장 앞부분의 "성도를 섬기는 일(고후9:1)"도 역시 연보를 의미한다.

실제로 사도들의 교회에서 공식적인 헌금은 오직 구제를 위한 '연보'만이 있었을 뿐이다. 십일조도 없었고, 건축헌금도 없었다. 후일 추가적인 용도로 연보가 선교와 사역자를 위해서도 일부 사용되었지만, 적어도 '예배 도중에 헌금을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은 신약 성경에 결코 없다. 초대 교회의 예배에는 헌금채를 돌리거나, 헌금함을 들고 기도하는 순서 자체가 아예 없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고 권면한 사도바울의 이 말씀은 당시 교회가 매주 연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슴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연보가 예배 순서에 없었으니 어떤 주는 안 한 것이다.

따라서 '헌금의 본질적 용도'를 지적한 다른 분의 주장 역시 큰 설득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교회를 흔드는 모습이 우려스럽다'는 견해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인들이 헌금을 직접 집행한다고 해서, 그게 어찌 교회를 흔드는 일이 되는지 정말 당혹스럽다. 그 돈이 없으면 교회가 큰 피해를 입고 망하기라도 한다는 뜻인지. 오히려 교회가 교인들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예배도 인본주의고 인기주의고 복지'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인본주의'란 용어를 어떤 뜻으로 사용한 것인지 도리어 묻고 싶은 심정이다. 선교를 하고 이웃을 돕는 데에 헌금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지극히 '신본주의'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선교와 구제는 반드시 예배당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큰 오류가 아닐까 한다. 성도 자신과 그들의 가정도 이미 충분히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교회가 교인들의 개인적인 형편을 자세히 파악하고 직접 돕는 데에 여러모로 한계와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나의 형제나 자매가 얼마나 궁핍한지 잘 모른다. 삼촌이나 이모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조카의 등록금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른다. 노부모님의 밥상이 얼마나 열악한지 모른다. 이웃에 사는 독거 어르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른다. 친구의 파산을 모른다. 직장 동료의 실직을 모른다. 그리고 같은 동네 미자립교회 목사님의 월세가 얼마인지 모른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빛날 '명품'

이제 과거처럼 공교회라는 '단일 통로'로 선교하고 구제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공교회가 하도 거짓말과 기만을 많이 해서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깊히 신뢰하지 않는다. 말로는 늘 사랑을 노래하면서 돈만 모이면 대형 건물 올리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외면하는데 누가 교회를 신뢰하겠는가. 웬만한 동네 교회 담임목사가 장관보다 더 많은 고액 연봉에 고급차 타고 우쭐하는데 누가 그들을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믿어줄까. 턱도 없는 소리이다.

앞으로는 성도들이 직접 몸으로 선교하고 구제하는 시대라고 믿는다. 교회사를 잠시 살펴 보아도 공교회가 제대로 교회다운 적은 지극히 드물었다. 소위 성직자란 위인들이 틈만 나면 신도들을 등치며 외도한 것이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성경도 '가라지'를 말하지 않던가. 이는 당돌하게 '교회 불신'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숨길 수 없는 냉엄한 역사이기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여하튼 결론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다. 공교회가 타락한 시대에는 성도가 교회다. 유형교회인 공교회가 순수하고 헌신적으로 사역을 잘하면 그것은 정말 감사하고 좋은 일이다. 그런 경우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크게 격려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교회에 너무 기대지 마시기 바란다. 말세에는 교회답지 못 한 교회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가오는 새시대에는 전문직 선교사가 선교하고, 교회 부서가 구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공교회 사역의 부족한 부분을 성도들 각자가 분담하여 가정, 학교, 직장, 사업장, 그리고 지역 사회 속에서 직접 나누는 일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해야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높은뜻정의교회'의 교인들과 교역자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 '헌금 없는 주일' 운동, 정말 멋진 사역이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빛날 '명품'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8:14)."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