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종교적 열심과 제지도, 진리의 종교화 --- 신성남

moonbeam 2016. 2. 1. 17:02



<종교적 열심과 제자도>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이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한 마디로 요약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반면에 지금 현대 교인들의 생활은 어떠한지요. 대부분의 신도들은 한 주일 내내 각종 예배와 모임으로 분주합니다. 아울러 여러 직분과 직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대충 정리해 보아도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반사, 구역장, 권찰, 성가대, 기관장, 부서 임원, 조장, 그리고 순장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물론 이런 사역들이 그리 가벼울 리가 없습니다. 가정과 생업 또는 학업에 책임을 갖고 있는 신도들에게 때로는 적지 않은 짐이 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의 일’이라 생각하기에 기꺼이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신앙 생활에 대한 오해가 간혹 발생합니다. 즉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헌금 많이 하고, 심방 잘하고, 맡은 직책이나 부서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행위 자체를 매우 훌륭한 신앙 생활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위와 같은 것들이 신앙 생활의 진정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인은 ‘바리새인’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수시로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과 절기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부활과 천사와 영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유대교의 가장 엄한 종파로서 당연히 토색과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매주 두 번씩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신도들이 충성도가 매우 높다고 하지만, 과연 바리새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종교적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요즘 ‘주일 성수’ 문제로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그들의 안식일 성수에 비하자면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몇해 전 뉴욕에 사는 유대교 랍비 솔롬 에머트가 도로에서 무단 횡단하다가 근처에 있던 한 경찰관의 단속에 걸렸습니다. 경찰관은 에머트에게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발부하기 위해 신분증을 요구했고, 에머트는 얼마 떨어지지 않는 집에 가면 신분증을 갖고 나와 제시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경찰관은 그의 집에 가는 것 대신 강제로 그로 하여금 이름과 주소를 직접 쓰게 했습니다.

유대교 의례에 따라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글 쓰는 행위’를 하지 않던 에머트는 이후 경찰관의 강제적인 명령이 부당하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해당 경찰관은 다른 경찰서로 전출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금도 많은 유대교도들은 율법의 안식일을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중세 수도원의 고고한 수도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유대교의 바리새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라고 감히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삶이 종교였고, 종교가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종교적 열심에 몰두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하셨던가요. 잘 아시는 그대로 ‘독사의 새끼’나 ‘지옥 자식’이라고 하셨고, 또한 “화가 있으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종교 생활’에서는 대단한 열심과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바른 ‘신앙 생활’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즉 바리새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른 지식이 없는 종교적 열심은 결국 맹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진리를 종교화하는 데에는 탁월했지만, 그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삶에서는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이 형식이나 제도를 무조건 부인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진리의 껍데기는 잘 취했지만, 그만 그 알맹이를 상실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점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진리의 종교화>

이처럼 본질의 껍데기만 취하면 기독교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하나의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세 교회는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도 무려 천 년을 버텼습니다. 종교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 교회가 변질하여 종교화하기 시작하면 이를 다시 되돌리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종교의 기득권에 취한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 불의한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고, 종교의 보호막에 안주하는 신도들은 웬만해선 스스로 각성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종교라는 틀 속에서 우민화한 신도들은 결국 맹신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대개는 아무 분별력이 없이 그저 지도자가 하자는 대로 순응하는 신도가 됩니다. 모이라면 모이고, 돈 내라고 하면 돈 내고, 그리고 집 짓자면 집을 짓는 맹종이 체질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습해도 마냥 할렐루야하고, 교권을 함부로 남용해도 오로지 아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과 맹신도들의 무속적인 장터로 변합니다. 성경과 십자가는 단지 장식품이 되고, 종교적 허울 속에서 세속적 명리와 기복을 서로 열심히 사고 파는 것입니다. 이른바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도처에 교회와 수도원과 기도원을 세우고, 매주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와 각종 예배로 분주히 모여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요란한 통성 기도도 헛되이 공기만 울릴 뿐입니다. 유명 목사들이 정치권을 흔들고, 집사가 재벌이 되고, 그리고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봤자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지도자나 신도들이 모두 한통속으로 무속적 염불에 몰두하고 있는데 무슨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거짓된 종교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기 힘든 이유는 바리새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람들에게 선생이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켰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위선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진리가 잘못 포장되어 외면화하고 종교화하면 이런 끔직한 일들이 발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