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며 살기(펌)

제주4.3사건의 올바른 역사인식, 전염병처럼 번지기를

moonbeam 2016. 4. 6. 14:07



김용옥 시인의 "세상 톺아보기"를 연재합니다. 이 연재의 주제와 소재는 역사인식 사회인식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지식인 특히 문인의 올바른 "앞장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 그런 점에서 이 연재는 아주 훌륭한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편집자말) 

 

설날이 지나서 묵은 감자의 껍질을 벗긴다. 한겨울까지 보관된 하지감자를 깎아 카레라이스를 만들려는 것이다. 독성이 강한 감자의 싹눈을 도려내다가 ‘아아, 지슬!’ 신음처럼 말이 나오며, 손질하던 손이 무뎌진다.

 

  
▲ 지슬을 꼭 쥔 채 피투성이로 쓰러진 어머니를 망연자실 바라보는 아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한국현대사의 불편한 진실들에 눈 감고 모르쇠로 살아온 국가의 인사(人士)들 때문에, 진실한 역사정리를 못한 정부 때문에 빚진 죄인처럼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는 가슴에 국난의 비애와 분노를 안고 살아온, 슬픈 한국인. 한참 전에 제주도 거친오름 자락의 4.3평화공원을 몇 바퀴씩 돌며 가슴 메는 속죄를 했어도 내 가슴은 아직도 겨울비처럼 한기를 품고 있다. 그런 판에 오열 감독의 영화 <지슬>과 임흥순 감독의 영화 <비념>을 독립영화관의 스크린으로 열 명 남짓 관객과 함께 보았다. 여러 가지로 비통했다.

2013년 5월. 한국처럼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베를린에서 ‘한국영화의 오늘’이란 영화제를 열었다. 개막작은, 제주4.3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지슬>이었다.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가로 살아가는 한국정부의 인식과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문화의식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 영화의 영화적인 완성도와 성공은 아무래도 괜찮다.

빌어먹을 이 나라에선 제작비를 풍덩 투자하는 역사의식 투철한 제작자도 없거니와, 대박을 내줄,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또는 가지려고 노력하는 관객들도 거의 없으니까. <쉰들러 리스트>처럼, 너무 잔혹해서, 어차피 화려한 칼라로 사실적으로 찍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여 가위표를 받은 어릴 적 시험지처럼 까맣게 잊은, 약소국가 한국의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만들어 지성적 철학적 국가 독일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렸다.

아직도 한국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규명하고 반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수치스럽다. 마치 싹눈이 돋은 감자를 씹은 것처럼 쌔하고 아리다. 한숨과 뜨거운 눈시울로 오열 감독에게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2013년 초. <지슬>은 세계에 군림하는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미국이 대한민국을 약소국가로 신탁통치 하던 역사의 현장을, 미국인은 후손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가 정답이란다. 오호 통재라!

 

  
▲ 영화 <지슬> 포스터

1999년,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면서 비로소 역사적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한 셈이다. 어렸을 때 어른들의 대화 아랫자리에서 귓등으로 얻어들었던 일들이 사실이었다. 제주도에는 바람과 돌과 여자만 많은 게 아니다. 하늘을 원망하는 분노와 피맺힌 설움과 뼈저린 외로움의 넋이 반세기 넘도록 떠돌고 있다.

<지슬=감자의 제주도말>. 늙은 어머니가, 자식의 밥줄이며 생명줄인 지슬을 쥔 채 총살당했다. 어머니의 안부가 염려되어 땅굴에서 내려간 아들은 어머니의 주검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조상신을 섬기는 한국인이 말이다- 마루와 토방에 나뒹구는 감자를 주워 안고 땅굴로 돌아와, 며칠의 목숨을 목 메이며 이었다. 하지만 화염으로 거의 몰살당했다.

영화<지슬>의 마지막 자막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미군과 미군정당국”이라는 글귀였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Ⅱ>는 제주4.3사건으로 원한을 남기고 사라져간 제주도민초들의 제사이며, 억장 무너진 채 벙어리 냉가슴으로 살아온 한국 민초들의, 아직도 숨죽인 울음이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역사의 사실이다.

1948년 4월 3일에 시발된 제주도민 집단학살사건은 1954년 9월에 이르도록 제주도민을 화염과 총검으로, 재판절차도 없이, 살해하고 대살(代殺, 미국의 꼼수대로 신탁통치를 하게 하기 위하여 제주도 양민을 공산군 대신 죽임)했다.

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패전한 일본의 식민치하를 벗어난 한국은 미국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자유와 자주를 갈망했다. 반만년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의지를 모르쇠하고 들어선 미군정의 섭정을 당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선포에 의해서 그냥 선량한 민중일 뿐인 제주도민을 좌익 불순분자로 무더기무더기 내몬 것이다.

 

  
▲ 제주 4.3사건 희생자를 상징하는 보각물(제주 4.3평화기념관)

나라에 대한 반역과는 무관한, 당시 20여만 제주도민 가운데 3만여 명이 괴뢰군처럼 무차별적으로 희생되었다. 사망자 중 10 살도 안 된 무구한 어린이가 5.6%, 여성이 21.1%나 되며 당시론 파파노인인 61세 이상의 노인이 6.2%였다. 그들의 철천지한(徹天之恨)을 모른 채, 반세기 가까이 군사정권하에서 우리는 살았다.

1991년.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여명의 눈동자>를 방영했을 때, 소설가 현기영이 피가 고인 가슴으로 쓴 소설 <순이삼촌>과, 4.3사건을 아홉 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목격한 현길언 작가가 쓴 <한라산>을 다시 읽었다. 그때부터 4.3사건이네 여순반란사건이네를 들먹였지만 주위사람들은 대부분 강 건너 얘기처럼 멀뚱했다. 청미래덩쿨이 비에 잘 젖지 않으며 불을 붙여도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 먹구슬나무에 돼지의 목을 매달아 도축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어진 제주도 양민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런 양민들이 만월표고무신만 운동장에 나뒹굴게 내버려 둔 채 어디로 사라졌을까. 목숨줄이나 진배없는 지슬을 내박친 채 어디로 달아났을까. 중산간 마을 95%에 불을 질러 태우고 구워 죽인, 천벌 받을 죄가 없는 저 양민들의 넋은 어느 구천을 헤매고 있을까.

자박자박 걸음마를 하던 아기가 총탄에 죽고(너븐숭이 애기무덤), 임산부를 발가벗겨 대검으로 찔러 죽이고(비학동산), 양민을 줄줄이 세워놓고 그야말로 드르륵 총살한 흔적(섯알오름)이 곳곳에 널려 있다. 이 광란의 학살비극을 끌어안고 공포의 제주도를 멀리 떠난 실향민들은 우울증과 분노와 굶주림으로, 고향을 지긋지긋한 지옥으로 기억했다. 그들의 가슴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원한 맺힌 분노를 누가 씻어주어야 하는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국가권력의 잘못”이라고 제주4.3사건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적어도 올바른 정치인이라면 정부가 국민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 속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가한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기 전에, 약소국가인 우리에게 가한 미국의 범죄를 눈감아주기 전에, 은폐되고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직시하고 고쳐놓아야 한다. 아직도 나는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두렵다.

 

  
▲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4.3사건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생각한다. ‘쓸모없는 것에 철학과 사색을 담는 것이 예술이다’고 한 오열 감독의 말을. 오욕의 역사를 이해하기 쉬운 영화로 만들어 알려도 정치인과 국민들이 깨어나지 못하는 절망을. 그러나 문학이건 예술이건 영화건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문화의식이 있어 다행하다. 문화는 일종의 전염병이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이 젊은 지성들에게 전염병처럼 번지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까.

역사를 캄캄하고 막막하게 하는 장막의 한 자락이라도 용감하게 부욱 찢어내려야 한다. 진정한 미래가 오게 하기 위하여. 아픔을 직시하며 성장할 때 역사에 어릿광대짓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끔, 부정부패로 세운 권좌와 유전무죄의 어리석은 문화가 판을 치는 나의 나라에 돌을 던지고 싶다. 비록 우리의 발등을 찧는 일이 될지라도. 아파 보아야 철이 든다.

 

김용옥 시인 kyok8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