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박근혜 뽑은 신학생, 길거리서 노래하는 이유

moonbeam 2016. 5. 22. 17:27


- 세월호 계기로 신앙 전환 맞은 김이슬기 씨…교회·신학교가 전부였던 삶 깨기까지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김이슬기 씨를 처음 본 곳은 광화문광장이었다. 매주 토요일 열리는 촛불 문화제에서 동그란 안경을 쓴 20대 청년이 기타 하나 메고 노래하고 있었다. 기타를 치는 손길은 거침없어 보였고 목소리에 힘을 주거나 억지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현장에 나온 인디 가수인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신학생이었다.

2015년 4월 세월호 1주기 추모 현장에서 만난 그를 그 뒤로도 여러 현장에서 만났다. 김이슬기 씨는 육우당 추모제에서도 노래했고 최근에는 옥바라지 골목에서도 노래하며 현장을 지키고 있다. 꼭 투쟁 현장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5·18 민주화 운동 36주년을 맞은 화창한 날, 서울 수유동 한신대 신대원 캠퍼스에서 김이슬기 씨를 만났다. 그는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노란 리본 배지를 달고 있었다. 검정 티셔츠는 오전에 있었던 5·18 특별 추모 채플을 위해 학생들이 나눠 입은 옷이었다.

  
▲ 김이슬기 씨를 만난 날은 5·18 민주화 운동 3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전날 서대문구 옥바라지 골목 강제 철거 현장에서 용역들과 몸싸움을 하다 어깨를 다쳤다며 불편한 모습을 보였지만 밝은 얼굴로 인터뷰에 임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투쟁 현장에서 노래하는 한신대 신학생이라고 하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편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정치나 민중신학에 관심이 많아 현장에 뛰어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김이슬기 씨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예수를 믿으며 참 여러 차례 신앙의 굴곡을 경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그와의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귀신 들린 아이가 예수쟁이 되기까지

- 지금 신대원 목회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부에서도 신학을 전공했나.

학부에서도 신학을 전공했지만 한신대 출신은 아니다. 나사렛대학교 출신이다. 모교회는 나사렛성결교단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교회였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기도 했다.

- 그럼 모태 신앙인가.

아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교회 오면 문화 상품권 주고 예쁜 학생들 많다고 해서 갔다.

- 고등학교 때 교회 다니기 시작했으면 신학과를 가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사실 중학교까지 우울증이 심했다. 헛것도 자주 보고.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몸은 분명히 엄마가 맞는데 얼굴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일도 있었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받고 약도 먹었는데 부모님은 의학보다 미신의 힘을 더 믿으셨다.

귀신을 내쫓는다고 세 차례 정도 굿을 했다. 충남 서산에 가서 팥 뿌리고 몸을 맞으면서 귀신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아프고 괴로우니까 나도 모르게 막 빌 정도였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굿하고 왔더니 그 뒤로 학교에서 '귀신 씌운 애'라는 낙인이 찍혀 철저하게 혼자 지냈다.

그러다 한 친구가 불쌍하다고 교회 데리고 갔는데 거기서 또래들을 만나니까 좋았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10대 시작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재밌게 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다. 그때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구원의 길로 이끄셨구나'라는 의미를 자꾸 나에게 부여했다. 교회에서 활동도 열심히 하고 사역자 말도 잘 들었다.

그러던 중 일이 생겼다. 예배 인도하던 때였는데, 그때 다른 교회 다니는 여학생과 연애하고 있었다. 나중에 교회에 이 사실이 알려졌는데 목사가 대뜸 하는 말이 '어디 더럽게 연애하면서 예배 인도를 하고 있느냐. 너 딱 봐도 하나님보다 그 여자애 더 사랑한다. 예배 인도하지 말라'고 해서 그만뒀다.

교회 다니고 나서 오히려 가세가 기울어 집도 없어졌는데 그 안에서 자꾸 긍정적인 의미를 찾으려 했다.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찾아내고 있었다. 교회 어른들도 '하나님이 너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건 나중에 크게 쓰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너를 더 많이 사랑하시나 보다. 이렇게 고난을 겪게 하시는 걸 보니까'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주셨는데 역설적이게 그 말에 더 위로를 받았다. 내 고난이 정당화되는 것 같아서.

신학교에 가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하루는 고등부 친구들과 찬양 집회에 갔다. 거기서 유명 CCM 사역자에게 안수받은 이후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확신했다. 제일 친한 친구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함께 나사렛대학교 신학과에 갔다. 다른 교단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속한 교단 대학에 입학하는 게 너무 당연했다.

  
▲ 사회문제에 관심 없었던 신학생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눈을 떴다. 이후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고 투쟁 현장에서 자작곡을 부르며 연대했다. (사진 제공 김성만)

- 학교에서는 어땠나. 그때도 아직 길거리로 나오기 전인 것 같은데.

맞다. 그때는 음악할 때도 아니었다. 학교와 교회에 순응하며 살았다. 신학과에서 가르쳐 주는 게 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신학이라는 학문에 열정을 가졌다기보다 '나는 목사가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생활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별 고민 없이 살았다. 학교 말을 얼마나 잘 들었느냐 하면 우리 학교는 지난 대선 때 아예 대놓고 학생들에게 박근혜 뽑으라고 했다. 나도 지난 대선 때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신학과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학교와 교회 외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안에 있는 학생들은 '나사렛' 외에는 전혀 모르고 산다. 한쪽으로 치우친 환경에 처해 있다 보면, 눈을 돌려 다른 것을 봐야 하는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데, 내가 딱 그랬다.

- 학부는 별 문제의식 없이 만족하면서 마쳤다는 건가.

학부 끝날 무렵 약간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는 누구인가>를 읽고 내가 여태껏 배운 신학, 알고 있던 신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희미하게 느낀 것 같다. 2013년에 학교를 졸업했는데 곧바로 신대원에 진학하지 않고 1년 뒤에 가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 '우물 안 개구리'였던 김이슬기 씨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신앙을 새롭게 재정립했다. 그는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인생을 바꾼 2014년 4월 16일

- 보수적인 신앙에서 시작해 신학교까지 나왔다. 목사와 교수 말에 순종하고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았는데 언제부터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이상하게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배가 빠졌다고 시작한 뉴스부터 '구조됐다', '아니다', 배가 가라앉는 뉴스까지 하루 종일 뉴스만 본 것 같다. 배가 가라앉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하나님은 절대 보편적이고 모두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를 보면서 목격한 것은 누구를 위해 누구를 희생하거나, 어느 한쪽 편만 드는 하나님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모든 신경이 세월호에 쏠려 있었다. 이전에 해 본 적 없는 고민이 자꾸 들었다. 대형 교회 목사들이 세월호 참사를 설교 예화처럼 쓰는 것을 보고 크게 충격받았다. 어떤 교회가 전도지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세월호 사건을 이용하는 것도 봤다. '아이들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이런 콘셉트로 만들었는데 그걸 보면서 분노가 차올랐다.

4·16은 나에게 '예수 사건'이었다. 구원을 받는다는 거는 내가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자격 없는 나의 위치를 알게 해 준 것이 세월호 참사였다.

세월호 이후 경험한 구원 사건 없이 살았다면 그냥 평범한 목사가 됐을 거다. 자신이 하는 설교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교인을 종속시키는 그런 목사가 됐을 것 같다.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세월호 참사 이후다. 이전에는 예배 인도하는 정도였다. 악보 그릴 줄도 몰랐는데 주변에 음악하는 친구들 보며 용기를 얻었다.

  
▲ 그는 길에서 노래하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 곁에서 눈물 흘리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 (사진 제공 김성만)

눈물 흘리는 사람들 위해 하는 노래가 정치적?

누가 주님을 아는 사람인가
누가 주님으로 사는 사람인가
거리에 넘치는 방랑자들
우리의 넘치는 부요함이
예수 이름 빛나게 할 일들인가

누가 주님을 닮은 사람인가
누가 주님으로 사는 사람인가
그저 남을 닮아가는 우리가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우리가
예수 이름 나타낼 만한 사람인가

저 가난한 목자 예수
화려한 무대 서지 않았네
하려 하지 않았네 '부한 권세자'

저 가난한 사람들을 감싸 안으시네
가려 하지 않았네 그들을 버리고

- '가난한 목자 예수' 김이슬기

- 이 노래는 언제 만든 것인가

세월호 참사 발생하고 그 다음 주에 피아노 치면서 만든 노래다. 이 노래가 첫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그해 10월 모 기독교 방송국에서 하는 CCM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참석해 최후 10명에 선정됐다. '가난한 목자 예수'로 예선 보고 본선은 다른 노래 만들어서 불렀는데 본선 노래는 다른 CCM과 비슷한 가사로 개인 신앙을 중요시하는 내용이었다.

그 대회를 기점으로 음악은 좀 다르게 해야겠다는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기존 CCM은 사회와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비슷한 가사에 비슷한 주제만 말한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모두 믿는 사람을 위한 거다. 쓰이는 단어도 비슷하고 곡의 형태만 다른 음악을 나까지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 '사람이어라'라는 노래도 인상적이다.

그 노래는 2015년 5월에 만들었다. 곡 쓰기 시작한 지 1년 지난 기념으로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해 노래로 만들고 싶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180도 바뀌어 버린 내 정체성을 정리하고 가자는 의미였다. 나를 먼저 찾아야겠다는 마음에 가사를 썼다. 이런 것도 예전에 나사렛대 다닐 때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내가 없었으니 고민도 없었다. 누가 얘기해도 의심 없이 다 듣기만 했다. 가장 애착 가는 곡이다.

- 신학생이 길거리 투쟁 현장에서 노래 부르는 것 자체를 정치적이라고 보는 기독교인도 있다.

신학이 정치적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표출되는 부분은 다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너는 정치적이야"라고 말하는 이유는 특정한 정당을 지지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정당이 밉거나 대통령이 미워서 길에서 노래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했을 때, 지금 내가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이 누군가 생각하면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눈물 흘리는 사람들 곁에서 노래하는 것이 옳다. "너의 행동은 정치적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거대한 정치집단에 종속시켜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비판하는 거다. 동성애 인권 지지한다고 게이 아니냐는 비난도 엄청 받았다.

  
▲ 김이슬기 씨는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혹도 자주 받는다. 성 소수자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크게 작동했다. 육우당 추모제에서 노래하는 김이슬기 씨. ⓒ뉴스앤조이 이은혜

동성애 행사 가면 다 '게이 새끼'인가

- 안 그래도 육우당 추모제에서 보고 좀 놀랐다. 신학생이 스스로 목숨 끊은 동성애자 추모 행사에서 노래 부르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게이 새끼'라는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다.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독교인들이 왜 진지한 고민을 피하고 성경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한다. 신앙이 두려움으로 작동했을 거다. 내가 속해 있는 틀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범위인데 거기서 배제된다는 걸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극렬하게 반대하지 않으면 천국 못 가고 지옥 갈 것 같으니까 혐오할 거다.

나도 그들과 똑같았다. 교회에서 동성애자는 지옥 간다고 하니까 내가 지옥 가는 게 싫어서 그들을 혐오했다. 나는 포비아 중에 포비아였고 근본주의자 중에 근본주의자였다. 나사렛대에서도 늘 그렇게 들어 왔고 동성애 반대 서명할 때도 아무 생각 없었다.

- 어떻게 그렇게 급작스럽게 입장이 변할 수 있나

계기가 있다. 나사렛대 다닐 때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학교에서 들은 말밖에 없었다. 심한 욕을 하면서 동성애는 더러운 거고 에이즈 주범들이고 당연히 지옥 갈 거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얼마나 근본주의자였냐면 고양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물 취급했다.

근데 그 친구가 3일 뒤에 나한테 커밍아웃했다. 기독교인이었는데 울면서 "자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날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든다"고 말하더라. 너무 힘들었다.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고 한 번도 동성애와 연관지어서 생각한 적 없었는데다가 좋은 친구였는데 갑자기 그렇게 커밍아웃하니까 당황했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퀴어 문화 축제에는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돼 있고 교회에서는 늘 편향된 정보만 접하지 않나. 그 사람 때문에 학교 기도실에서 며칠을 울기도 하고, 힘들어서 아무 기도도 못 하고 가만히 멍 때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내가 봐도 이 사람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고 변태도 아니고 에이즈 전염시키는 사람도 아닌데(레즈비언이었다) 내가 동성애자를 정죄하는 논리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직접 겪고 나니까 세월호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동성애 문제를 받아들인 것 같다.

- 이제 내년이면 졸업이다.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군대를 안 다녀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생각을 정립하고 있는 단계이긴 한데 요즘 그리스도인의 비폭력에 관심이 많다. 양심에 의거해 병역을 거부하신 분들도 만나 보고 싶다.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며,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집단 폭력의 구성원으로 지냈다. '나는 여자 안 때리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데' 말하면서 살아왔던 거다.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조금씩 바뀌는 과정 중에 내가 한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면, 이 정상성을 깨는 선택을 하고 싶다.

이은혜 eunlee@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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