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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빼고 다 바꿔라, 토종 교회의 새로운 시도들

moonbeam 2016. 7. 28. 21:49



복음 빼고 다 바꿔라, 토종 교회의 새로운 시도들

정성규 집행위원(예인교회 목사)

얼마 전 북미의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연구자, 앨런 록스버그(Alan J. Roxburgh) 교수가 내한했다(<목회와신학> 2015.11. 스페셜 인터뷰 참고). 서울의 한 교회에서 국내 선교적 교회 전문가들을 만났고 한국의 선교적 교회 현황에 대해 물었다. 참석자들은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북미의 선교적 교회 특성으로 평가할 때 한국 교회의 새로운 동향을 선교적 교회로 보기에 미흡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이라는 개념은 뉴비긴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미국의 목회자와 학자들에 의해 처음 표현되고 일반화됐다”1고 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다만 ‘선교적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북미식 기준(?)만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북미에서 표현되지 않는 아프리카식, 유럽식이 있을 것이고, 한국식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 내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교회들의 상당수가 선교적 교회라 할 수 있고 또한 새롭게 일어나는 교회 운동도 선교적 교회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황영익 목사는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국의) ‘건강한 작은 교회’의 흐름과 맥이 닿아있다.”2고 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필자는 최근 한국 교회 내 다양한 목회 형태의 출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다만 우리 체형에 맞지 않는 수입된 교회 유형에 관련된 것은 거론하지 않겠다. 수입된 교회가 한국 지형에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이미 경험한 바이기에 이 땅의 토종 교회들의 새로운 시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목회  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민주적 교회
  2000년대에 들어 한국 교회의 병리 현상이 두드러지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목회자의 전횡과 음란, 불투명한 재정, 무리한 건축, 세습, 사회와의 불통은 한국 교회와 뗄 수 없는 연관어가 됐다. 교회 문제가 발생될 때마다 많은 성도들이 투명하고 원칙이 있는 교회를 요구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민주적 교회다.

민주적 교회는 회중교회와 매우 유사하지만 침례교회의 회중주의보다 더 한국화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 대표인 백종국 교수는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예외 없이 죄의 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란 견제와 균형을 원칙으로 삼는 체제이므로 이러한 죄의 본성이 부지불식간에 교회 안에 퍼지는 것을 방지해 준다. 니버(Niebuhr)는 이에 대해 인간은 정의를 행할 수 있기에 민주주의가 기능하고,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바 있다. 교회는 거듭난 성도들이 제사장으로 모인 곳이니 더욱 민주적 요소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 교회의 민주적 교회 운영은 근래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공존하다가 잃었던 것이다.

  민주적 교회는 성경의 정신에 입각한 정관, 직분 임기제, 복음적 분업, 재정 공개, 민주적 논의 구조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한국 교회 건강성 회복을 고민하며 민주적 교회 운영을 적용 실천하는 교회와 연합 운동이 시작됐다. 대표적인 단체가 건강한작은교회연합으로 언덕교회, 새맘교회, 너머서교회, 더작은교회, 예인교회 등이 속해 있고 기독교 시민단체로는 교회개혁실천연대가 활동하고 있다.     

  유기적 공동체 교회
  교회는 공동체성을 빼 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공동체성을 잃어가는 교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건물이 있고 주일 예배도 드리지만 교우들 간의 유기적 공동체성이 없다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본질적 구조상 교우 간 긴밀한 교제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중대형교회들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들은 공동체성을 제대로 갖고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유기적 공동체 교회에 대한 여러 좋은 예가 있겠지만, 방배동의 동네작은교회(김종일 목사)는 성도 30명이 넘으면 분립하는 교회다. 작음을 하나님 나라의 지향점이라고 확신하는 그들은 “사과나무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사과나무입니다”라는 공동의 가치로 교회가 교회를 낳는 데 집중하고 있다.

동네작은교회는 네 가지를 표방한다.4 첫째,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예배와 훈련, 교제를 나누는 주 중 모임을 통해 세상에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소그룹 중심의 교회다. 둘째, 작고 건강한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경험하며 30여 명의 작은 공동체로 계속 분립하는, 영적 재생산을 하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셋째, 마을과 지역, 계층에 필요한 구조와 공간, 섬김의 사역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성육신적 교회다. 넷째, 전 성도가 제사장으로 세워지며 부르심의 현장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는 일터와 일상의 거룩을 실천하는 교회다. 현재 다섯 개의 공동체가 세워졌으며 이들은 흩어져 공동체를 운영하며 한두 달에 한 번 연합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자비량 목회 교회
  자비량 목회는 보통 이중직 문제로 알려져 있다. 자비량 목회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갖는 경우다. 교단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도움이나 대안을 줄 수 없어 목회자 개인이 책임지기 위해 직업을 갖게 된다. 이와 달리 생계와 상관없이 직업을 갖는 이들의 경우는 이중직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정 규모가 되었기에 목사가 교회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경우가 전통적인 목회라면, 오늘날 마을을 사역지로 삼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일터를 갖는다. 그들은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마을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한국적인 선교적 교회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마을과 겉돌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칭찬하고 권해야 할 목회 형태다.

이런 유형의 교회가 여럿 있지만 고양시 행신동에 있는 더기쁨교회(이준우 목사)를 소개한다. 찬양 사역자로 히스토리메이커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행신동 지역에 건강하고 성경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지역을 파악하기 위해서 도전한 일은 햄버거 배달이다.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중직에 대해 “선교적 방향을 위해 더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쿠터를 타고 행신동 구석구석을 다니며 지역의 특징을 파악한 이 목사는 최근 ‘교회개척학교 숲’의 도움으로 ‘책으로 만든 숲’이라는 작은 도서관을 개관했다. 주일에는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지만, 주 중에는 다양한 지역 프로그램, 교육, 세미나, 음악 콘서트를 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용한다.

다음은 부천 상동에 있는 즐거운교회(김경민 전도사)다. 주 중에는 카페로 사용하는 공간에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다. 교회 등록한 사람만이 아니라 카페를 드나드는 모든 마을 사람을 교인으로 생각하고 목회한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커피 한 잔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쉽게 교제의 기회를 얻게 되고 직접 전도하지 않더라도 일상을 나누면서 마음을 열고 있다.
김경민 전도사는 목회를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돕고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명 보이지 않는 목회라 할 수 있다. 더기쁨교회와 즐거운교회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마을로 들어간 경우다. 이들에게 자비량은 먹고살기 위한 것만이 아닌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마을의 중심이 된 교회
교회는 일반적으로 지역 교회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 실정에서 교인의 80-90%가 지역 주민인 교회는 찾아보기 드물다. 거대 도시를 목회지로 삼은 지 오래됐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마을, 지역사회와는 동떨어진 상황이 됐다. 교회가 주일예배와 교인만을 위해 존재하고 마을에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가 오래 존재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교회는 마을 문화의 중심지였고 젊은 세대의 문화를 이끌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그런 교회가 도시에 존재할지 의문이다. 부천 역곡동의  작은나무교회(나유진 목사)는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마을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교회다. 작지만 ‘뜰안의 작은 나무 도서관’을 중심으로 음악 공연이 이뤄지고 지역 학부모 모임 또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개척한 지 3년밖에 안 된 교회의 참으로 큰 성과다.

작은나무교회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로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건강한 교회가 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들은 공동체의 관심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일상의 신앙’, ‘건강한 작은 공동체’,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고 성도가 함께 세워가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며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찾는 공동체’다. 도서관에서는 인디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연계해 매월 한 번씩 토요일에 음악 공연(뜰안의 작은 음악회)을 한다. 분주한 일상을 달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작은 음악회는 깊은 울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은나무교회가 인상적인 것은 마을 일을 혼자하지 않는 데 있다. 더 고무적인 것은 주변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세 교회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유진 목사는 언론 취재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변 지인들이 소개해주셔서 언론 취재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뜰작지기가 가장 좋아하는 인터뷰는 … 지역 신문의 취재입니다. 지역과 소통하며,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호흡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독 언론의 취재를 싫어하는 이유는 모든 교회 활동과 노력을 전도와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나목사는 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을을 섬기기 위해서 목회하고 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색 교회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교회가 여럿 있다. 그 중에 두 교회를 소개한다. 하나는 벙커원교회다. 이 교회는 등록, 헌금, 직분, 이렇게 세 가지가 없는 삼무(三無) 교회를 표방한다. 삼무를 좀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벙커원교회는 교인 등록을 받지 않으며, 신급,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설교한다. 교회를 위한 헌금은 없지만, 정의와 평화, 사랑이 있는 세상을 만드는 개인과 단체에 기부한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직분제를 두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기에 모두를 ‘님’으로 부른다.

카타콤교회(양희삼 목사)는 “내가 복음이다”라는 팟캐스트 방송의 청취자들이 모여서 시작했다. 매회 1만 5000명이 청취하는 “내가 복음이다”의 오프닝은 “성경에는 사복음이 있지만 현실에는 하나의 복음이 더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에 업고 내가 성공하고 내가 출세하는 ‘내가복음’. 이것이 복인지 독인지 알아보는 나이롱 크리스천을 위한 방송. ‘내가 복음이다’ 지금 시작합니다.”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파고들어 그 허와 실을 나누는 데 많은 한국 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주일마다 교회로 모인다.

맺는말
  왜 이런 교회가 생겨나는가? 한국 사회와 교회 생태계가 그만큼 변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에 교회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 “한 문화가 거대한 변화를 겪을 때는 언제나 교회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됐다. 문화적 변화가 크면 클수록 교회 자체의 개념도 더욱 철저히 변화했다”고 말했다. 모던 사회에서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변환은 작은 변화가 아니라 엄청난 변화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결실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유기적으로 변화를 이끌던 교회가 끄트머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형국이다. “조금씩 바꿀 것인가, 확 바꿀 것인가?”6 교회의 급변은 선택이 아니라 존립을 위한 필연이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 역시 그들의 책에서, 확 바꿀 것을 권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교회들은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일부분이다. 한국 교회의 다수는 조금씩 바꿀 것을 택했지만 지금은 복음을 빼고는 확 바꿔야 할 때다. 변화가 더디면 더딜수록 손해는 더 커진다. 세상에 끌려 변화당하기보다 스스로 세상보다 앞서 확 변화하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이 글은 <목회와 신학> 2015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