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개신교 만성적 부패의 비밀 --- 목사만 말하는 교회

moonbeam 2016. 8. 14. 16:44



"돈만 밝히는 교회를 떠나겠다"는 가나안 성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최근 현각 스님의 작심한 일갈에 화들짝 놀란 일부 종교인들은 "사찰에는 부처가 없고, 교회에는 예수가 없다"며 분노하는 세인들의 따가운 비판에 그게 아니란 소리도 차마 못 하고 그저 전전긍긍하고 있다. 

"백인 선교사들이 처음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땅밖에 없었지요. '기도합시다'라는 말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뒤 눈을 떠보니 우리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었고 선교사들이 우리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신성남 집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지도자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주교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는 요즘 일부 교회의 행태와 아주 닮은꼴이다. 교인들 손에는 성경을 들려 주고 목사는 돈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모든 종교의 타락은 반드시 '돈과 권력'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 마약을 못 이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걸 쉽게 극복하지는 못 한다. 특히 교회에 출석하고는 있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유혹에 더욱 약하다. 

개나 소나 장로의 반열에

더구나 교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변질한 어떤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으로 진출하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이미 잘 아는 내용이다. 일단 사회에서 소위 '상위 계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근자에는 교회도 은근히 사람 차별을 제법 잘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추가로 새벽기도 자주 나가고, 십일조 잘 내고, 목사에게 맹종하고, 그리고 모든 예배 다 참석해 앞자리에 앉아 아멘 열창 뜨겁게 잘 하면 된다.

그러면 결국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아 시무 장로나 권사 직분을 초고속으로 받는다. 그 다음 담임목사의 거룩한 총애를 받고 충실한 애완견이 되면 더욱 중요한 요직을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걸 출세로 여기는 유능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교회들은 그 사람이 가정에서 얼마나 짜증 잘 내고, 직장에서 남의 험담 잘 하고, 거짓말 잘 하고, 성품이 치졸하고, 욕심이 많고, 사생활이 복잡하고,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인색하고, 그리고 가난한 형제와 친척에게 매정한 것 따위는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교권을 독점하려는 목회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법이 있는데 바로 '충성 유도'다. 마치 독재자들이 그 체제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쓰던 고전적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수시로 칭찬하며 요직에 중용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순응하지 않으면 점차 홀대하다가 가차 없이 밀어낸다. 

특히 순진한 교회에서는 이게 아주 잘 먹힌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목회자에게 열심히 음식을 대접하거나 양복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런 습성이 차차 몸에 배게 되면 명절마다 백화점 상품권은 기본이고 나중엔 고액 수표까지 들고 가는 교인도 있다. 결국 개신교 목사직이 적당히 요령만 발휘하면 제법 짭잘한 명품 직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별 오사리 잡배들이 다 장로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사기꾼 정치인이 장로이고, 탈세를 일삼는 기업인이 장로고, 처첩을 여러 명 둔 경영주가 장로고, 공금을 횡령하는 공무원이 장로고, 돈으로 재판을 농락하는 판사도 장로고, 표절 목사의 교인 고소를 열심히 돕는 법조인도 장로고, 그리고 교단 선거에 패거리 작당하여 돈봉투 돌리는 작자들까지도 모두 장로 감투를 자랑하게 되었다.       

목사만 모르는 '직분 남용'

더욱 한심스런 일은 이렇게 무늬만 장로인 가짜들 대부분은 매우 권력지향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자질을 갖추고 정상적으로 장로가 된 진짜들보다 더 나서기 좋아하고 불의에 쉽게 타협한다. 그래서 세속적인 논리와 수단이 신중한 제한 없이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교묘하게 사용된다. 교회 정의가 갈수록 흐려지고 있는 이유이다.     

집사의 경우는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특히 서리 집사직은 왜 그리 마구 남발하는지 개나 소나 다 집사다. 그래서 교회에 몇 년 출석했는데도 서리 집사를 못 받으면 도리어 그걸 불명예로 여길 정도다. 이는 물론 성경의 직분 정신과 기준에 매우 크게 어긋나는 사이비적 행태다. 

목사가 되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단 신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학점 잘 따고, 목사 안수 받기 전까지 크게 사고치지 않고 교회 봉사만 잘 하면 된다. 게다가 신학교의 과도한 난립으로 인해 그냥 줄만 서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군소 신학교들이 널리고 널린 상태다. 그래서 저학력자가 학력을 세탁하기에 가장 좋은 곳 중에 하나가 신학교다. 

반면에 그 사람의 신앙과 인품과 성품이 정말 목회자로서 얼마나 자질과 소명이 있는지 소속 공동체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장기적이며 객관적인 검증 절차는 아주 취약하다. 그래서 요즘 성도들의 놀란 새가슴을 덜컹하게 만드는 대형 사고와 교회 비리에 도대체 목사가 끼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이는 한국교회의 직분 운용 제도가 겉으로는 거룩하게 치장하나 속으로 뿌리까지 부패하게 된 슬픈 과정을 잘 설명한다. 아울러 왜 개신교가 지역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지 그 사역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관리가 너무 외면화, 형식화, 교권화, 상업화, 특권화, 그리고 사유화되었다. 

그러면 과연 대다수 목회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몰라서 여전히 침묵하거나 방치하고 있을까. 나는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제도적 약점와 치명적 결점를 잘 알면서도 안 고친다. 적극적으로 고칠 의사가 없다. 오히려 교회가 적당히 부패한 게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며 속주머니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초신자들도 다 아는 사실을 교회 생활 수십 년이나 한 중견 목회자들이 정말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한국교회의 부패는 오직 목사만 모른다"는 역설적이며 자조적인 풍자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성직주의'는 중세의 계급적 사제 제도를 그대로 복제한 불법 모조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주의'는 '교황주의'의 변신

게다가 서울 어느 대형 교회의 S목사는 "목사는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잘 모셔야 한다"는 주장까지 늘어놓고 있다. 이젠 종이란 자들이 그냥 상전도 아니고 아예 아버지 자리마저 넘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마23:9)"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설교다.

이처럼 겉으로는 장로교요 침례교요 감리교이지만 실제는 거의 다 '목사교'가 되었다. 외견상 교권이 제법 균형있게 분산된 듯 하지만, 사실 장로와 집사는 대부분 어용화되어 거수기 수준이 많고 상당수 담임목사가 무당 행세하며 홀로 교회의 삼권을 흔들고 있다. 

교단 또한 겉으로는 그럴 듯 한 헌법이 있어 보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재판국원이나 기소위원의 구성 대부분을 목사들이 독점해서 운영하기에 교단법은 그저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리 목사들이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담임목사를 어버이 수령처럼 받들며 목사 중심의 교회를 지향하는 작금의 '목사주의'는 중세의 '교황주의'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 단지 겉포장만 세련되게 바꾼 셈이다. 그러니 이건 쓰레기차를 겨우 피했더니 도리어 똥차를 만난 꼴이다. 

어떤 목사들은 툭하면 자기가 '주의 종'임을 내세우지만, 이는 사실 매우 웃기는 말이다. 세상에 주의 종이 아닌 성도가 어디 있나. 그들은 우선 그 시대착오적인 특권 의식부터 철저히 뿌리 뽑아야 마땅하다. 

한국 개신교가 만성적으로 부패하는 비밀은 '직분 남용'에 있다. 직분을 맡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 대거 직분자가 되었고, 직분자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들이 거룩한 사역이라는 위장 속에 방임되었고, 그리고 그런 만성적 비리에 교인들은 마냥 침묵했다. 시무 목사가 헌금 횡령이나 성추행이나 거짓말을 해도 덮으려 했고, 장로와 집사가 무능해도 방관했고, 그리고 교회가 배도한 세습을 자행해도 따뜻하게 동조했다. 이러니 하늘 아래 이보다 더 맹신적인 집단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침묵하는 거룩은 의심을 해야 한다"

그 결과 방자해진 종이 상전이 되었고, 당회나 제직회는 담임목사를 섬기는 어용 기관이 되었고, 교회에서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도 잠잠해졌고, 그리고 그렇게 조용한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오로지 목사만이 자기 주장을 말할 수 있는 이상한 교회로 변질되고 사유화된 것이다. 

R집사의 제보에 따르면 세습으로 유명한 M교회 2012년 신임 장로 교육 지침에는 "당회장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설사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어떤 의견이라도 개진하면 안 된다", 그리고 "수시로 당회장 목사 사모님께 안부를 여쭤라"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게 교주지 무슨 목사인가. 

이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성직주의'는 중세의 계급적 사제 제도를 그대로 복제한 불법 모조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로마교회에서는 사제들만이 교회에서 말할 수 있었다. '평신도'라는 수치스런 이름으로 격하된 나머지 일반 성도들은 만날 헌금이나 바쳤지 다른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발언은 커녕 성경을 몰래 읽기만 해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 당했다. 소위 성직자란 자들이 사람을 가축처럼 마구 죽였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교회였나.

사실 이제라도 직분자들이 바로 선다면 교회는 다시 바로 설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당연한 상식이 왜 이 바닥에선 늘 겉돌고 있는 것일까. 

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목사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1600-1661)는 "사탄과의 전쟁이 사탄과의 평화보다 낫다. 침묵하는 거룩은 의심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극히 옳은 지적이다. 침묵은 교회 부패의 자양분이다. 부패에 침묵하는 것은 부패를 후원하며 도와주는 행위다.

실제로 지금도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은 성도들에게 늘 침묵하자고 설득한다. 날선 비판보다는 '주의 일'이 먼저라고 목소리 높힌다. 하지만 그건 상투적인 속임수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하나님의 공의를 거역하면서까지 수행해야 할 주님의 일이란 결단코 없다. 오히려 교회의 제직들은 구조적이며 제도적인 불의와 부정에 맞서 반드시 할 말을 해야 옳다. 만일 계속 침묵한다면 그건 거룩한 직분에 대한 배교적 '직무유기'다. 

종이 왕 노릇하는 교회는 사교 집단이기 때문이다.

"교회 속에는 아무런 지배도 없고 지배체제도 없으며 아무런 지도의 요구도 없고 특권을 가진 직분도 없다. 그것은 계급 없는 사귐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기능상의 차이는 있으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모든 사람이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 김균진, 조직신학 교회론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신성남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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