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병화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 장병화 |
장병화(69) 성남산업진흥재단(아래 성남재단)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업무시간을 내주지는 않았다. 성남재단은 성남시가 중소기업 및 벤처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설립한 기관이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기관장이 사적 인터뷰를 업무시간에 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공적 질문이 포함됐는데도 그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인터뷰는 지난 10일 저녁 퇴근 후에 서초구 자택에서 늦게까지 진행됐다.
그는 독립군 아버지를 해방 조국에서 동족에게 잃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무작정 상경해 밑바닥 생활을 했지만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기를 개발하는 등 음향전문 기술을 쌓으면서 연간 1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일궜다.
그는 인간 승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희망제작소 등에 깊숙이 참여하면서 역사의 승리를 도모하고 있다. 독립군의 아들도 독립군인 것이다. 그의 독립운동 목표는 친일파 청산과 민주사회 구현 그리고 남북통일이다.
19세에 독립운동 뛰어든 장이호 선생... 이승만에 속고 인민군에 죽은 아버지
▲ 평북 신의주 출신 독립운동가 장이호(1916~1950) 선생. 붉은 원안의 인물이 장이호 선생이다. ⓒ 장병화 |
그의 부친 장이호(1916~1950) 선생은 평북 신의주 사람으로 열아홉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중국군관학교 한청반(韓靑班)에서 4년간 간부훈련을 받은 뒤, 광복군 2지대에 투신해 일본군을 상대로 기밀탐지와 지하공작 등을 전개했다. 1944년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이 됐고, 그해 12월 동지들과 함께 초모공작(독립군 모집)을 전개하면서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과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등의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김준엽은 1944년 3월 중국 강소성 서주(徐州)의 일본군 쓰까다부대를 탈출했고 장준하는 3개월 후에 같은 부대를 뒤따라 탈출해 중국 국민당 유격대에 들어갔다가 1945년 2월 광복군에 편입됐다. 장이호 선생은 해방 직전인 1945년엔 서주지구 일본군 부대에 배치된 조선인 학도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한미합작 돌격작전 전략특수(OSS) 훈련을 받았는데 일제가 항복하면서 작전이 취소됐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기념사진. 붉은 원안의 인물이 장이호 선생이다. ⓒ 장병화 |
▲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 장이호 선생. 아래 맨 우측이 장이호 선생. ⓒ 조호진 |
광복 후에는 서주지구 군사특파원단으로 파견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임무를 수행하다 1946년 귀국해 1947년 나이 서른에 열 살 아래 송정숙씨와 결혼해 형제를 낳았다. 장병화 대표가 장남이다. 장이호 선생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제 앞잡이였던 사찰계 형사들에게 시달렸다. 백범의 한국독립당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참극은 장 대표가 네 살이던 1950년 9월 25일 벌어졌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살 때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아버님은 피난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대통령입니다. 서울이 수복된 것은 인천상륙작전에 의해서였습니다. 연합군의 파상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인민군들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억울한 사람들을 죽이고 달아났습니다.
참극은 1950년 9월 25일 벌어졌습니다. 9.28 서울 수복을 나흘 앞두고 동네 빨갱이의 밀고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6.25 동이인 동생이 인민군에 끌려갔는데 그 직전에 죽음을 예견한 아버지가 저를 빼돌렸습니다. 대를 잇기 위해 저를 이웃집에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등에 업힌 갓난쟁이 동생이 하도 울어대니까 한 인민군이 어머니와 동생을 빼줘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성북경찰서 뒤 돌산에서 총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칡뿌리로 허기 달래던 어린 시절... 중학생 때, 도둑기차 타고 무작정 상경
▲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군에 의해 죽임 당한 장이호 선생 묘소. ⓒ 장병화 |
이승만에 속아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1.4 후퇴가 있기 전에 어린 형제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내려갔다가 친정인 강릉 주문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친정 도움으로 근근이 살면서 쑥과 칡뿌리로 허기를 달랬다. 장병화 대표는 그 시절의 배고픔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밥그릇만 유독 작게 느껴졌다.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배부르게 밥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학창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다. 하지만 머릿속엔 돈 벌 궁리뿐이었다. 가난에 사무친 그의 귀에 일본이 잘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일본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 밖 동해 바다 수평선 너머 일본을 헤엄처서라도 가고 싶었다. 가자, 일본에 가서 돈을 벌자!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무작정 상경을 감행한 그는 도둑기차를 탔다.
차표 검사가 시작되면 기차 난간에 매달리면서 피했다. 목숨까지 걸었지만 결국 걸렸다. 영주역에서 강제 하차당한 그는 다시 도둑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역무원에게 또 걸렸다. 학생복 덕분에 꿀밤 몇 대 맞고 풀려났다. 부산행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서울역은 강릉역처럼 감시가 허술하지 않았다. 무임승차를 포기한 그는 부산행 기차푯값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가출 청소년에게 일자리는 없었다. 며칠 굶으며 노숙을 했더니 거지나 다름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는데 제기동의 한 공장에서 밥을 준다고 하기에 무조건 일했다. 정말 밥밖에 주지 않았다. 소년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옷은 입고 온 교복 한 벌뿐이었다. 외출복이자 작업복이었던 검정 교복이 땀에 절면서 붉어졌다. 부산행 차표를 사기 위해 다른 일터를 찾아 나섰다.
월급 주는 곳에 취업하려면 보증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외가 친척을 찾아갔다. 보증은커녕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고향으로 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주문진으로 돌아왔지만 머릿속엔 서울 생각뿐이었다. 다시 상경했다. 몇 달간은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막내 외삼촌 소개로 전축 만드는 공장(성일사)에 취업했다. 기술자가 되면 배는 곯지 않는다. 하지만 기술 밥은 눈물 밥이다. 혼나고 터지면서 익힌 기술을 거저 가르쳐주는 기술자는 없다.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기 개발... 연매출 100억대 음향기기 전문기업 일궈
▲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기를 개발한 장병화 대표. ⓒ 장병화 |
그는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했다. 선배들의 심부름과 공장 청소를 성실하게 감당했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동네 골목까지 쓸었다. 독립군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 대신에 정직과 성실을 물려줬다. 그의 성실을 눈여겨 본 공장장이 야간에 기술학원 다니는 것을 허락해줘 종로2가 YMCA 옆 '한국TV기술학원'을 다녔다. 한창 놀기 좋은 열여덟 청춘이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원을 다녔습니다. 제일가는 기술자였던 옥씨 성을 가진 공장장님과 선배 기술자들이 각별하게 챙겨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님이 축음기를 통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와 슈만의 트로메라이 등 고전음악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시와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지는 장롱처럼 큰 포마이카 전축 진공관 앰프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음악소리가 너무 좋아서 밤새는 줄도 모르고 일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일하고 공부했더니 기술이 금세 늘었습니다. 제 손에서 안 고쳐지는 라디오와 전축이 없을 정도로 기술이 늘었으니까요."
▲ 장병화 대표가 맨손으로 일군 가락전자. ⓒ 장병화 |
3년간 기술을 배운 뒤 을지로 4가에서 유리 진열장 하나 놓고 노점을 시작했다. 라디오와 전축을 고치고 팔았는데 고객들이 늘면서 장사가 잘됐다. 그냥 기술자가 아니고 그냥 장사꾼이 아니라 기술과 정직을 갖춘 청년 사업가였다. 3년 만에 세운상가에 3평짜리 점포를 얻었는데 군대에 가야 했다. 점포를 친동생에게 맡기고 군대를 갔다 왔더니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진열장 하나 놓고 노점을 다시 시작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1970년대 한국의 음향 기술은 형편없었다. 선진 음향기술 도입을 물색했던 중에 일본 마쓰시다사(파나소닉의 모체)의 요청을 받고 해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일본의 기술을 배우고 제품을 복제하면서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를 만들었다. 수입품 오디오 믹서는 제품은 좋지만 너무 비쌌다. 박원웅과 채은옥, 이장희 등 유명 디스크자키들을 비롯해 방송국 엔지니어 그리고 명동의 청자다방은 물론이고 전국의 음악다방들이 그가 만든 오디오 믹서를 사용했다. 제주도에까지 건너갔다. 그의 제품은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았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977년 음향기기 제조업체 '가락전자'(당시 업체명은 '경일엔터프라이즈')를 창업했다. 그는 38년간 경영하면서 기업을 키웠다. 음향기기 특허를 수십 개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독일과 미국 등 25개국으로 수출했다. 기술과 성실에서 단연 앞선 그는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포기했다. 뇌물을 주고 접대를 해야 하는데 그런 짓을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선 정직과 신의보다 뇌물과 향응이 더 잘 통합니다. 저와 같은 기업인은 한국처럼 부패한 풍토에선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부정부패로 성장한 기업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다 허상입니다. 2만 달러를 성큼 넘어선 한국이 3만 달러 문턱에 걸린 것은 바로 부정부패 때문입니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창립, 11년째 회장 맡으며 임종국 상금 지원
▲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11년째 맡고 있는 장병화 대표는 임종국상 운영비와 상금을 후원하고 있다. ⓒ 장병화 |
독립군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친일파들은 일제 시절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눈엣가시인 독립운동가와 그의 가족들을 모질게 탄압했다. 굶주림에다 탄압까지 당한 후손들은 이름까지 바꿔가며 독립운동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반면 어떤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친일파와 독재자에게 붙었다. 부역의 대가로 호가호위했다. 생존에 급급해 아버지를 잊고 살았던 장병화 대표는 아버지를 찾으면서 역사에 눈을 떴다.
"독립군의 아들이란 자부심보다는 굶주림 해결이 더 급했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게 되니 아버님이 생각났습니다. 광복군동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더니 아버님과 함께 독립 운동하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동지의 아들은 동지라면서 이청천 장군과 함께 찍은 아버님 사진을 주셨습니다. 그 어른들 덕분에 아버님이 공적을 인정받고 훈장을 받게 되면서 독립군 아들로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장이호 선생은 1977년 대한민국건국훈장에 추서됐다. 선생에게 훈장을 수여한 대통령은 '일왕'(천황)에게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다짐한 황군장교 출신 박정희다. 청산 대상인 친일파가 단상(壇上)에서 단하(壇下)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올해 71주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도 아이러니 상황이 재현됐다. 아직은 독립군의 나라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다.
▲ 장병화 대표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에게 선물 받은 글을 읽고 있다. ⓒ 조호진 |
독립군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는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녔는데 독립운동을 팔아먹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어떤 후손은 부정부패에 연루돼 감옥에 갔다.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해야 활 광복회(회장 박유철)는 감투 싸움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역사와 정의가 구정물 통에 빠지면서 이 지경이 됐다. 그의 타는 목마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운동가 조문기(1927~2008) 선생을 만나면서 해갈됐다.
독립군의 핏줄은 달랐다. 역사에 눈 뜬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헌신하면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임종국상을 제정했다. 임종국상은 선생의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 그리고, 민족사 정립을 계승한 개인과 단체들을 대상으로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분야로 나눠 시상한다. 상금과 운영 경비는 11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 장병화 대표가 후원하고 있다.
칠순 앞둔 독립군 아들의 다짐 "선열 뜻 받들어 남북통일에 헌신"
▲ 겉은 온유하지만 속은 철두철미한 기업인이자 민족운동가 장병화 대표 ⓒ 조호진 |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꼿꼿하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다면 민족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독할 정도의 원칙과 성실을 갖추지 못했다면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 운동 참여와 기업 운영을 병행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재야 사학자와 시민운동가들로부터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꼿꼿한 운동가이자 당당한 기업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대학으로 공부하러 간 적이 있는데 학벌을 돈 주고 사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는 학벌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기술과 능력은 뛰어난데 학벌이 없다고 무시당했다. 솔깃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원칙주의자다. 성실함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학벌과 인맥 사회를 정직과 성실로 정면 돌파했다. 요즘에도 새벽 5시에 깨어 밤 11시까지 공부하며 일한다.
칠순을 앞둔 독립군의 아들, 그는 역사에서 만큼은 청년보다 푸르고 열정은 독립군의 총구처럼 뜨겁다. 그는 '민족 반역자는 사라질 수 있으나 잊을 수는 없다'는 제목의 글에서 "민족정기는 도둑을 맡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고 탄식하면서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비극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선 안 된다"며 독립 정신을 이어갈 것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을 남북통일에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통일된 국가를 만드는 날이 하늘에 계신 독립선열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목숨을 통일에 바치려고 합니다. 통일 독립군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 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통일이 되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아들에게 물려준 건 기업가의 책임... 성남재단에서 갑질 행정은 용납 안 해
▲ 성남산업진흥재단 8대 대표이사로 취임한 장병화 대표. ⓒ 장병화 |
이재명 성남시장은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를 공모하면서 청렴함과 경영능력을 갖춘 인물을 찾았다. 이 시장과 장 대표는 일면식이 없었다. 이 시장은 장 대표의 청렴함과 경영인으로 오랜 경험, 게다가 역사와 시대인식까지 갖춘 점을 높이 사면서 대표로 선임했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장 대표가 2015년 7월 성남재단 대표로 취임한 뒤 셋째 아들에게 승계한 기업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에 취임한 뒤 아들에게 승계한 기업(가락전자)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보복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5년도 10년도 아닌 15년 치 서류를 탈탈 털다시피 조사했습니다. 회사 돈의 일원도 사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것도 없고 크게 걸릴 게 없습니다만, 이 시장 주변인물에 대한 보복 같아서 불쾌함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장 대표는 가락전자가 30주년을 맞은 200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는데 두 번 다 실패했다. 자수성가한 그는 부의 대물림을 반대한다. 자식들도 그렇게 키웠다. 2남 1여 모두 제 갈 길로 갔다. 큰아들은 자기 사업, 둘째 딸은 수의사, 셋째아들은 대기업을 다녔다. 그는 셋째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의 대물림이 아닌 '책임의 대물림'을 위해서였다. 기업이 망하면 그 피해는 노동자와 주주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기업가의 경영책임과 사회적 책임이 무거운 것이다.
▲ 셋째 아들(장성준)이 승계한 음향기기 전문기업 '가락전자'. 장병화 대표가 물려준 것은 부가 아니라 기업가의 책임이다. ⓒ 장병화 |
삼성전자에 다니던 셋째아들은 그의 요청에 부응했다. 그는 아들에게 경영을 바로 맡기지 않았다. 말단사원으로 채용했다. 셋째아들 장성준씨가 지난 2015년 6월 사장에 취임한 것은 5년에 걸친 경영훈련에서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회사를 떠나면서 아들에게 백년 기업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민족과 사회 앞에서 당당한 백년기업을 소원하고 있다.
그에게 기업가의 덕목에 대해 물었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직이라고 했다. 사장이 정직하면 직원도 정직해지고, 기업이 바르게 성장하면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사장 자리는 희생하는 자리라고 했다. 아들에게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고 사장은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고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을 누누이 가르쳤다. 그가 아들에게 승계한 것은 부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그는 정직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조선은 100년이 지나도 정직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갔다는데, 우리 사회는 일제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그렇게 장담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자학과 분열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근면 성실하고 우수합니다. 부정부패를 타파하면 민족의 미래는 밝습니다. 자녀들에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하라고 가르치지 말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성공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성남재단 선장인 장 대표의 키워드는 혁신과 투명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혁신을 주도했다. 잦은 회의를 줄이고 종이문서를 없애면서 패드를 지급했고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현장에 답이 있다)과 '2현3무'(2일은 현장 3일은 사무실)를 도입하는 등 현장을 중시했다. 그의 혁신은 갑과 을의 전환이다. 성남재단은 을이 되고 기업은 갑이 되도록 위치를 바꿨다. 직원들이 갑질하거나 선물과 접대를 받거나 커미션(수수료)을 받으면 용납하지 않는다.
"30년 넘게 기업하면서 갑질 행정의 폐해를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갑질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몰래하다 적발된 직원 몇 명은 강등 조치했습니다. 성남재단의 목적은 중소기업을 돕는 것입니다. 기업이 살아야 지역경제도 살고 나라 경제도 삽니다. 대표가 된 지 1년이 지나면서 직원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기업인들과 도시락을 먹으며 미팅할 정도로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혁신에 동참한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골프 대신 고전음악 즐기는 기업인... "행복한 음악과 따뜻한 이웃이 필요하죠"
▲ 임종국상은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 그리고, 민족사 정립을 계승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한다. ⓒ 장병화 |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인가. 그렇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서라도 호의호식하면 되는 이 땅에선 그렇다. 그래서 친일파와 후손들은 잘 살고 있다. 못 산다는 것은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처럼 사는 것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친 대가로 친일파에게 고문당하고 죽임당하고 그 후손들은 못 배우고 못 산다. 이 지경이 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는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청산하면서 세운 정신이다. 관용은 무조건 봐주는 게 아니라 죄과를 청산한 후에 베푸는 정의다. 친일문제를 덮자고 하는 것은 관용과 화해가 아니다. 역사에 대한 반역이고 친일에 대한 부역행위다. 이 나라를 관용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선 친일파들을 끝끝내 심판해야 한다. 역사와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결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 고전음악 애호가인 장병화 선생. ⓒ 조호진 |
진정으로 잘 산다는 이런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삶이다. 땀 흘려 일해 모은 재화를 이웃과 나누는 삶이다. 불의가 침범하면 정의로 맞서는 삶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기업을 일구고 일가를 이룬 장병화 대표는 잘 살았다 할 것이다. 역사 정의를 세우는 일과 민주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가진 것을 나누었으니 독립군의 아들로서도 임무를 잘 수행한 것이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될 것 같은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란다. 기업가로서 혁신과 역사의 진보를 고수하겠단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그럴 것이다. 무슨 재미로 사나? 악기의 팽팽한 줄을 계속 조이면 현(絃)은 끊어진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취미가 고전음악 감상과 책읽기다.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시인 혹은 음악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전음악 애호가다.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곡과 첼로 곡을 좋아한다. 돈이 생기면 클래식 음반을 사 모았는데 그렇게 모은 1000장 중에 200장을 골라냈다. 음악은 지친 몸과 영혼을 달래주는 좋은 친구다. 벤처협회 회장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한 그는 신식 경영인이지만 취미는 구식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독립군의 아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런 세상이다.
"음악은 옛날 음악이 진짜 음악입니다.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놓으면 진공관 앰프에서 육신과 영혼을 위로하는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음악이 가슴에 와 닿을 때의 행복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디지털 기계는 그런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가상이 현실화되는 4차 산업혁명이 온다 해도 사람에겐 행복한 음악과 따뜻한 이웃이 필요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상상합니다. 친일파와 부정부패가 청산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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