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다니기(펌)

남원 교룡산성

moonbeam 2016. 9. 9. 13:04



교룡산성 남동구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동서 방향으로 12번 고속국도인 88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려가고 있다.
사드 도입 문제로 빚어진 국민갈등

현재 국내에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도입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정부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하는데, 그 시설이 들어설 지역 주민들이나 전문가들, 또 국민들 다수는 그것의 안전성이나 국가 전략적 효용 등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루 벌어먹기에 급급한 소시민들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헷갈린다.

그러나 문제를 조금 더 진지하게 살펴보면, 일의 추진과정에서 정부의 확인이나 점검이 충실했는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부가 국민적 합의를 거쳐 ‘합리적인 절차로 이 일을 추진하고 있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정부 당국자나 국민들에게 모두 교룡산성과 남원성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곳에서 왜의 침입을 받아 겪었던 과거의 시행착오들을 성찰하면서, 지금 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교룡산성으로 진입하는 첫 관문인 동문 주변. 가파른 오르막에 위치해 있다.

남원에 대한 기초적 파악

지난달, 함양 황석산성 기사를 통해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전황의 일부를 소개했다. 이번 달에는 그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호남 남원성과 교룡산성에서 벌어진 상황을 소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와중에 있었던 조선의 시행착오를 반추하고, 국방과 외교 등을 아우르는 국제적 전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전라북도 남원은 우리나라 고대사에서부터 중요한 곳이었다. 좁게는 ‘호남의 요지’라 말하지만, 영호남의 연결이 의외로 용이한 지역이라 한반도 전체 ‘남부의 요지’라 해도 무리가 없다. 남원시 주변으로 비옥한 평야가 넓게 펼쳐지는 점, 섬진강 상류지역으로부터 공급되는 풍부한 관개조건도 모두 장점이기 때문에 남원은 결국 주거·물산·교통 등 다양한 조건에서 중심이 된다.

이런 이유로 백제는 일찍이 남원을 ‘군’으로 중시하였다. 당시 이곳의 이름은 ‘고룡(古龍)’이었기에, 현재의 ‘교룡산성’이란 이름도 아마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이곳을 ‘남원경’이라 했다. 후백제는 아예 이곳을 근거로 삼아 개국했고, 고려도 ‘남원부’라 하여 역시 주변부보다 중시하였다.

교룡산성 정문인 동문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본 모습.

정유재란과 남원-남원성, 만인의총, 교룡산성

과거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를 맞았다가 정유재란으로 재폭발할 때, 남원성과 만인의총, 교룡산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살펴본다. 앞서 말했듯이, 남원의 중심은 남원성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685년에 남원소경을 설치했고, 이어서 691년에 그 치소로 이 남원성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초기부터 채용한 국가방어책은 진관체제였다. 평지성인 남원성을 주진으로 하여 행정을 펼치다가, 비상시에는 교룡산성으로 들어가 청야입보(淸野入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으로 침략해 온 왜적을 맞는 조선의 대응과 대책은 내내 부실하였다. 조총이란 신무기로 무장하여 3교대로 사격해 화력을 집중시키는 그들의 새로운 전술에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상국에서 온 구원군’이니 하는 명군에 대한 과장·왜곡된 이해로, 지휘권을 모두 그들에게 위임하고 말았다.

동문 안쪽에 바로 자리 잡고 있는 선정비군. 맨 오른쪽 비면에는 숙종 39년인 1713년 이 성을 중수하고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남원성 전투의 비극은 모두 이런 전술·전략적 무지와 무대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남원에 온 명군은 요동군 출신 병력이었는데, 그들의 전투력은 단도나 곤봉을 사용해서 접근전을 벌이는 것이 장기였다. 그러니 그들은 왜군은 물론 임진란 이후 예리해진 조선군의 무장이나 전투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양원이라는 명군 지휘관은 본인이 기병 출신이라는 이유로 천혜의 교룡산성을 자진 파괴하고 평지 거점인 남원성을 결전장소로 선택하였다. 스스로 패배를 선택한 결과였다.

임진란 발발 후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부족했던 부분들에 대한 보완을 기했다. 가령, 교룡산성은 승장 처영(處英)의 책임 하에 보수를 마친 상태였다. 인근 고을에 할당한 군량이나 무기 등도 충실히 비축하였다. 그런데 식견이 부족한 명장 양원은 그 갖추어진 교룡산성을 철거시켜 버린 것이었다. 전략 전술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준비, 그리고 작전권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다.

몇 번의 보수작업으로 인해서 성벽 돌은 재질이나 크기 형태 등이 불규칙하게 혼합되었다.
1597년 8월 13일(이하 음력) 남원성을 포위한 왜군의 수는 정병 56,000명이었다. 그러나 성을 지키는 조명연합군은 명군 3,100여명에 조선군 1,200여명, 도합 4,300여명에 불과하였다. 10배가 넘는 심한 불균형이었다. 물론 성 안에는 민간인 6,000여명도 있었다. 남원성은 이 첫날의 전투로 거의 전체가 파괴되었다.

8월 16일 남원성이 왜군에 의해 완전히 함락된 후, 살아남은 남원 백성들은 부하 50여 명만 간신히 이끌고 탈출한 명장 양원 외에 몰사한 10,000명의 시신을 성 밖 한 자리에 모아서 만인의총(萬人義塚)을 조성하였다. 그러니까 만인의총은 남원성 함락의 날에 왜군에 의해서 몰사된 10,000여 시신들을 한 곳에 매장한 공동무덤인 것이다. 애초에는 남원성 성벽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의총 주변에 남원역을 세움으로써 묘역을 심히 훼손하였다. 그래서 1964년에 교룡산성 방향으로 700m쯤 되는 향교동에 새 묘역을 조성하였다. 현재 국가사적 272호로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남원성도 왜란 후 복구와 훼손이 몇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은 서북쪽 구간 일부만 복원되어 남아있다. 이 역시 사적 298호이다.

선국사 대웅전 앞, 늙은 배롱나무와 이끼 낀 고탑과 단청 없는 처마가 어울려 이루는 이 무심한 조화.
교룡산성은 남원성으로부터 서북방향으로 2km쯤 떨어진 교룡산에 세워진 석성이다. 518m의 밀덕봉과 484m의 복덕봉을 안에 넣어, 산복식과 포곡식을 배합해서 성벽을 쌓았다. 산 능선부를 내탁식으로 깎아낸 다음 편축으로 치석해 성벽을 둘렀다. 전체적으로 서쪽이 고지가 되고, 동쪽이 저지대를 이루며, 동문을 주 출입로로 삼았다.

이 산성의 기원은 기록으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대략 백제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조선 태종 10년에 이르러 전면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7년 전쟁 중에도 전황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1594년 의승장 처영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보수를 했는데, 불과 4년 뒤 남원성 전투를 지휘한 명나라 장수 양원의 우둔한 판단에 의해서 일시 폐기되고 말았다. 그랬다가 숙종 때 다시 대대적인 재축성이 있었으며, 이때 이루어진 것이 지금 남아있는 교룡산성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산성의 깔끔한 성벽면은 그 산성이 지켜온 오랜 역사를 우리에게 경건하게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감동적이다.

동학과 교룡산성, 동학과 남원

이번에는 조선이 자체 모순과 외세 압력에 의해 붕괴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동학의 유적지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원이었던 점을 주목하면서, 동학과 남원의 관련성을 살펴본다. 우선 교룡산성 안팎에서 3기의 동학관련 유적을 살필 수 있다.

먼저, 산성 안으로 들어가 선국사 우상방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타나는 산신단 옆에 은적암 터가 표시되어 있다. 원래 덕밀암으로 불리던 이 건물에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은적암이라는 새 이름을 붙이고 약 2년간 머물면서 동학 교리 전반을 완성했다고 한다.

교룡산성 동문 밖 열린 공간에 세워진 동학 관련 비. 동학 개조 최제우는 이 성 안 은적암에 머물면서 동학의 기본교리를 다듬었다.
동문 밖 잔디밭에도 ‘동학의 성지 남원’ 기념탑과,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탑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최제우의 행적과 더불어 남원을 근거지로 삼아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김개남의 활동이 이 교룡산성 안에서 준비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남원에는 이밖에도 최제우가 남원에서 포교를 시작한 초기 유적지, 그리고 김개남이 전봉준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군을 훈련시키던 십수정 아래 요천 주변, 포교를 위해 영남으로 진출하던 중 반동학 보수세력을 만나서 전투를 벌였던 방아치와 남평 등 생생한 유적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남원시에서 가장 최근에 보수작업을 실시한 남동부 성벽 구간.

교룡산성 둘러보기

교룡산성 동문 입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 안내판을 보면 산성의 자취를 좇으며 3120km 길이의 산성을 꼼꼼하게 돌 수 있는 답성 경로는 보이지 않는다. 산성 탐사와 상관없이, 동문에서 서문쪽 고지대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서너 경로의 등산로만 안내되어 있다. 그러나 이 등산로조차도 현재 찾는 발길이 적어서, 숲인지 길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곳이 많다. 남원시의 관심과 행동이 필요한 부분이다. 없어진 내부 건물 등이야 장기적 과제로 고려하더라도, 성벽 복원과 성벽 탐방로만큼은 더 이상 늦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동문은 방어력이 아주 뛰어나 보인다. 경사진 언덕에 견고한 옹성을 둘렀고, 그 안쪽에 홍예문을 세웠다. 홍예는 지금도 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홍예 위로 있어야 할 누각은 사라지고 없다. 홍예문과 옹성 사이에서 좌우로 시선을 돌려본다. 북쪽 급경사를 오르는 성벽의 모습이 굳세다. 교룡산성 전체 구간을 통틀어 숙종 때 보수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제 고개를 반대로 돌리니, 바닥이 깊게 패인 수로가 보인다. 그런데 그 수로를 타고 넘는 성벽은 보이지 않는다. 큰 비에 무너져 내렸음이 틀림없다. 수로를 건너서부터 남쪽 언덕을 타고 오르는 성벽이 보인다. 이쪽도 북쪽처럼 형태가 아주 뚜렷하지만 이곳은 근래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져서 그만한 모습이 된 것이다. 이 성벽은 여기서부터 남문으로 쭉 이어지는데, 대략 300m 정도까지는 깔끔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미복원이라서 온전한 구간과 무너진 구간이 혼재한다.

홍예문을 통과해서 골짜기를 따라 서향하면 사람이 살고 있는 성내 가옥이 한 채 나온다. 그보다 위에 있는 선국사라는 절 말고는 교룡산성 안에서 유일한 민간집이다. 다시 수로 옆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를 타고 안쪽으로 오른다. 곧 선국사 절이 나온다. 4~5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담한 규모로, 옛 건물은 대웅전과 보제루가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지은 것들이다. 절 주변에는 대밭이 무성한데, 전에는 거기에 창고 등 성안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성벽탐사를 포기하고 단순히 등산로를 따르면 성 내부 꼭대기 부분까지 넓게 돌 수가 있다. 하지만 온전히 성벽의 자취를 확인하면서 올라가는 산행은 앞서 말한 대로 쉽지 않다.

information - 교통

남원 주변을 지나는 중요도로는 전주-광양간 고속국도(27번)와 88고속국도(12번)다.

서울과 남원을 왕복하는 고속버스편이 주중에는 하루 왕복으로 30편이 운행되고, 주말에는 왕복으로 34편 운행된다. 남원고속버스터미널(063-632-2000)에 운행사항을 문의할 수 있다. 직행버스 운행사항은 남원시외버스터미널(063-633-1001~2)로 확인하면 된다.

남원역을 경유하는 기차편은 남원역(063-631-3229)에 문의하면 된다. 남원~서울 연결은 하루 11회, 남원~여수 연결은 하루 12회다. 남원~용산간 KTX는 하루 10회 운행된다.

이수인 객원기자 / sooin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