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

moonbeam 2016. 11. 25. 10:19


- [심층 탐구] 작은교회운동을 위한 ‘한국적 교회론’

작은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하다 보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질문이 있다. “교회가 작다고 무조건 다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큰 것을 탐하는데 여건이나 능력이 안돼서 어쩔 수 없이 작은 교회는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그 ‘작은교회’가 아니다. 그런 교회는 본질적인 면에서 소위 메가처치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작은교회란 어떤 이유에서든 큰 것에 대한 탐욕이 참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주범임을 깨달은 교회다. 그래서 주님께서 의도하셨던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작음을 지향하는 교회다. 그런 교회는 자연스럽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되는데 곧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이다. 이 글에서는 오롯이 ‘탈성장’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작은교회는 무엇보다도 개교회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교회성장주의를 노치준 목사는 “교회가 그 목표를 설정하고 활동을 전개하며 교회 내의 인적, 물질적 자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개별 교회 내부의 문제, 특별히 개별 교회의 유지와 확장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 또는 방침’라고 잘 정의했다.

이러한 개교회성장주의에는 유혹적 전제가 있는데 그건 교회 규모가 커야 하나님의 일도 크게 할 수 있다는 논리다. 고 옥한흠 목사도 결국 그 논리를 지지함으로써 사랑의교회의 초대형 신축 논란이 뜨거울 때 찬성 측에 큰 힘을 보탰다. 그런가 하면 릭 워렌 목사는 ‘메가처치가 교인들 요구를 더 잘 채워줄 수 있다’며 작은교회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에 깊은 함정이 있다. 규모가 커야 하나님 나라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교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의 손아귀에 포획된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하여 먼저 개교회성장주의에 빠진 한국교회의 병든 모습을 간략하게 진단한 후, 탈성장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건 바로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개교회성장주의에 사로잡힌 교회의 특징

개교회성장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맘몬숭배, 기복신앙, 이웃사랑의 부재, 강도의 소굴이 바로 그것이다.

1. 맘몬 숭배
개교회성장주의 배후엔 맘몬숭배가 있다. 본디 규모가 크고 힘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해온 존재가 바로 맘몬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에게 다가와 시험한 악마가 바로 맘몬이라고 볼 수 있다(마 4:1~10). 맘몬은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경제력, 신적 보호를 유발할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안했다(마 4:1~10). 한 마디로 다양한 힘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도 크게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달콤한 유혹이다. 정확히 개교회성장주의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예수님은 맘몬의 유혹적인 힘을 온 몸으로 경험했기에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으니 맘몬을 조심하라고 엄중히 경고하셨다(마 6:24). 그런데 어떻게 대다수 한국교회는 맘몬을 숭배하게 된 것일까? 그건 맘몬이 자본주의라는 우회로를 택함으로써 자기 정체를 숨기고 비밀스럽게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맘몬숭배는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다. 막스 베버가 잘 정의한 것 같이 자본주의 정신이란 ‘돈을 벌고 취득하는 일’을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정신이다. 즉 “경제적 취득은 더 이상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맘몬숭배를 두 팔 벌려 환영한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사회를 신랄하게 묘사한다.

태어나자마자, 플루톤〔부와 저승의 신〕의 머리털을 잡고 그를 땅 속에서 끌어올린 근대사회는, 황금을 성배〔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쓴 술잔〕 또는 자기의 가장 내면적 생활원리의 휘황찬란한 화신으로서 환영하고 있다.

그러니 자본주의체제는 자신의 본질 때문에 ‘한결같이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는 테리 이글턴의 진단은 정확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맘몬은 해방과 분단을 기점으로 자본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교회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대한민국이 확실한 반공·친미·친자본주의 국가로 확립되고 기독교세력이 국가중심세력으로 부상하면서 맘몬은 교회 내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는 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예가 바로 문창극 장로다. 그는 일본의 침탈은 불의요 남북분단은 비극이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감사하자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 뜻이란 그 비극적 과정에서 한국인의 치명적 결점인 게으름을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경제적 성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신앙과 자본주의의 친화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보편적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맘몬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맘몬숭배는 교회로 하여금 개교회성장주의에 함몰되도록 부추겼다.

2. 기복신앙
개교회성장주의에 빠지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교인 수를 최대한 많이 늘리는 일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타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 22:37~40). 하지만 이는 너무 높아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다. 개교회성장주의는 이 중요한 두 가지 목표를 뒤틀 수밖에 없다.

개교회성장주의가 제시하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에 물 타기를 한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데,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스카이 제서니가 잘 요약해준다.  

A를 제물로 바치고, B 기도문을 암송하며, C를 삼가면 하나님은 D로 우리를 축복할 것이다.

기복신앙을 그저 쉬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D로 표시된 세상적 풍요, 즉 권력·명예·부를 얻기 위해선 ‘A·B를 바치고 C를 삼가는’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한 형태다. 율법주의의 매력은 당사자가 제법 힘든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자신의 세속성을 자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적 우월감까지 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기복신앙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가장 중요한 근거는 자신들이 한결같이 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기복신앙의 최신 버전인 《왕의 재정》 저자 김미진은 기복신앙을 ‘자기의 필요만을 위해 복을 구하고 나누어줄 줄 모르는’ 신앙으로 규정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하나님께 아무리 큰 경제적 성공과 복을 구하고 또 누릴지라도 나누어줄 줄만 알면 기복신앙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책의 말미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도전되는 삶은 90퍼센트 기부하고, 나머지 10퍼센트도 넉넉하여 모든 것에 넘치는 삶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도전한다. 그런 삶을 살도록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라!

이는 매우 비성경적 도전이다. 그런 사고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시곤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신 예수님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막 12:41~44). 큰 나눔을 위해선 큰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맘몬과 자본주의의 논리지 하나님 나라의 논리가 아니다.

3. 이웃사랑의 결여
개교회성장주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부담스러운 실천을 무력화하기 위해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을 슬그머니 교회 안으로 도입하였다. ‘값싼 은혜’란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인은 의롭게 만들어주지 않으면서 죄 자체를 의롭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죽은 믿음’이란 순종, 즉 이웃사랑의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믿음을 뜻한다. ‘오직 믿음’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개교회성장주의에 빠진 교회들이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족을 위로하는 듯하다가 얼마 안 가 등을 돌린 슬픈 사실은 그런 점에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이웃인 경우 그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냉정하게 버린다.

여기서 이웃을 좀 더 넓게 적용하면 자연생태계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세우실 때 언약 당사자로 노아와 그 가족뿐 아니라 땅의 모든 생물까지 포함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창 9:8~17). 그런가 하면 바울은 자연만물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이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의 날을 열망한다는 걸 인지했다(롬 8:19~22). 하지만 규모 확장에 눈 먼 교회가 자연생태계까지 사랑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4. 강도의 소굴
개교회성장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신속한 교세 확장을 위해 세속적 강자를 대환영한다. 교회는 그들의 부와 권력의 도덕성을 전혀 점검하지 않고 그들을 재빨리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다. 그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무시되고, 세상의 강도들이 손쉽게 자신의 불의한 신분을 세탁하고 영적 지도자 행세를 한다. 이런 교회에선 강도들의 지지를 받는 목회자가 왕 노릇한다.

그런 강도들과 목회자가 지배하는 교회가 정치참여를 하면 민주화 이전처럼 비겁하게 군부독재를 옹호하든지, 민주화 이후처럼 노골적으로 기득권을 대변한다. 이런 정치참여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평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이 깊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는 반동적 정치참여일 뿐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신약성경이 그림언어로 표현해준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눈꼽만큼이라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벧전 2:10), 그리스도의 몸(엡 1:22~23; 4:11~16; 고전 12:12~31; 롬 12:4~8), 하나님 나라 시민들(엡 2:19), 하나님의 가정(엡 2:19), 하나님의 집(엡 2:20~22), 그리스도의 신부(고후 11:2~3; 엡 5:23~25, 32; 계 19:6~10; 21:2)로서 교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이렇게 부패한 교회는 마르크스의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저항이란 간접적으로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세상의 영적 향기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해석된 고통이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종교란 억압된 피조물의 한숨이고, 심장을 잃은 세계의 심장이며, 영혼을 상실한 상황에서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교회가 개교회성장주의에서 벗어나 탈성장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가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 성숙의 길을 가면 된다. 이는 크고 강한 것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스스로 가난한 교회가 되어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교회가 되는 걸 뜻한다.

  
▲ photo by gustavobelemmi

1. 가난한 교회
그렇다면 ‘가난한 교회’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를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모든 개교회성장주의와 기복신앙이 선호하는 교회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의 실상을 가톨릭 신학자 김근수 박사가 《행동하는 예수》에서 정확하게 분석해 놓았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가톨릭에게 명분(가난한 사람 돕기)과 실리(재산 증식)를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그들을 도우려면 돈이 필요하다-돈을 주로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부탁한다-부자나 권력자를 비판하지 않는다-얻은 돈을 관리할 권한을 교회가 가진다. 그러면 교회의 재산은 나날이 늘어가게 된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면 교회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첫째, 가난을 낳은 구조나 세력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된다. 둘째, 교회는-의도적으로든 결과적으로든-부자와 권력과 밀착하게 된다. 셋째, 모인 돈에 대한 권한(모금, 분배, 결정, 보관)을 독점하는 세력(성직자)이 교회 안에서 실권을 쥐게 된다. … 사회복지에 앞장서는 사람 대부분이 불의한 구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통 싫어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행위는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자선 사업가가 되어, 애초에 불의한 불평등을 가져온 정치경제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며 자선을 베푸는 것과 같다. 이런 행위의 허구와 위선을 자선사업가로 잘 알려진 세계적 주식투자 부호 워렌 버핏의 아들 피터 버핏이 폭로한 적이 있다.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자선-산업복합체”란 제목의 글을 통해서다.

글 초반부에서부터 피터 버핏은 가난을 심화하는 사회구조 자체의 변화에 무관심한 거대한 자선-산업복합체가 일종의 ‘자선 식민주의’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자본주의적 독지계 인물들에 대해 그들 모두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왼손으로 만들어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오른 손으로 답을 찾고 있었다”고 냉정하게 논평한다. 그런 자선행위를 “양심세탁”의 수단이라고 부르면서 “누군가 선행을 했다며 기분이 좋아질 때마다, 세상(혹은 거리) 반대편에 있는 다른 누군가는 … 즐겁고 충만한 삶을 누릴 기회를 진정으로 꽃피우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에 갈수록 예속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이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에 똑같이 적용되는 평가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개교회성장주의와 기복신앙이 선호하는 교회가 바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라는 사실은 전혀 놀랄 바가 아니다.

② 가난한 사람이 신앙적·신학적 중심이 되는 교회다
그럼 가난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김근수 박사의 스승인 남미의 예수회 해방신학자 얀 소브리노(Jon Sobrino)가 잘 정의해 준다. 단지, 그가 가난한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만이 다소 다를 뿐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이며,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교회의 구조와 조직 그리고 사명을 발견하는 교회라는 사실이다. …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일부’ 혹은 심지어 특권을 지닌 일부로 여기는 게 아니라 그들을 전체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교회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부자들이 구제활동에 힘쓴다고 쉽게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이미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유했지만 예수님처럼 스스로 기꺼이 가난해진 사람만이 교회의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다. 가난한 교회는 교회 전체의 가난을 지향한다. 교회 자체의 운영을 위해선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재정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 가난 자체가 거룩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다.

가난한 교회가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소브리노가 잘 말했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와 실천, 그에 따른 교회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권위 있는 신학적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역사란 무엇인가,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인가 등에 대해 다시 묻고 답을 찾게 한다. 그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교회적 실재를 축소하지 않는다. 도리어 교회적인 모든 것을 구체화한다.”

가난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물질적 가난이 세상의 죄가 표현된 것이라고 항의한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가난을 영구화하는 세상에 저항한다. 그 과정과 결과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고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에 비추어서 이해한다.

교회가 가난한 교회가 되기로 결단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는 순간, 교회 안에 맘몬이 설 자리는 급격히 위축될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우회로를 통해 교회 안에 숨어 들어온 맘몬숭배를 분별해내는 영적 능력이 교회에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교회성장주의, 기복신앙,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웃사랑의 결여, 강도의 소굴로서의 교회의 불편한 민낯이 폭로되고 말 것이다. 

③ 가난한 교회는 참된 교회의 재발견이다
가난한 교회의 기원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은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인 가난한 아기로 세상에 오셨다. 이미 이사야는 그러한 메시아의 탄생을 예견하며 그의 가난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사 53:2, 새번역)

이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비추어볼 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내를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신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개역개정)

“의와 공도(公道)”는 구약성경에서 유명한 쌍으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히브리어 ‘미쉬파트’와 ‘쩨다카’의 번역으로, 정의 혹은 공의로도 번역되곤 한다. 두 단어를 합하면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잘 언급했듯이 우리말로는 ‘사회정의’에 가장 가깝다 할 것이다. 그 핵심은 불의한 구조 속에서 억압당하는 사회적 약자들, 즉 다양한 처지에 놓인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는 행동, 그리고 행동에 의해 실현된 사회적 상황에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위한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실 때 이런 윤리적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출애굽 해방의 역사, 율법에 반영된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 예언자들의 정의에 대한 외침 등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절실히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말기의 왕 여호와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요시아 왕〕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렘 22:16, 새번역)

그런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 가난한 사람으로 보내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42:7, 58:6, 61:1~2을 찾아 읽으시고 적절히 조합하여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새번역)

예수님의 사역 중심에는 가난한 사람들, 가난으로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힌 사람들, 가난해서 자기 건강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 지배세력에 억눌린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은혜의 해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포하는 희년을 선포하시러 오셨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회경제적 의미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편향된 영적 해석에 균형을 잡기 위함이다.)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신 결과 예수님은 당시 지배 동맹세력에게 미움과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체포당해 당시 정치범 사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셨으나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새번역)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과 동일한 사명을 맡기셨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건 명명백백한 당위가 아니겠는가?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가난한 교회였다. 그 교회 성도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원래 가난했던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재산사용권을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된 것이다. 그랬기에 역설적이게도 그들 중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행 2:44~47; 4:32~37). 물론 예루살렘 교회는 생산 공동체가 아니었기에 분명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아직은 소수였기에 불의한 세상을 향해 저항적 행동을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하에서 최선을 다해 가난한 교회가 되려 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당시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경험한 은혜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는 사실이다(행 4:33).

바울의 교회론도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매우 흥미롭다. 바울이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대표적 그림언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 나라 시민들,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신부 등이다. 이들 하나하나를 깊이 성찰해보면 결국 가난한 교회로 귀결된다. 바울 서신 전체를 살펴보면 바울 자신도 이 점을 신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야고보, 베드로 그리고 요한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자신도 본래부터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라고 답하였다고 회상한다(갈 2:10). 그런가 하면 주의 만찬을 나누기 위해 모였을 때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먼저 배불리 먹은 일을 엄중하게 책망했다. 그런 행위는 주의 만찬을 본질적으로 훼손하는 행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고전 11:17~34).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보를 하도록 고린도 교회에 촉구할 때 기독론적인 접근을 한다. 연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는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 새번역)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보행위를 평등을 실현하는 이스라엘의 만나경제 관점에서(고후 8:13~15; 출 16:18)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고후 9:9~10) 이해한다. 이는 단순히 가진 자가 자기 부를 유지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인심을 베푸는 구제의 관점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를 통해 세워진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교회는 가난한 교회를 마치 급진주의에 경도된 사회과학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공격하는 치명적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④ 가난한 교회는 하나님의 약하심을 붙들기에 강한 교회다
가난한 교회는 세상적으론 별 볼일 없는 나약한 교회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야말로 역설적으로 강한 교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하심과 어리석음을 붙드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하심은 세상의 어떤 강함보다 더 강하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세상의 어떤 지혜보다도 더 지혜롭다. 그 역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심오하게 이해한 이가 바로 바울이다(고전 1:22~25).

예수님은 맘몬이 제안한 세상적 힘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가난의 길을 선택하신 셈이다. 경제적 힘보다 하나님 말씀을(신 8:3), 초자연적 힘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신 6:16), 제국주의적 힘보다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신 6:13) 선택하셨다. 그 결국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약함의 극치였다. 그러나 월터 브루그만이 잘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약함이야말로 힘으로 죽음을 불러오는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약함을 통해서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하나님 나라를 펼쳐나가셨다. 그리고 자신의 충실한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깊은 뜻은 오늘까지 꿋꿋하게 이어져 왔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을 제대로 간파했던 자크 엘룰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구약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고 기계화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것은 자발적 무력(無力, non-puissance)의 실패다. … 성령은 백성들을 이끌어 하나님에게 복종케 하는 역사적 힘이 아니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역사적 힘도 아니다. 성령은 모두가 절망한 곳에 희망을 주고, 이 재난 가운데서 지탱하는 힘을 주며, 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명석함을 주고, 오히려 활동 중인 악한 세력을 이편에서 왜곡시키는 능력을 준다.

톰 라이트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상태로, 고난 받으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오해받으며, 오판 받으며, 정당성을 입증 받으며, 축하하며 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 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교회야말로 맘몬이 가장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교회다. 가난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인 이유다.

2. 저항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는 앞서 잠깐 언급했듯 필연적으로 맘몬의 세상에 저항하는 교회로 나타난다. 가난한 교회와 저항하는 교회는 믿음과 순종처럼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시간과 공간의 한계 내에 있는 인간은 둘을 동시에 설명할 수 없기에 순차적으로 설명하고자 할 뿐이다.

① 저항에 이르게 하는 요인들
첫째, 가난한 교회가 되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를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불렀다. 물론 가난 그 자체로 그런 특권을 향유하는 건 아니다. 슬픈 일이지만 한국교회의 경우 가난한 사람들 중에 부유한 지배계층이 심어주는 의식과 성경 해석을 열렬히 환영하고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가난한 사람으로서 혹은 가난한 사람과 연대함으로써 경험하는 고통이 진리를 터득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 제시한 인식론에 주목해보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요 7:17, 새번역)

이 말씀의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언급한 하나님의 뜻이란 율법의 핵심인 정의의 실천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온전하게 해주는 행동이다(요 7:19~24).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바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적으로 많이 배워야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요 7:15) 의아해했던 것이다.

해방신학의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의 인식론을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이를 확인하면서 앤드류 커크는 성경적 인식론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한다. “지식이란 이론적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종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 이유인즉슨 “무엇을 듣는 가는 무엇을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교회란 예수께서 언급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교회다. 그러니 진리를 터득하는 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둘째, 이렇게 진리에 눈이 열린 가난한 교회는 정의 실현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 요청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 커크가 잘 말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고수해야 할 정치경제적 기득권이 없기 때문에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정의는 구제를 넘어 불의한 사회구조의 변혁을 명령한다. 이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이를 애써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는 그럴 수 없다. 이사야 58:6~7 같은 말씀을 통해 구제활동과 저항운동을 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새번역〕

6절은 압제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자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반면에 7절은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필요를 직접 충족시켜주는 ‘구제활동’을 가리킨다. 이사야가 의식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저항운동이 먼저고 구제활동이 뒤를 잇는다. 구제활동에는 그 영향력 면에서 치명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정치적 저항운동으로 사회구조를 바로 잡아야 구제활동으로 감당할 만한 소규모의 사각지대를 만나게 된다. 구제활동으로 정치적 저항운동을 대체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니려니와 매우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셋째, 가난한 교회는 십자가의 길이 단순히 순응의 길이 아니라 정의로 세상에 저항하다 겪어내야 하는 고난의 길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가난한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이유가 그가 당시의 불의한 사회구조에 온 몸으로 저항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저항적 삶의 대표적 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굳이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쳐주신 행동이다. 한 회당장이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안식일만 피해서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터다(눅 13:14). 그러나 안식일법을 악용하여 사람위에 군림하는 지배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막 2:27).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청결 사건이다. 마커스 보그가 저서의 새로운 판을 내면서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 지배체제의 중심지였고 바로 거기서 ‘거룩한 순수’가 정치적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 지배체제 위에 로마제국의 통치가 있었지만 이스라엘 국내의 정치적 통치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배하는 제사장 그룹 몫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순수를 빙자해 통치권을 휘두르면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과감히 뒤집어엎으신 것은 그런 억압적 지배체제에 강력한 저항이었다(렘 7:1~11; 시 73:17: 요 2:13~16). 그리고 그 저항적 행동 때문에 혹독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교회는 당연히 저항하다 고통을 겪는 교회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고난을 감내해선 안 된다. 이를 정확히 파악한 야고보는 교회를 향해 주님의 이름으로 불의의 세력에 맞서 항거의 목소리를 외치다 고난을 당하며 오래 참아낸 예언자들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권한다(약 5:10).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저항, 고난 그리고 인내는 언제나 역사적 당위라 할 것이다.

② 저항의 길
그러면 한국교회는 오늘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저항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첫째, 신앙공동체 형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앙공동체란 하나님 나라의 공동선 즉 정의와 평화를 중심으로 구성원들이 친밀하게 삶을 나누며 공동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신앙공동체의 구체적 형태는 각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방랑공동체,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 바울의 교회 공동체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저항행동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앙공동체는 자본주의 체제에 친화적인 다양한 사회적 그룹들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비록 사교적 그룹을 형성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소유적 개인주의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대중적 차원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한 정치인이 바로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이다. 그는 한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사회 같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들과 가정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이러한 개인주의적 지배이데올로기를 배격하는 신앙공동체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요 위협이다. 신앙공동체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진지라고 할 수 있다. 신앙공동체 형성을 위해 애쓰는 것 자체로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마을생태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작은교회운동은 아주 효과적인 저항운동 중 하나라 평가할 만하다.   

둘째, 교회는 교인들에게 소비주의와 성공주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소비주의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생산의 거울》에서 말한 한 사물의 네 가지 차원의 논리 중 ‘기호(sign) 가치의 논리’에 집중하는 걸 뜻한다. 한 사물의 기호 가치가 크다는 것은, 그 사물을 소유하면 모든 사람들이 ‘아, 정말로 저 사람은 상류계층에 속해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확연히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인간의 ‘구별짓기’ 본능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기호 가치가 아주 큰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나는 ‘아랫것’들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상류계층임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허영’의 본능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소비주의로 유지되는 경제체제다. 그러므로 소비주의에 대한 저항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가난한 교회는 꼭 필요한 소비는 추구하되 소비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경제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자본주의는 극히 예외적인 성공신화를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거짓 선전한다. 기복신앙의 병폐는 바로 허황된 성공주의를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가난한 교회는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성공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 점에서 예외적으로 정직한 자본주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전도서 9:11에 빗대어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비정한 현실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빠른 경주자라고 1등만 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롭다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하다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이 있다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일종의 게임과 같아서 각자의 경제행위의 결과는 ‘부분적으로는 기술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운에 의해’ 결정됨을 정확히 관찰하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아무리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넉넉하게 나누어도 처참하게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와는 반대로 산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하사하는 ‘운’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나아가 저항하는 교회는 성공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다(요 19:30). 부활은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승리요 성공임을 확증해주는 사건이다. 부활신앙이 확고했던 바울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 뜻도 거기 있다(갈 6:14).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유혹과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꿋꿋하게 저항하다 망했다면 그건 처절한 실패가 아니다. 그 자체로 위대한 승리다. 그런 승리와 성공을 이 땅에서 맛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미래 즉 궁극적 승리인 새 하늘 새 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계 6:9-11; 14:1-5; 21:1-4).

셋째, 교회는 자본주의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대안적 경제체제를 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그 중 가장 치명적 병폐 하나만 들자면 자본의 노동착취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 심화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다양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건강의 불평등이다. 리처드 윌킨슨은 《평등해야 건강하다》라는 책에서 “기대수명의 격차는 … 결국 근대 시장민주주의의 병폐”라며 “건강 불평등을, 매년 정부가 자의적으로 상당수의 국민을 사형시키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인권침해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는 논리가 ‘낙수효과 이론’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낙수효과 이론의 실상을 두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중산계급들이 ‘프리카리아트’(precariat)로 전락한 것이다. 프리카리아트는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로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파견직·실업자·노숙자들을 총칭한다. 지금은 더 이상 20 대 80의 사회가 아니라 0.1대 99.9의 사회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 없이도 그냥 가난하기 때문에 더 가난해진다. 그래서 바우만은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가난한 교회는 이런 자본주의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대안적 경제체제를 추구해야 한다. 이는 실로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바우만이 2015년 7월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개인화된 사회’에 살고 있어 문제는 사회가 만들어냈음에도 살 길은 각자가 알아서 찾아야 하는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개인들에게 함께 싸워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교회라고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십자가가 진정한 승리임을 확신하는 가난한 교회는 용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교회가 추구할 만한 대안적 경제체제에는 몇 가지 모델이 있다. 현실적 가능성이 높은 모델부터 시작해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까지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경제민주화 모델로, 이는 현행 헌법 제119조 2항에 근거를 둔다.
 
헌법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헌법 제119조가 지향하고 허용하는 정치경제체제를 무엇이라 부를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혹자는 독일식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부른다. 혹자는 민주적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의 미국과 한국의 정치경제체제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대안경제체제 중 현실성이 가장 높은 모델이다.

둘째, 필자가 《돈에서 해방된 교회》에서 간략하게 제시한 공동체민주주의 모델이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면, 자본을 사회화함으로써 생산관계를 자본이 노동에 봉사하는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테면, 노동자 스스로 운영하는 조합회사가 이윤을 가져가고 자본은 일정한 이자를 받는 관계를 말한다. 생산 조정은 자율적 시장을 일정하게 인정하되 암시적 계획과 각종 포럼활동을 통해 정부, 기업, 시민사회 그리고 지역사회가 공공협력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한다. 물론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다. 

마지막으로, 주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와 공적 점유를 전제로 하는 공산주의체제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란 구소련, 동구권, 중공 그리고 오늘의 북한 경제체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치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에 기초해 제시한 ‘새로운 사회’를 뜻한다. 그러니 역사적 선입견을 갖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다시 낮은 단계, 높은 단계로 구분된다. 낮은 단계에선 ‘능력에 따라 일하고 기여에 따라 가져간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빈부의 차이가 인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익숙해진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심성을 점차적으로 바꿔가는 과도적 기간이라 할 수 있겠다. 높은 단계에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 이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하는데,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익숙해진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심성에서 탈피해 진정한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력의 발전이다. 그래서 사회구성원의 적절한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기 위한 노동일이 현격히 줄어들어 상당히 많은 시간을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쓸 수 있게 된다. 물론 꿈같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의 모습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고 규정한다. 필자의 판단으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새 하늘 새 땅에서나 완성될 수 있을 것 같다.

위 세 가지 모델 중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 개인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유의 문제다. 개인 및 소속 교회나 그룹의 성향, 은사, 실현 가능성에 대한 판단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이다. 세 모델이 큰 틀에서 볼 때 다 우군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단 전선이 같다. 자본주의, 특히 가장 노골적인 자본주의 형태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표현에서 그렇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디까지 갈지 혹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의 차이다.


필자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이 세 모델은 경쟁적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급진적인 모델을 최전방이라고 한다면 가장 온건한 모델을 최후방이라 할 수 있겠다. 급진적 모델이 있어야 온건한 모델도 힘을 받기 마련이다. 온건한 모델도 있어야 급진적 모델이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때, 사회적 약자들이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수정주의니, 교조주의니, 거짓 형제니, 망상주의자니 하는 단어를 서로에게 사용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협조할 땐 협조하고 건전하게 경쟁할 땐 경쟁하면서 상호 정진했으면 좋겠다.

맺음말

대다수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등 뒤에 숨어 은밀하게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맘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나님 자리에 맘몬을 모셔놓고 그것이 참 하나님인양 열정적으로 숭배해 왔다. 이러한 맘몬숭배는 교회를 개교회성장주의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교회 규모가 커야만 하나님 나라 일을 크게 할 수 있다는 맘몬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하여 큰 교회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장 소중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교회로 공인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는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사랑은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기복신앙으로 대체되었다.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생태계를 포함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한 없이 약화되었다. 교회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령의 탄식을 듣고 깨어나야 한다. 탈성장의 길, 성숙의 길을 걸어가는 작은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이는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가 되는 걸 뜻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기복신앙이 선호하는 교회로, 유혹이요 함정이다. 가난한 교회란 가난한 사람이 신앙적·신학적 중심이 되어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교회다. 가난한 교회는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신학의 창조물이 아니며, 참된 교회의 재발견이다. 가난한 교회는 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하심을 붙들기에 역설적으로 강한 교회이며, 돈의 신 맘몬이 가장 무서워하는 교회다.

가난한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항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 앞에 놓인 구체적 저항의 길은 세 가지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에 맞서 다양한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창의적으로 구축해가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소비주의와 성공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셋째, 자본주의에 분노하고 저항하며 대안적 경제체제를 추구해야 한다. 버거운 과제다. 하지만 교회는 어차피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목표로 살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다(마 5:48). 특정 대안체제로 힘을 모으면 좋은 면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다양한 모델이 때로 서로 협조하며 때로 건강하게 경쟁하며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현실적 최선일 수 있다. 이렇게 가난한 교회, 저항하는 교회로 발돋움하는 작은교회들이야말로 맘몬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참된 희망이다.  


* 이 글은 지난 10월 3일, 감신대에서 열린 제4회 작은교회박람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필자 허락 아래 부분 수정을 거쳐 전재합니다.
 

박득훈
한국 개신교의 교회개혁운동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성인이자 목회자. 한국사회의 빈부격차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으나, 선교단체를 통해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 만남 이후 경제학보다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몰두했다. 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현 런던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국제장로교회(IPC)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경제정의’를 주제로 기독교사회윤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새맘교회 전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로 섬기면서 한국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깊이 고민하며 삶으로 씨름하고 있으며, 《돈에서 해방된 교회》를 썼다.

박득훈 새맘교회 전임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 goscon@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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