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떨기(펌)

한국 개신교는 왜 사회적 영성에 취약할까 --- 배덕만 교수…한국교회 옭아맨 미국 개신교의 역사

moonbeam 2016. 12. 22. 10:48



우리는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구조가 과거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신앙마저도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결과일지 모른다. 목사들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성경을 상고한 결과물 같지만, 앞서 살아간 누군가의 사상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경을 읽으면 변화된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이미 만들어 놓은 박스 안에 성경 메시지를 가두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를 보며 '대체 왜 이런 걸까' 질문하는 순간이 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불의한 권력의 마지막 보호 세력으로 교회가 지목되는 현실은 개탄스러움을 넘어 비참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진행하는 신학자 연쇄 인터뷰 세 번째 주인공인 배덕만 교수 이야기를 들으며 이해가 갔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하는지.

먼저 미국 개신교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살핀다. 한국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교회를 알아야 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에 교회를 세운 후, 신학이든 목회든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실시간으로 받아 왔다. 구한말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 교회에는 단순한 역사의 한 장면일 수도 있는 19세기 말 교회 상황이 한국교회에 신앙의 뿌리처럼 박혀서 옭아매고 있다. 이번 2부 인터뷰에서는 잘라 낼 뿌리를 헤치고 들어가 본다(1부 인터뷰 기사 바로 가기).

11월 말, 한 카페에서 배덕만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배덕만 교수에게 미국 개신교의 역사에 대해 들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기독 국가 실현' 이데올로기와 부흥 운동

한국교회가 미국에 받은 영향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보수성, 또 하나는 부흥 운동이다. 미국 초기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는 당시 가장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통을 이어받은 미국 교회는 정치적으로 보수 색채를 갖는다. 미국 교회 또 다른 특징인 부흥 운동 또한 미국 교회가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특성을 갖는 계기가 된다.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보자.

종교개혁의 유산이 미국으로 전달된 이후, 개신교 발전 과정을 보면 미국은 서유럽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미국 건국 당시, 유럽은 탈기독교화 현상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반면 미국은 건국 과정에서 개신교도 역할이 두드러진다. 지금까지도 개신교 영향력이 상당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 초기 역사는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눌 수 있다. 남부는 초창기부터 영국 성공회가 강세였다. 북부는 청교도가 주도권을 잡았다. 청교도는 칼뱅의 후예들이다. 영국 교회가 신교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톨릭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청교도는 가톨릭의 잔재를 영국에서 없애려 했다.

당시 영국을 다스린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로 인한 사회 혼란을 피하고자 왕을 중심으로 한 성공회 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결국 영국 교회를 칼뱅식으로 바꾸고자 했던 청교도를 배척하게 된다. 청교도를 영어로는 '퓨리탄(Puritan)'이라 부른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퓨리탄은 "더럽게 깨끗한 척 하네"라고 욕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청교도는 종교적으로 대단히 투철했다. 자신들의 종교 실험을 영국에서 실현할 수 없게 되자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널 정도로 신념이 확고했다. 기본적으로 영국 왕실과 대립 관계였기에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독립을 향한 열망이 강했다.

미국 남부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주로 종교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대서양을 건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 때, 황금을 목적으로 개척에 나선 것과 같은 동기였다. 대부분 영국인이라 자연스럽게 영국 국교 성공회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종교성이 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립 운동 당시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북부가 가져갔다. 남부 성공회는 영국 왕실 편을 들었고, 청교도는 독립 운동 주축 세력으로 참여했다. 미국이 독립하자 성공회의 입지는 좁아졌고 미국 건국 과정에서 청교도의 영향력이 크게 발휘된다.

서부 개척기에 들어와서는 초기 이민 역사와 달리 다양한 유럽인이 유입된다. 이 시기에 유대인, 가톨릭 신자도 미국으로 많이 이주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는 아시아인도 들어온다. 한국도 이 시기 하와이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첫 이민자가 생겨난다. 20세기부터는 무슬림인 서남아시아 이주민까지 미국으로 건너온다. 당연히 미국 땅에서 청교도가 애초 가졌던 종교관과 국가관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이 수적으로 많아졌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에는 두 가지 큰 그룹이 생긴다. 하나는 청교도 전통을 가지고 미국 주류로 활약해 온 백인 그룹이다. 이들을 와습(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이라 부른다. 백인이자 영국 계열의 앵글로색슨이고 개신교도라는 뜻이다. 종교적으로는 개신교,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의 단단한 지지 세력이다. 두 번째 그룹은 서부 개척기부터 꾸준히 미국으로 유입된 소수 이민자다. 이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적으로도 상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와습과 긴장 관계를 갖는다.

기독 국가 실현이라는 청교도적 종교 이데올로기는 지금까지도 와습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 낙태, 대이스라엘 정책 등의 이슈를 고리로 워싱턴 정가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도 와습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독 국가 실현'이라는 청교도적 종교 이데올로기는 아직까지도 미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교회 또 하나의 특성은 부흥 운동이다. 부흥사들이 이끄는 부흥 집회에서 많은 사람이 신앙 체험을 하면서, 이른바 '체험적 신앙'이 미국 교회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1차 대부흥 운동은 '마지막 청교도이자 첫 번째 복음주의자'라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미국 북동부에서 일어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칼뱅의 후예들이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2차, 3차 부흥 운동은 감리교와 침례교 위주로 일어났다. 지역적으로는 북동부를 떠나 남부와 서부로 부흥 운동이 전개되면서, 미국 남부와 서부는 지금까지도 침례교와 감리교가 강세로 남아 있다.

부흥 운동은 주로 술, 담배 금지 같은 개인 경건을 주요 동력으로 삼았다. '전도'가 가장 높은 우선순위였던 부흥사들은 교회 성장에 반하는 요소를 가급적 배제했다. 논쟁이 될 만한 사회윤리는 교회 영역 밖으로 두면서, 근면 등 개인윤리와 하나님 축복을 연결 짓는 신앙을 강조했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나중에 종말론과 연결되면서 근본주의적 선교 운동으로 발전한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대부분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사가 됐다.

이 두 가지가 미국 교회가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주요 흐름이다. 1부 인터뷰에서 소개했듯 종교개혁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었고, 당연히 미국에서도 루터파, 칼뱅파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다양한 그룹이 활동해 왔다. 재세례파 후예들도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활동했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한국교회에 전혀 소개되지 못했다. 청교도와 부흥 운동 전통을 따르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청교도적, 그리고 부흥 운동 특성인 개인 경건 중심 신앙이 한국교회 주류가 되었다.

개인 경건이냐 사회정의냐

미국 부흥 운동이 개인 경건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다른 흐름도 있었다. 특히 2차 대각성 운동의 유력 리더 한 명인 피니는 당시 보수화되던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려는 회개 운동을 이끌었다. 사회적으로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 여권신장운동, 도시 빈민 운동을, 교회 내에서는 돈 내고 자리를 사야 했던 회중석 제도를 타파하는 운동을 펼친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미국 북부 중심으로 도시 빈민, 노동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피니의 후예들이 깊이 관여하면서 소위 '사회적 복음' 전통이 생겨난다. 지금까지도 미국 북부 라인 주류 교회는 사회정의를 복음의 중요한 요소라 여긴다.

미국 남부는 다른 길을 걷는다. 노예제도 때문이다. 북부는 춥고 산악 지대가 많아 농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업이 주로 발달한다. 반면 남부는 거의 대부분 농업으로 먹고살았다. 처음 영국인이 남부를 개척했을 때는 주로 담배 농사를 지었다. 개척 초기, 고생은 많이 했지만 담배 농사로 엄청난 부를 획득하게 된다. 당시 유럽은 담배를 막 배우고 있었다. 담배가 얼마나 돈이 됐는지 성공회 사제 월급을 담배로 지급한 사례도 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면방직 관련업이 활발해지자 미국 남부는 목화 재배로 방향을 튼다. 목화 재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노동력이 상당히 필요한데, 초기에 유럽 범죄자를 동원해 농사를 지었다. 이 사람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당시 라틴아메리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 소식을 듣게 된다. 이들의 노동력이 상당히 우수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미국은 적극 노예시장에 참여한다.

미국의 목화 수출이 늘어날수록 노예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서남아시아의 노예사냥과 매매를 주도하던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영국이 노예무역 강국으로 부상한 것도 미국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예무역은 당시 영국의 주요 산업이던 면방직과 더불어 영국 산업의 양대 산맥이 된다. 영국이 공급한 흑인 노예로 미국은 목화를 생산했고, 영국은 그 목화로 다시 면을 만들어 전 세계 식민지에 팔아 돈을 벌었다.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는 물질적 풍요를 담보하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다. 이곳에 처음 복음을 전하러 간 사람들이 감리교인이었다.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을 일으킨 존 웨슬리는 사회적 영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사였다. 특히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우리가 잘 아는 윌리엄 윌버포스도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받아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다. 웨슬리는 심지어 감리교 신자가 노예를 소유하거나 매매하는 행위를 하다가 발각되면 성찬을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사회적 영성에 눈감다

감리교도들이 미국 남부에 교회를 세우고 가장 크게 부딪쳤던 부분이 바로 노예제도였다. 노예를 소유했던 지주들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고,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면 포교가 힘들어지는 상황 앞에서 교회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결국 남부 감리교는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사회적 영성을 버리게 된다.

선교 초기에는 노예제도를 비판하다가 점점 그런 목소리가 수그러들더니 나중에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설교까지 유행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17년 전, 미국의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가 결별한다. 감리교회만 이런 문제를 겪은 것은 아니다. 남북전쟁이 터지기 전에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모두 같은 이유로 분열한다.

이러한 역사적 뿌리는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위 바이블-벨트라 하는 미국 남부 지역 교회들이 정치적으로 근본주의 성향을 띠는 배경이다. 사회적, 더 정확히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교회가 가장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포기했다. 이후로 복음의 아주 중요한 측면인 사회정의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렸다.

사회적 영성이 배제된 개인주의적 신앙 행태는 남북전쟁 이후 강화하는 양상을 띤다. 전쟁의 여파와 더불어 산업혁명 부작용으로 도시 빈민 같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공단 지역 중심으로 염세적 비관론이 퍼져 나갔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종말론적 신학이 미국 교회에 소개되고 큰 반향을 일으킨다. 종말론적 신학은 이 세상이 망할 것이라 보기 때문에 사회정의보다는 개인 영성 혹은 개인 구원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진다. 당시 폭발적으로 일어난 성령 운동과 맞물려, 내세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이 유행하게 된다.

대표 인물이 제3차 부흥 운동을 이끈 무디다. 무디가 본 환상 중 이런 게 있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옆에 구명보트가 있었다. 무디는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 내라'는 음성을 듣는다. 무디를 통해 종말론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이 선교 운동으로 이어진다. 언더우드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온 많은 선교사도 당시 활발하게 펼쳐진 선교 자원 운동에 헌신한 젊은 선교사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신교가 우리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당시 미국 교회의 보수적인 신학, 그리고 사회적 경향이 함께 패키지로 들어왔다. 성경에 대한 보수적 이해, 체험을 중시하는 개인 경건 위주 신앙, 종말론적 신학 등이 한국교회 주류 흐름이 된다. 기독교 신앙의 큰 축인 사회적 영성은 배제된 채로 한국에 소개됐다.

배 교수는 미국 교회의 보수적인 신학과 특유의 사회적 경향이 한국교회에 들어오면서 사회적 영성이 배제됐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한국교회를 이해하려면 미국 교회 역사를 봐야 한다는 배덕만 교수의 말이 이해가 갔다. 한국교회 뿌리가 거기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3부 인터뷰에서는 미국에서 건너온 개신교가 한국에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듣는다. 19세기 미국 교회라는 뿌리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나무로 자라 왔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살핀다.